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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보다 몸에 먼저 스며드는 언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4. 2. 22. 17:30
이 책을 읽자니 문득 행간 행간마다 돌아가신 스즈키 구니오 씨의 육성이 들려오는 바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스즈키 씨와 대화를 나눴고 책도 두 권 냈다. 필자가 관장 노릇을 하는 가이후칸 도장에 오셔서 아이키도 수련도 같이했었다. 스즈키 씨는 강도관 유도 삼단이다. 무도에 대한 존중심과 함께 그 넘쳐나는 호기심이 인상적이었다. 스즈키 씨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삿포로시계탑 강당까지 갔다 왔다. 서로 술잔을 기울인 적 또한 하도 많다. 스즈키 씨의 사상을 논한 사람은 많아도, 스즈키 씨의 문장에 대해 말한 사람은 많지 않다. 스즈키 씨는 독특한 '문체'를 갖고 있다.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고, '보이스'라고 해도 좋다. 이는 신체 실감이 뒷받침되고 있음이 확실한 말 이외에는 달리 말하지 않겠다는 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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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작은 브리콜라주인용 2024. 2. 22. 01:50
젊은이들은 이상하게 너무 날카로운 것 같다. '지나치게 잘 드는 칼'은 칼집 없이는 들고 다닐 수 없다. 그래서 저마다 '칼집'을 궁리하게 된다. '딱딱한 학술성'이 가장 정통적인 '칼집'으로 이 안에 칼이 들어 있으면 보통 사람은 그게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지 못한다. 자기 분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좀 더 공격적인 사람은 다른 '칼집'을 찾아낸다. 힘을 빼거나 웃는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웃음)'을 추가하면 아무리 이야기가 단정적이라 해도 일단 '칼집'에 들어간다. 베인 쪽도(비판당한 쪽도) 베인 것을 모르고 함께 웃기도 한다. 가장 좋은 칼집은 '사랑'이다. '학술성'이나 '웃음'으로 더 예리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지 않다. 지성의 예리함이란 쉽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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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 글을 가지고 말 글로 써먹자인용 2024. 2. 19. 23:42
(...) 지식인은 사회와 거리를 두고, 특정한 물질적 혜택을 포기하면서 국민을 위한 양심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지식인들은 진실을 추구하다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더 높은 정의의 이름으로 통념을 거부하고 권위에 도전한 『나는 고발한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 개념에 영향받았다. 인텔리겐치아는 작가들과 사색가들을 속세에 사는 성직자로 정의하면서 그들이 보편적인 진리와 무관심의 공간 속에서 고고하게 살면서 지상에 사는 활동가들에게 도덕적인 판단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국가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어느 사회든 신성함에 대한 이례적 감각, 우주의 속성과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들에 관한 비범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사회든 일반적인 다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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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섭 선생이 하신 질문에 답하는 시리즈: '종교의 본령'이란 무엇인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19. 16:56
세 번째 질문입니다. 작년 간행된 에서 샤쿠 뎃슈 선생이 서문에서 쓰신 구절 하나가 계속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샤쿠 선생은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우치다 선생과 종교 이야기를 하고 있자면, 아주 조금은 종교의 본령에 가까워져 가는 듯하다." 우치다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종교의 본령'이란 무엇인지 여쭙고자 합니다. 이거 난처하게 되었군요. '종교의 본령'이라는 말은 샤쿠 선생이 하신 말씀이지요? 샤쿠 선생이 어떤 사고방식을 거쳐 '이런 말'을 꺼내게 되셨는지, 샤쿠 선생을 대신해 우치다가 과연 대답드려도 온당할까요? 여하튼 질문을 받았으니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종교적 지성이란 '초월' '타자' '외부'와 같이, 말하자면 자신이 갖고 있는 지적인 프레임워크로는 포섭할 수 없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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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이 하신 질문 ‘원리주의에 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16. 15:41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마르크스주의 혹은 페미니즘 맹신과, 우치다 선생님의 레비나스 신봉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게, 저는 왠지 알 것 같습니다만, 우치다 선생님은 레비나스에의 ‘귀의’, 그리고 그 비판자에 대한 ‘필주(筆誅; 남의 죄악이나 과실 따위를 글로 써서 꾸짖는 것. - 옮긴이)’라는 어휘를 쓰신 바 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는 이와 같은 행보가 자칫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번 기회에 석명해 주신다면 참 좋을 듯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답드리겠습니다. 박 선생께서 이미 ‘왠지 알 것 같다’고 쓰셨는데, 그 말씀대로입니다. 제 대답은 항상 같습니다. 제가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나 어떤 페미니스트에게 이의를 진언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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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제이콥스, 메티스 그리고 보보스인용 2024. 2. 15. 20:47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확대하여 이라는 책에 실었다. 그 책 가운데를 잠시 펼쳐 보자.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공동체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리니치 빌리지 허드슨가의 작은 구역에서 펼쳐지는 삶을 묘사한 부분은 책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많이 회자되는 대목이다. 식품점 주인인 조 코나치아 씨, 양복점 주인인 쿠차지언 씨, 철물점 주인인 골드스타인 씨를 비롯한 가게 주인들 덕분에 그 거리에서 사는 삶은 그토록 특별해졌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상점 주인들의 나라'라고 불렀을 때 드디어 부르주아들을 깔아뭉개는 궁극의 표현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보헤미안의 저술들에서 소상공인들은 편협한 부르주아 가치를 대변했다. 하지만 제이콥스는 상인들이 추잡하고 물질주의적이라고 경멸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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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인용 2024. 2. 15. 14:10
그래도 아직 잔학(殘虐)을 부린 것이 부족하여, 이에 부드러운 털을 쪽 빨아서 아교에 붙여 붓이라는 뾰족한 물건을 만들어 냈으니, 그 모양은 대추씨 같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오징어의 시커먼 물에 적셔서 종횡으로 치고 찔러 대는데, 구불텅한 것은 세모창 같고, 예리한 것은 칼날 같고, 두 갈래 길이 진 것은 가시창 같고, 곧은 것은 화살 같고, 팽팽한 것은 활 같아서, 이 병기(兵器)를 한번 휘두르면 온갖 귀신이 밤에 곡(哭)을 한다. - 박연암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라 하여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가 칼로 이루어진 범죄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 합니다. 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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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1984」: Revisited인용 2024. 2. 15. 13:36
성교는 관장을 하는 것처럼 약간은 혐오스럽고도 시시한 작업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각 당원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강조되어 왔다. 그 때문에 완전한 독신 생활을 고취시키기 위해 청소년 반성동맹(Junior Anti-sex League) 같은 조직이 있었다. 어린애는 전부 인공수정에 의해 낳고[신어로 '인수(人受)'라고 함] 공공시설에서 양육한다는 것이 기본방침이었다. 윈스턴은 이것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의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와는 어느 정도 부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은 성본능을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것을 왜곡시키거나 더러운 것으로 규정지으려고 했다. 그는 당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