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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 선생이 하신 질문 ‘원리주의에 대해’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16. 15:41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마르크스주의 혹은 페미니즘 맹신과, 우치다 선생님의 레비나스 신봉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게, 저는 왠지 알 것 같습니다만, 우치다 선생님은 레비나스에의 ‘귀의’, 그리고 그 비판자에 대한 ‘필주(筆誅; 남의 죄악이나 과실 따위를 글로 써서 꾸짖는 것. - 옮긴이)’라는 어휘를 쓰신 바 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는 이와 같은 행보가 자칫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번 기회에 석명해 주신다면 참 좋을 듯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답드리겠습니다. 박 선생께서 이미 ‘왠지 알 것 같다’고 쓰셨는데, 그 말씀대로입니다. 제 대답은 항상 같습니다. 제가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나 어떤 페미니스트에게 이의를 진언하는 까닭은, 그들의 ‘원리주의적’인 자세가 부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모두 탁월한 사상입니다. 이제까지 뚜렷하게 의식화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사회적인 부조리나 가혹함을 전경화*해서,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 점에 관해서는 다대한 공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적을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경의도 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 페미니스트, 그 밖의 ‘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예상치 못한 위험성이란 바로 ‘너무나 날이 잘 선 사상적 이기(利器)’를 쥐었을 때 그걸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싶다’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 foregrounding [문학] 언어라는 매개체를 비일상적(非日常的)으로 사용하여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일. , 상투적 표현의 관례를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지각을 일으키는 것으로, 프라하학파의 언어학과 시학에서 쓰인 개념임. - 옮긴이)

     

    어떠한 사상이든지 그것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분야와, 그다지 유효하지 않은 분야, 전혀 유효하지 않은 분야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즘을 통해 문학이나 영화, 음악, 미술을 논하는 것은 ‘과잉 적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 적용’을 한 탓에, 그들의 사상은 오히려 그 본래의 수명을 단축해 버린 것처럼 생각됩니다.

     

     

    제가 중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시작해 대학생, 대학원생에 이를 무렵,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마르크스주의는 그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 시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들의 사상을 정치나 경제, 역사에 관해 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의 영역에까지 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놓고서 하나하나마다 ‘계급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혁명적인지 아닌지’ ‘전위적인지 아닌지’를 요란하게 평가하려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행동거지에 신물이 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평가받는다’는 것 자체가 아주 싫었기 때문입니다. 고만고만한 ‘판단기준’을 때려 박아서는 심사하고,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게 저는 뼛속까지 싫은 겁니다.

     

    제가 쓰는 글에 계급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든가, 혁명성이 결여되어 있다든가 하는 점에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세상없어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쓰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쓰면 계급 의식이 있다고 평가받겠거니’ 하는 심사 기준을 눈치 보며 쓰는 건 딱 질색입니다.

     

    애초에 ‘다른 인간이 쓴 모범에 따라 쓰라’는 말은, ‘내가 쓰지 않아도 누군가가 비슷한 말을 대신 써 줄 법한 내용만 쓰도록 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내가 존재하든 말든 이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건 자신을 향한 ‘저주’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내가 말하지 않으면 달리 누가 똑같이 말해 줄 사람이 없는 말’만을 선택적으로 해왔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글을 쓰는 의미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대신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과부족 없이 말해준다면 저는 여타의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작업’을 찾아 나서서, 그것을 하겠습니다.

     

    제가 이런 인간이므로 예의 ‘마르크스주의적 평가’가 꼴 보기 싫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식이나, 남이 만든 창작물을 두고서는 ‘계급 의식의 결여’를 귀 따갑게 비난하고 다녔고, 결국 모두가 질려버린 나머지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것 참 기가 찰 노릇이군 하던 찰나, 80년대에 이르자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하더니 이번에는 ‘젠더 감수성 결여를 무의식중에 드러내고 있다’라든지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남성중심주의가 행간에 배어 나온다’라는 식의 ‘페미니즘적 심사 평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저 자신은 여태껏 여성의 권리 확대에 언제나 찬동해 왔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집안일을 솔선해서 떠안은 남편이었고, 육아에 관해서는 아내 이상으로 열심이었던 아버지였습니다. 페미니즘의 정치적 주장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 왔습니다.

     

    그런데 문학이나 영화 영역에까지 페미니즘이 들이닥쳐서는 작품의 좋고 나쁨에 대해 발언하는 데에는 반대했습니다. 제가 페미니즘을 비판하며 쓴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는 분명 한국어 번역이 나와 있을 것인데, 페미니즘 언어론과 문학론에 관해 반론한 책입니다.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저는 사회 이론으로서의 페미니즘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영역(정치, 경제, 사회문제)에는 적용하되, 그것을 적용하기에 부적절한 영역(영화나 문학)에 들여오는 데에는 적이 자제적이었으면 한다고 말씀드릴 따름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페미니스트들이 주최한 모임에서 ‘신체론’에 대해 강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난 뒤 객석에 있던 페미니스트로부터 ‘당신의 신체론은 100% 남성 지상주의적인 관념론’이라는 소릴 들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신체론에는 젠더 관념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여성은 자기 신체를 생각할 적에, 자신의 여성성을 우선 의식하고, 철저히 거기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치다 다쓰루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득이 이렇게 반론했습니다. 만약 자기 신체를 다룰 적에 ‘나는 일본인의 입장으로밖에는 신체를 다룰 수 없다’라든가 ‘나는 그리스도교도의 입장으로밖에는 신체를 다룰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적이라든가 신앙 같은 인공물을 경유하지 않으면 신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건데, 이건 굉장히 자유롭지 못한 처사’라고밖에는 제가 말씀드릴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도에서 다루는 신체는, 골격근이라든가 관절 등 해부학적인 신체에서 시작하여, 호흡기나 경락, ‘()의 흐름’ 같이 측정 불가능한 것까지 다룹니다. 그 층위에서의 활동에 이르면, 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사항은 전혀 관련될 여지가 없습니다. 분자생물학적 층위에서는 인종, 국적, 신앙, 연령, 성별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만약 선생님이 ‘우리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 신체란 『여성 그 자체라는 존재』임을 매우 의식하고 있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 그 자체라는 존재』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라고 정녕 말씀하시려거든, 선생님은 무도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든 ‘원리주의적인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원리주의적 입장에 입각해 ‘고만고만한 판단기준’으로 세상만사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질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이제, 제가 레비나스에 ‘귀의’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혹여 그게 원리주의는 아닐는지, 하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레비나스의 제자’이지, ‘레비나스 주의자’가 아닙니다.레비나스 주의자’이기 위해서는, ‘레비나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나는 알고 있다’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레비나스 주의의 견지에서’ 세상만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애초에 ‘레비나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제자’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40년 이상 읽어왔음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레비나스 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뭔갈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건 ‘전도’입니다. ‘여하간 레비나스를 읽어 주십시오’ 하고 길 가는 여러분께 매달리며 간청하는 겁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저는 이제까지 다양한 분들이 쓴 레비나스론()을 읽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남들을 향해 ‘너는 레비나스를 이해하지 못했다’라든가 ‘네 레비나스 이해는 틀렸다’라고 논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비판받은 적은 더러 있습니다만). 다른 이의 레비나스 이해도를 평가할 권리가 제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열린 수수께끼’로 동등하게 모든 독자 앞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명 한 명의 독자가 그 사람 고유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성적・감성적・영성적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제 작업은 단지 ‘레비나스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구려’라고 알려줄 따름입니다. 레비나스를 어떻게 읽을지는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을 과연 ‘레비나스 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필주’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어떤 페미니스트가 레비나스는 일개 성차별주의자라고 평한 데 대해 ‘전도자’로서 항의한 사건입니다. 굳이 레비나스가 아니더라도, ‘감축(減縮)하는 읽기’에 저는 항의합니다.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고, ‘거기에 애써 이해할 만한 내용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라며 남들한테도 욕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레비나스를 어떻게 읽을지도 그 사람의 자유이며, ‘나는 레비나스를 이렇게 읽었다’라고 말할 자유는 누구에게든지 있습니다. 다양한 ‘읽기’가 공생하는 게 무엇보다도 제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읽었다. 그리고 읽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모두 읽지 마라’는 방향으로 독자를 유도하는 읽기는 ‘전도자’인 저로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이해되셨을는지요?

     

    (2024-01-17 17:3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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