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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쿠다무라 사건』(2023) 평론 - 우치다 타츠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27. 17:18
어떤 매체가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에 관해 얘기해 달라고 하였기에, 이런 걸 말했다.
관동대지진 때에 일어났던 학살 사건을 그린 영화 『후쿠다무라福田村 사건』이 상영되고 있다. 필자는 이 영화 제작과 관련해 크라우드펀딩 후원을 통해 참여한 바 있으며, 또한 작품을 응원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 작품은 옴진리교를 그린 『A』, 『A2』, 『FAKE』 등 양질의 다큐멘터리를 두루 다루어 온 모리 다쓰야 감독의 첫 번째 상업 영화이다. 필자가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언급하기에 까다로운 소재를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찍고자 했던 모리 감독의 야심을 장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후쿠다무라 사건이란, 1923년 9월 1일에 발생했던 관동 대지진 닷새 후, 지바 현 히가시카츠시카 군(郡) 후쿠다무라에 머물던 자경단 포함 100명 이상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가가와 현에서 지바로 찾아든 피차별부락 출신 행상 그리고 그 가운데 유아 임산부 포함해 9명이, 도네가와 천변에서 살해당한 사건을 이른다. 자경단원 8명이 체포되었으나, 체포자들은 다이쇼 천황의 사거(死去)와 관련한 사면을 통해 곧장 석방되었다.
이 영화는 조선인 차별, 부락 차별과 같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면을 전경화(낯설게 하여 드러냄 - 옮긴이)한다. 동일한 소재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극영화는 여태까지 많이 있었지만, 상업 영화로 제작되거나 혹은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사례를 필자는 알지 못한다.
제작비를 크라우드펀딩으로 충당했으니만큼, 출연료는 결코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우라 아라타, 다나카 레이나, 나가야마 에이타, 에모토 아키라, 피에르 다키, 스이도바시 하카세, 히가시데 마사히로 등의 배우들이 참가해 감독과 각본가의 구상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이 배우들 역시 ‘이런 영화’를 일본에서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런 영화’란 어떤 영화인가. 그것은 단순히 자국의 역사적 암부를 양지로 끌어내기 위한 영화는 아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도에 따라 제작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한 선악 이원론으로 묘사된다면, 상업적 성공은 기대하기 어렵다. 엔터테인먼트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단순한 ‘기호’ 역할을 하기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깊이와 두께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이 세상에는 단순한 선인도 없거니와, 단순한 악인도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비천한 면이며 유약한 면을 껴안고 있으며, 다른 차원에서는 용기와 선의 또한 갖고 있는, 복잡한 존재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우연히 어느날 어느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건과 조우하여 생각지도 못한 역할을 하게 되는... ‘운명의 불가사의’라는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면 관객이 영화를 보고서 ‘감동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직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판을 보면, 그네들 나라 역사가 지닌 어두운 면을 파헤치려는 작품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구한말, 식민지 시절, 군사독재 시절을 무대로 하여, 다종다양한 인물이 역사극에 등장한다. 물론 일본인도 거기에 나온다. 거기서 일본인들은 스테레오타입화된 ‘악인’이 아닌, 대체로 중층적이고 깊이 있는, 복잡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자민족 중심주의 역사관’으로 제작된 작품이어서는, 엔터테인먼트로서 성립되기 어려운 지점까지 한국 관객들의 감상안(鑑賞眼)이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일본에서 그러한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는 데에 어지간히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을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드디어 일본에서도 역사의 어두운 면을 파헤침과 동시에, 엔터테인먼트의 의장 또한 걸친 작품을 만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를 보았는데, 이 작품이 일본 영화 역사상 새로운 문을 연 작품으로 자리매김했음을 느꼈다.
꼭 그런 대의명분이 아니더라도, 일단 공개가 되면 정치권에서 개입한다든지, 상영 보이콧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염려했으나, 그런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오늘날의 일본 현실에서, 이 영화가 무사히 상영되어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도 이런 비슷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검증이 되면, 사람들이 차차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깊이를 담지하고 있는 까닭은, 어떻게 보면 정착민과, 떠돌아다니며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단을 다룬 이야기도 되기 때문이다.
후쿠다무라 마을 사람들은 정착민이다. 마을을 떠나지 않고, 마을 안의 세상만 알며, 그런 어떤 로컬한 관점에 속박되어 있다. 반면, 행상인들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는 유행(遊行)자에 속한다. 그들은 ‘마을 바깥’에 그들의 마을과는 다른 사회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집단 사이에, 마을에는 좀체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지반 정착하고 있으면서, 거지반 떠도는 사람이다. 뱃사공 다나카 구라조(히가시데 마사히로), 조선에 건너갔다가 귀향한 사와다 도모카즈(이우라 아라타), 그리고 그의 아내 시즈코(다나카 레이나), 촌장 다무카이 류이치(도요하라 고스케) 등 네 명이 이에 해당된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인해 마을 공동체에서 ‘붕 떠있다’.
정착민이 유행(遊行)하는 사람을 차별하고, 박해하며, 배제했던 과거는 오랫동안 반복되어 왔다. 그건 정착민이 볼 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다른 존재(이물異物)’이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거니와, 욕망에 엄청난 불을 지피는 대상이기도 하다. 행상을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이물성’을 어떤 종류의 상품으로 팔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험한 생업이다.
후쿠다무라 이야기는, 유행자에 대한 정착민의 위화감이 일정 한도를 넘어가면서부터, 그것이 살의로 변하는 순간을 극적 클라이맥스로 배치한다. 그때, 반(半)은 정착해 있고 반(半)은 유행(遊行)하고 있는 네 명이, ‘중간에 끼어들어’ 참극을 저지하려 한다.
이 네 명이 그리하는 이유는 그들이 유독 정의감이 강하다거나, 상식적이라서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행상인에게 보내는 살의를 잠재적으로는 자신들에게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냥 지나친다면 언젠가 이 폭력은 자신들에게 행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자신들이 ‘붕 떠 있는’ 데 그치고 있지만, 언제 어떠한 이유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물’로 정죄받아 배제당할지 모른다는 점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 네 사람 가운데에서도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연기하는 뱃사공이 특히 ‘중간성’이 높다. 그는 일단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마을 외곽에 머물며,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미묘하게 벗어나 있다. 그건 그가 강물 위를 삶의 터전으로 하는 ‘바닷사람(海民)’이기 때문이다.
해민, 산골 사람, 상인, 유녀, 노름꾼, 도인, 행각승, 목공, 대장장이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아미노 요시히코에 따르면 ‘무연(無緣)한 사람’이다. 이 세상의 질서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강물을 터로 삼는 사공, 그리고 가로(街路)를 터로 삼는 행상인은 서로 ‘무연(無緣)’이라는 점에서는 동류이다.
뱃사공이 독특한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는 설정도 그가 ‘바닷사람’이라는 설정을 놓고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건 그의 개인적 매력이라기보다는, 사공이라는 직종이 가져다주기 마련인 ‘이곳’과 ‘이곳과는 다른 장소’를 가교한다고 하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런 탓에, 여인들은 ‘이곳이 아닌 장소’를 그리워할 때, 이러한 유형의 ‘무연(無緣)한 남자’한테 무척이나 끌리게 된다.
따라서 (상당히 무리한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만약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등장하는 장면에, ‘뱃놈 타령(船頭小唄)’을 배경음악으로 깔았다면 상당히 그럴싸했을지도 모른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나는 강물 옆의 누런 억새 / 자네 역시 그저 그런 억새 / 어차피 너나 나나 이번 생은 / 꽃도 없는 샛마른 억새’. 이렇듯 노구치 우조 작사, 나카야마 신페이 작곡 ‘뱃놈 타령’은 후쿠다무라에서 가까운 스이고(水郷)의 민요에서 채보한 곡이다.
외지 갔다 온 사와다 부부는 당대의 인텔리였으며 ‘이곳 아닌 바깥세상’을 알고 있다. 따라서 복장이나 말씨도 마을에서는 ‘붕 떠 있다’. 시즈코가 정사의 상대로 고른 게 사공이었던 까닭은, 그도 또한 ‘이곳’에 진정으로 뿌리내릴 수 없는 ‘무연(無緣)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관해 ‘베드신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 평언(評言)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는 제작자가 의도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닫혀 있는 촌락 공동체에서 마을 사람들의 관심사란 ‘그저 섹스뿐’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바로 그것이 마을의 폐쇄성을 표상하고 있다.
‘무연(無緣)한 사람’ ‘붕 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미남과 미녀가 많지만, 정착민들이 대개 조형적으로 못나게 묘사되는 점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물은 아니다. 정착민에게는 성적 매력이 부족하고, 유행(遊行)자는 유혹적으로 ‘보이는’ 환상을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정착민들로 하여금 유행자를 향한 증오를 휘몰아치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서 젊은이들은 아마 ‘내가 저런 상황에 처한대도 학살에는 가담하지 않을 테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건 모르는 일이다. 누구라도 학살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60~70년대 일어난 학생운동(원문 学園紛争 - 옮긴이)을 거쳐 온 세대로서 증언하건대, 분명 얌전해 보였던 학생이 별안간 절제를 상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아주 많았다’.
사실이 그랬다. 겉으로 봐서는 구별도 안 되는 사소한 정치 강령 차이가 있다고 다른 당파에 속해 있는, 똑같은 학생 신분에 있는 운동가들을 서로 죽이느니 마느니 했다. 쇠파이프로 남의 머리를 가격하고, 두개골을 골절시키는 등의 짓거리를 이렇다 할 심리적 저항 없이 자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그때 처음 알았다.
어떤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는’ 환경에 놓였을 때, 어디까지 비인간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지, 그걸 평시에는 굉장히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능한 한 ‘무슨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필자는 지금도 개인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위화감을 느낀 점은, 학살의 불씨를 댕긴 것이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의외성을 노린 각본가의 착안인지도 모르겠으나, 약간은 무리가 있었다고 본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필자가 아는 한, ‘무슨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돌연 남을 해친다든지 소용도 없이 물건을 부수는 축은, 언제나 남성이었기에 그렇다.
여성에게도 물론 폭력성이 있다. 하지만 그건 반드시 ‘가까이 알고 지내는 인간’을 향한다. 여성의 폭력은 상대를 향한 강력한 감정이 수반되어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 대해 ‘누가 죽든지 상관없었다’라는 식의 살의를 여성이 품었다는 살인 사건을 접한 기억이 필자에게는 없다.
우리들이 탑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폭력성을 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는 ‘감정 교육’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감정이 깊고, 풍부하고, 복잡해진다면, 분노나 증오, 굴욕감과 같은 ‘음(陰)의 감정’에 휩쓸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는다고까지는 하지 않겠으나, 적어도 일어나기 힘들어질 수는 있다.
감정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상상적으로 타인의 몸이 되어 보게’ 된다.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위한 장치이다. 소설을 읽고, 영화나 연극을 본다든지, 라쿠고를 듣는 건 모두 ‘감정 교육’에 보탬이 되는 활동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측에도, 폭력을 당하는 측에도, 상상적으로 몸을 두어봄으로써, 사람은 폭력을 억제하는 장치를 내면화해 간다. 이 작품 역시 ‘감정 교육’에 있어서의 우수한 기회가 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2024-01-25 18:4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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