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박 선생이 하신 질문 시리즈 「언어의 생성에 관하여」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26. 15:45

    안녕하세요.

    우치다 선생님이 '원리주의'에 대해 써주신 답변을 흥미롭게 정독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 쓰셨던 <구조주의적 일본 사회 비평론(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원제 "こんな日本でよかったね" - 옮긴이)>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으시지요.

     

    "따라서 '원리주의 반대'란 말을 영미(英美)형 기능주의자는 결코 하지 않는다.

    '원리주의 반대'를 외치는 구호 그 자체가 다름 아닌 또 하나의 원리주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리주의자'는, 우리가 여기기로는 또한 '날것(なまもの)*'이기 때문이다."

    (p.97)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참으로 지당하기도 하거니와, 사리에 맞는 언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이해나 공감을 하기 어려운 타자와 그럼에도 공생하고자 가용한 자원을 구사할진대 이를 자발적으로 행하자는 뜻.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시인은 날것의 언어를 다룬다"는 취지로 발언한 맥락에서 비롯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또한, 인류란 날것의 식재료를 요리하는 존재임을 규명하였다. - 옮긴이)

     

    여하튼 금번 '원리주의'에 관한 글에서 우치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아무튼지 간에 나 자신을 갖다가 '심사 대상으로 삼는 일'이 아주 싫기 때문입니다. 시답잖은 '판단 잣대'를 들이밀면서 심사하고 줄 세우고 점수 매기는 꼴을 나는 뼛속 깊이 증오하는 겁니다."

    특히 여기서 '계급 의식이 어쨌느니', '혁명적이니 어쩌니' 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을 음미하는 와중에, 어떤 이야깃거리가 떠오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회학 분야에는 '에스노메소돌로지(ethnomethodology)'라는 학지가 있습니다. 에스노메소돌로지는 미국 학자 해럴드 가핑클(Harold Garfinkel: 1917~2011)이 창안해 낸 개념입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학술 영역을 개척해 냈다고 볼 수 있는 해럴드 가핑클 본인의 일화를 들어 보면 이게 퍽 재미납니다. 좀 길지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가핑클은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동시에 소설도 한 편 썼습니다. 제목은 <컬러 트러블>이고,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컬러 트러블>은 사십 년대 미국 남부에 잔존했던 짐 크로우 법(흑인 차별)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1940년 삼월 이십 삼일 해질녘 버지니아 주 피터스버그에 위치한 버스 터미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버스는 워싱턴DC를 출발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더럼으로 향하고 있었지요. 젊은 흑인 커플이 백인 전용석 바로 뒤 빈 좌석으로 옮기려는 것을, 버스 기사가 보고서는 제지합니다. 버지니아 주에서는 인종 격리법이 시행되고 있으므로, 흑인은 맨 뒤에서부터 채워나가며 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뉴욕에서 온 여성 앨리스 맥빈은 이를 거부합니다. 버스 기사는 경찰 두 명을 불러들이고, 결국 이렇게 넷이 옥신각신하게 됩니다. 여기서 앨리스는 다음과 같은 논거를 들며 반론합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흔들림이 심한 타이어 윗자리에 앉을 수 없다. 심지어 그 자리는 파손되어 있다. 바깥에서 승차 대기하고 있는 흑인들이 올라타면 빈자리가 채워질 것이므로 결국 이건 시간을 앞뒤로 뒤집은 문제에 불과하다. 미합중국 헌법은 인민의 평등권을 보장하고 있다.

     

    경찰은 결국 단념합니다. 버스 기사는 이들에게 한 줄만 뒤로 가게끔 타협의 취지로 제안합니다. 기사에게 뒷좌석을 수리해달라는 조건을 달아 앨리스도 이를 수용합니다. 수리도 마치고 이제는 한숨 돌리려던 찰나, 앨리스는 한술 더 떠 버스 기사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합니다. 기사는 화가 났고, 경찰을 재차 부릅니다.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두 명이 체포됩니다. 앨리스는 혼절을 하게 되고, 결국 버스에서 끌려 나오고 맙니다. 둘을 태운 순찰 왜건이 떠나가자마자, 버스도 이제 승차가 시작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출발합니다. 이렇게 대략 두 시간 사이에 차 안에서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 가핑클은 당사자들의 입씨름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중심으로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당시 미국 소설계에서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핑클은 그 이후로 문학 장르라고 할 만한 글을 발표하지 않습니다. 그는 1942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공군에서 복무하게 됩니다. 1946년에 제대하고 나서는 하버드에서 사회학 연구에 다시금 돌입합니다.

     

    <컬러 트러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이야기의 화자가 휴가를 마치고 채플 힐(더럼 근교에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소재지)로 돌아가는 와중이었던 사회학도인 '나'라는 것입니다. 버스 안에서 마주친 사건을 이른바 '인식의 충돌'로 풀어나가는 주체는 '나'입니다. 하지만 이 '나'는 사회학자인 자기 자신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앨리스가 체포되고 나서 버스가 다시 출발하게 되는데, 이 학자는 뒷좌석에 앉은 소녀를 보고서 이렇게 말을 겁니다. "이담에 누가 우리나라의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운운한다면, 오늘 네가 본 장면을 말해주고서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들어보려무나". 이 뻔뻔하고 진부한 비평이 '심원한 통찰' 축에 속하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그건 이 학자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사회학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위화감을 느끼고 거리를 두는 바로 이 사회학자 본인이 가핑클이었습니다.

    가핑클이 사회학자로서의 자신과 거리를 둔 까닭은, 자신이 목격했던 사건을 당시의 사회학이 마련해 두던 언어로는 적절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회학 연구자 가핑클의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단어는 '계급'이었습니다. 하지만 가핑클이 이 사건에서 실지로 목격한 것은 '이해손득의 충돌'이 아니라, '지각인식의 충돌'이었습니다. 가핑클은 훗날 그가 '세계의 복수(複數)성'이라 부르게 되는 문제를 표현할 사회학의 언어를 당시에는 아직 갖고 있지 않았던 셈입니다.

    이 사건이 단편소설이라는 모습으로 발표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컬러 트러블>은 '세계의 복수성'이라는 문제 자체를 문학적인 형식으로 표현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컬러 트러블>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어떤 개념이 실제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일단 '인식의 충돌'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는 해 두되, 조만간 '새로운 사회학 언어'를 반드시 전망해 내겠다고 이 젊은 사회학자는 다짐합니다.

    가핑클은 그의 전 생애를 걸쳐, 쉬이 진부해질 게 뻔한 정형구(이를테면 '계급 없는 평등사회' 같은)에 휘말리지 않고서, 가핑클 개인의 고유한 실체실감이 뒷받침되어 자아내는 '언어'를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데 그 결과 '에스노메소돌로지'라는 참신한 학지를 창안하기에 이릅니다.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 "민주주의가 여실히 기능하는 관건은 제도가 애초에 완벽하다느니 하는 얘기보다도, 국민 개개인의 성숙도에 달려 있습니다. 국민 가운데 '착실한 어른'의 사람 수가 일정 선 밑을 맴돌게 되면, 민주주의가 쉽사리 고장나기 일쑤입니다. 지금 일본을 봐보세요". 우치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창조해 낸 이러한 '말씀'을 받들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달리 우치다 선생님과 똑같이 말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 우치다 선생님이 꼭 해야 할 말'만을 선택적으로 말씀해 오셨다는 걸요.

     

    이제 첫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치다 선생님 당신의 신체 실감을 바탕으로 태어나는 언어가 어떻게 꼴을 갖추게 되는지, 그 프로세스라고나 할까 메커니즘이라고나 그것을 부디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우치다 선생님이 학자로서 경력을 쌓으시며 손수 만드신 '학지'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슬슬 질의응답 시리즈도 막바지군요. 질문이 점점 어려워져만 갑니다. 자기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라는 것이니만큼요...

     

    첫 번째 질문에 답해드립니다. 제가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은 '정직'입니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가능한 한 가공하지 않고서, 단순화한다든지 정형화시키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출력하는 것입니다.

    미가공된 아이디어가 문자열로 출력되어 화면에 뜨게 됩니다. 그걸 보고서는 '옳다거니, 내가 이런 걸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 하는 점을 압니다. 그 문자열에 '뜻을 잘 모를 말'이나 '처음 읽은 말'이 함유되어 있는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텍스트가 저한테 가져다주는 유열은 엄청납니다. 그건 '생성' 작용이 있었단 증거거든요. '창조'의 증표라는 말입니다.

    어디 보자, 인제는 있는 그대로의 아이디어를 '굴러가게 하면', 다음엔 어떤 문자열로 자동완성될까? 읽어보고 싶네. '계속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앎의 영역'이 그걸 거두는 일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상투적 형태'라는 '함정'은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물론 그건 엄밀히 말해서 자기 스스로 생각해 낸 바 있는 것이므로 '빌린 물건'이 아닙니다. '오리지널'한 지견입니다. 그럼에도 '이미 있었던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맨날맨날 자기가 말하고 다니는 것'은, 일종의 끌어당기는 힘이 강합니다. 따라서 이제 막 생겨난, 비트적비트적하는, 성운 형태의 아이디어는, 속수무책으로 '맨날맨날 자신이 말하고 다니는 것'의 인력권에 말려들어 가고 맙니다. 그리고 '평소대로의 이야기'의 시종 노릇을 하는 에피소드 하나라든가, 방증 가운데 하나라든가 하는 부수적인 지위에 못 박혀 버립니다.

    그런 사태를 어떻게 피할 것인가. 그것이 이제 막 태어난 아이디어를 '굴러가게' 하는 데 있어서의 시급한 기술적 과제입니다.

    이런 풍경을 상상해 보시면 어떨까요. 우주를 항해하고 있는 조그마한 우주선이 있다고 합시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디어'입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우주 공간에는 여기저기 '맨날맨날 자신이 말하는 것'들이 '별'의 모습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그 부근을 지나자니 별이 발하는 강한 인력에 자칫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그 위력에 패배하면 우주선은 '평소대로의 이야기'로 분류됨과 동시에, 별은 그걸 잡아먹은 만큼 중량이 아주 약간 불어납니다.

    우주선은 어떻게든 이런 인력을 이겨내고 계속 항행하려 했습니다. 멋진 솜씨로 별의 인력권을 능숙히 벗어나 우주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우주선을 끌어들여 진로를 방해할 정도의 강한 인력을 발휘할 만한 별은 없습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문득 반추해 보면, 우주선의 '항적' 그 자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게 된 이야기'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서, '오오 하나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모습을 드러냈군' 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보면 '완전히 새로운, 이제 막 찍어낸, 나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디어'를 주의 깊게 독려하는 것, 될 수 있는 한 먼 거리를 나아가게끔 하는 것이, 글 쓰는 인간 입장에서는 최우선 과제가 됩니다.

     

     

    그럼 어떻게 그걸 수행할 것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정직'이라고 말하는 건, 다른 사람한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저는 다른 사람한테는 때때로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이 그 사람을 위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죠. 형편없는 글을 보여주고서는 '참 좋지요?' 라고 물어오면 난처해지는 경우가 있지요. 저는 그럴 때는 '아냐, 이건, 심각해. 넌 재능이 없어. 글쓰기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겠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모진 말을 듣고서 그 사람이 '그럼 이제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절망하여 붓을 꺾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보다는 '참 좋네요. 응, 왠지 앞으로 피어날 것만 같은 무한한 재능이 잠재되어 있다는 조짐이 느껴지는데요' 정도쯤 되는 말을 해두는 게 낫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다음에는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아주 아주 조금이지만) 늘어납니다. 그가 앞으로 좋은 작품을 창조해 낼 경우, 그 수익자는 (이론상) 인류 전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개살구 같지만, 앞으로는 꽃피울지도 모르는 재능'에는 우선 지나가듯이 '물주기'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다고 아무도 손해 보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이에게는 종종 '거짓말'을 합니다.

     

    다만, 자기 자신한테만큼은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문자열로 출력해 보았을 때 좀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이 소거합니다. 한 치도 용납지 않고 그리 해야만 합니다. 뭉텅이로 몇천 자 넘게 지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자신한테 틈을 줘서는 안 됩니다.

     

     

    며칠 전, 제가 쓰고 있는 책의 교정쇄를 받아보았습니다. 이런저런 매체에 쓴 것들, 블로그에 올렸던 문장 등을 가려 뽑은 책입니다. 중반까지는 술술 읽어나가며 군데군데 손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쪽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습니다.

    확실히 거기에는 제가 '언젠가는 썼을 법한 것'이 쓰여 있었습니다. 분명히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내 문장이 아닙니다. 타인의 문장인 겁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따온 문장인가 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강연록이 출처였습니다. 제가 90분 정도 강연을 했던 이야기를, 5개 정도로 끊어서 그렇게 만든 문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콘텐츠는 분명히 제 것입니다.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것들이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문체가 다른 겁니다. 읽어 보면, 호흡이 맞지 않습니다. 이런 리듬으로 이루어진 문장을 저는 쓰지 않습니다. 그런 단어는 쓰지 않습니다. 읽고 있자니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타인의 문장이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오, 나랑 썩 비슷한 의견을 가진 녀석이 있구먼' 하고서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쓴 글이라면 참을 수 없습니다. 결국 50쪽 정도를 다 지우고서, 전부 다시 썼습니다.

     

    그때 '내가 쓰고 싶은 것'이란 진짜로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도서관의 기능', '중간 공동체로서의 개풍관' 등, 거기에 쓰여 있었던 것은 제가 평소에 주장했던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인자(印字)되어 있던 문장은 '내가 쓰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 함은, '내가 쓰고 싶은 것'이라든가, 위에서 든 '아이디어'라든가에는, 그것을 어떤 문체로 서술할 것인가 하는 '스타일'도 섞는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리듬이나 어떤 음운이 아니면, 자기가 한 말이라는 느낌이 안 듭니다. 따라서, 전부 새로 썼습니다.

    그렇구나. 이것이 '정직'이라는 거구나. 그리 생각했습니다.

     

    제 글을 열심히 읽는 독자라 하더라도(이를테면 박 선생이라도), 고친 문장을 읽고서 '우치다가 쓴 게 아니다'라고는 느끼지 않을 겁니다. '왠지 약간 리듬이 평소와는 다르네. 감기라도 걸리셨을까?' 정도의 인상을 가질지는 몰라도, '우치다가 쓴 게 아니다'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정직'이라는 건, 외적인 규범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떠안긴 것입니다. 자신이 정직한지 아닌지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정직함을 저버린다면, 더는 '글 쓰는 인간'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아마 이 강연록을 바꿔 썼던 편집자는 이제까지 줄곧 '인터뷰 활자화'라든가 '강연 활자화' 혹은 '구술 필기'로 책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던 사람일 겁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가 만들었던 '초고'를 많은 저자들은, 약간의 수정만 가했을 뿐 그대로 편집자 의도대로 놔뒀던 겁니다. 따라서 그는 내용만 대충 때려 맞히면 '리듬'이라든가 '음운'을 부차적인, 장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고 여겼을 테지요.

    하지만 저한테 있어서는, 바로 거기에 문장의 '명맥'이 달려있습니다. '아이디어'란 것은 단순한 개념의 단체(單體)가 아니라,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동원된 무수한 언어 자원이 거기에 섞여들어가야만 비로소 성립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줄을 바꿀까 말까, 한자로 쓸까 히라가나로 쓸까, 여기서 글을 끊을까, 호흡을 약간만 젖히고 계속할까. 그러한 사항들이 저로서는 글을 쓸 적에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들입니다.

    20년쯤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딱 한 번 '유령 작가'가 쓴 책의 교정쇄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썼던 것들을 '짜깁기'해서 한 권으로 만든 책이었습니다. 따라서 제 책이라고 하면 제 책입니다. 처음에는 의식하지 않고 교정쇄를 읽어나갔습니다만, 도중에 '이건 내가 쓴 글이 아니다'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기분이 나빠지면서 더 이상 읽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하게 됐지만, 그 교정쇄는 파기하고 똑같은 제목으로 전혀 다른 책을 처음부터 썼습니다.

    그런 유형의 '정직함'이 어째서 글을 쓸 때 사활적으로 중요한 점인지는, 역시 아직은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제가 확실히 아는 건, 스스로에게 정직하기를 그만둔다면, 저는 아마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2024-01-24 12:3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