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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섭 선생이 하신 질문에 답하는 시리즈: '종교의 본령'이란 무엇인가?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19. 16:56

    세 번째 질문입니다. 작년 간행된 <일본 종교의 습벽(日本宗教のクセ)>에서 샤쿠 뎃슈 선생이 서문에서 쓰신 구절 하나가 계속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샤쿠 선생은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우치다 선생과 종교 이야기를 하고 있자면, 아주 조금은 종교의 본령에 가까워져 가는 듯하다."

     

    우치다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종교의 본령'이란 무엇인지 여쭙고자 합니다.

     

     

    이거 난처하게 되었군요. '종교의 본령'이라는 말은 샤쿠 선생이 하신 말씀이지요? 샤쿠 선생이 어떤 사고방식을 거쳐 '이런 말'을 꺼내게 되셨는지, 샤쿠 선생을 대신해 우치다가 과연 대답드려도 온당할까요? 여하튼 질문을 받았으니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종교적 지성이란 '초월' '타자' '외부'와 같이, 말하자면 자신이 갖고 있는 지적인 프레임워크로는 포섭할 수 없는 대상에 직면하면서, 그 대면이 야기하는 긴장을 통해, 자기 쇄신을 이룩하고자 하는 지성을 이릅니다.

     

    이제까지도 같은 내용을 수 차례 써 왔습니다만, 저는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이룩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저는 무도가로서도, 혹은 레비나스의 '제자'로서도 '수행'을 이어왔습니다. 지금도 '수행 중'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종교의 본령'이란 '수행'을 추구하는 마인드를 이릅니다.

     

    '수행'은 동아시아의 독자적인 개념입니다. 무도를 비롯한 기예의 습득과 동시에 종교적인 깨달음[悟達] 등 여러 갈래의 측면으로 쓰이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서양 언어에는 이에 들어맞는 동의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무도와 불교 사이에는 깊은 친연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풍관은 무도 '도장'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도장'이란 말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건 원래 '보리도량'을 줄인 말입니다.* 부처님이 득도했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파생된 광의의 의미로 불교적 도를 수행하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거니와, 그 뜻이 전(轉)하게 되어, 오늘날에는 무도 수련을 위한 장소를 가리키는 데까지 전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도장(도량)'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은 무도와 불교 모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고 감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 한국어에서는 道場의 본음은 '도장'인데, 속음은 '도량'으로도 발음된다. - 역주)

     

    그렇다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껏 <무도론>이나 <수업론>에서 논해 왔던 것을 반복하는 셈이 되겠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이런 책들이 번역 출간되어 있지 않으므로 한국 독자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무도 수행'의 목적은 '천하 무적'입니다. 하늘 아래 적대시할 대상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대오 철저'입니다. (아마 그게 맞을 겁니다). 철저하게 깨달아 절대 진리와 일체가 되는 경지를 말합니다.

     

    물론 이는 수행이 향하는 '무한 소실점'과 같은 목적인지라, 그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이제껏 한 명도 없었습니다. 누구 하나 도달하지 못한 경지라 하더라도, 그게 목적지라는 데 변함은 없습니다. '무한 소실점'이 없으면 회화에서의 원근법이 존립할 수 없듯이, 이렇듯 '무한 소실점'이 없다면 수행은 모습을 갖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다다를 수 없는 목적지'를 바라보며 걸어나갑니다. 물론 걸음에 즈음해서는 '선현[先達]'이 있습니다. 그렇게 '선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걸어나갑니다. 앞을 보면 지평선까지 이어진 길이 있습니다. 그보다 앞을 내다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나아간다 한들 길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집니다.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수행자들은 모두 길 가는 도중에 숨이 끊어집니다.

    그래도 괘념치 않습니다. 올바른 목적지를 향해 숙연히 걸어왔으므로 여정의 끝이 어디라 한들 아쉬울 것은 없으며, 남들 눈에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숨을 거두게 될지언정 '소인은 일생동안 수행하였소이다'라고 어깨를 펴며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는 '어디까지 여정을 밀고 나갈 것인가'가 아니라, '걷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겁니다. 따라서 수행을 하면서는 그 수행을 하는 자가 '현재, 코스 전체로 봤을 때 스스로 어디에 위치하는가'라든가 '다른 수행자에 비교했을 때 이 몸은 어느 정도 앞질러 있는가'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플로우 차트도 없고, 근무 시간을 따지는 사람도 없으며, 라이벌도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히 개인적인 수업입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서 좌선을 지도했던 후지타 잇쇼 씨께 들었던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가르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무렵, 열심히 다니던 미국 사람이 후지타 씨께 이렇게 문의를 했다 합니다.

    "좌선을 수행한지가 이제 몇 달이나 되었습니다. 슬슬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를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앉아있으면 깨칠 수 있겠습니까?"

    후지타 씨는 말문이 막혔다 합니다. 이 사람은 '깨달음'이란 걸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다이어트를 하면 며칠 걸려 몇 킬로가 빠지겠는가', '이렇게 근력운동을 하면 며칠 걸려 상완이두근이 우람해지겠는가'와 같은 구체적인 '달성 목표'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어이쿠.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서양 사람들은 '일정표가 제시되지 않는 여행'이라는 것의 의미를 아마 잘 모를 터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그들의 일신교적 우주관에서 기인합니다. '제일 위에 창조주가 있고, 그 아래에 천사와 성령이 있으며, 그 아래 인간, 그 아래 동물, 그 아래 식물, 그 아래 광물...' 하는 식의 위계질서가 탄탄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적인 '지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지켜보며 그 '지도'상에서 스스로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그것이야말로 일신교적 우주관에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로 삼습니다. 그게 '정체성'입니다.

    그런데요, '자기가 진짜 누구인지 아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미션은 '사고 방식 가운데 하나'라서 다종다양한 사람이 꼭 그렇지만은 않거니와, 그래서도 안 됩니다.

    동아시아에는 또다른 '사고방식'이 존재합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수행'과 '정체성'은 이항대립입니다. 맙소사!

     

    '정체성'이란 건 한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앞으로 삶을 살면서 '정체성의 동요'라는 위기와 가끔씩 조우할 겁니다. 그때도 꼭 '정체성의 회복'으로만 봉합되어야 합니다. '딴사람'이 되는 해결책이란 없습니다.



    정체성의 가장 알기 쉬운 사례로서 '수퍼히어로'를 들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퍼맨은 어느날, 자신이 캔자스 주 시골에 사는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 크립튼 별로부터 지구로 날아든 외계인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미션을 받았는지를 알고 나서는 초인적인 기량을 발휘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뒤,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성숙하는 일도 없습니다.

     

    물론 제아무리 수퍼맨이라 하더라도 '정체성 위기'와 조우는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수퍼맨이 활약해 악당과 싸울 때, 불의로 그만 시민이 다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여 희생자 가족이 '수퍼맨은 나쁜 놈이다. 죽은 이를 돌려내라'며 나무라는 등의 일이 있습니다. 항상 환호성만을 마주하던 수퍼맨은 그 말을 듣고 깊이 상처받습니다. 정체성에 위기를 맞아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우연찮게 다시금 히어로로서 활약할 기회가 주어지고 시민들로부터 쏟아지는 '고마워요'라는 감사의 말을 듣게 되면, 우울증이 낫고서 원래대로 수퍼 히어로로 복귀하는 식의 서사를 우리는 질릴 정도로 보아왔습니다.

    미국의 '히어로물' 서사에 나타나는 패턴은 전부 똑같습니다. '진정한 자신과 만나게 되면 인간의 퍼포먼스는 폭발적으로 향상되는 반면, 정체성이 흔들리면 힘을 잃는다'. 그런 얘기입니다. '딴사람이 된다'는 해결책은 없는 겁니다.

    이따금씩, 우울증에 걸린 히어로(울버린이나 람보가 이에 해당됩니다)가 산속이나 외국 빈민가 같은 데에 '은거'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그래도 그건 '딴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가짜 이름'을 대는 것일 뿐이지, 그 와중에 누군가가 찾으러 와서는 곤란한 미션을 맡기고 가면, 다시금 히어로로 부활하는... 그런 전개가 이어집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서구형 히어로 이야기는 '진짜 자신을 발견하기', 거의 그것만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진짜 자신을 발견하기'를 대체적으로 문제삼았던 바가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서구 영향을 많이 받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늘기는 했습니다만, 기껏해야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란 건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이르는 것이므로, 거기에 '진정한 자아'같은 건 눈 씻고 봐도 없습니다. 어제의 자기는 오늘의 자기와는 '이제 남남'이란 게 수행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저는 교육론을 다룰 때도 곧잘 '오하아몽' 이야기라든가 나카지마 아쓰시의 <명인전>에 나오는 기쇼[紀昌] 이야기를 들곤 합니다만, 모두 다 '긴 노력 끝에 옛적의 자신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된 사람'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동아시아에서는 '인격 도야를 위한 참된 길'로 여겨져 왔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에 안주하지 않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상 '정체성'이 발 붙일 곳은 없습니다.

     

    수행은 동아시아의 고유한 '자기 도야'의 존재 양상입니다. 저는 무도 수행을 통해 이를 실천해 왔습니다.

     

    샤쿠 선생은 제가 무도를 대하는 태도라든지 레비나스 선생을 섬기는 '제자'된 도리를 보고서 '불도 수행과 통하는 점'을 느끼게 되어 '종교의 본령'이라는 어휘를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설명드리면 이해가 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2024-01-19 08:2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http://blog.tatsuru.com/2024/01/19_08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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