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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6. 18:33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종교’와 ‘종교성’ 등에 관한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우치다 다쓰루 선생님과 샤쿠 뎃슈 선생님이 함께 쓰신 ‘영성’, ‘종교’, ‘종교성’에 대한 저작을 전부 다 읽어본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 시리즈(聖地巡礼シリーズ)』를 필두로 『일본 영성론(日本霊性論)』, 『현대 영성론(現代霊性論)』이나 『정토진종, 입문은 했지만(はじめたばかりの浄土真宗)』, 『이제 와서 절밥을 얻어드실라고?(いきなりはじめる仏教入門)』부터 『미스터리 그 자체! 일본의 종교(日本宗教のクセ)』까지 모든 내용이 흥미로웠고 얻어가는 것도 많았습니다.
쓰신 책들을 통독하고 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지성적이기에 합당하려면 인간은, 어떤 경로로든 종교적 품성을 갖추게 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는 첫째로 우치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지성적’ 그리고 ‘종교적’이란 것 사이의 관계성 그 이로(理路)라고나 할까, 역동성에 관해 청해 듣고자 합니다.
저는 일단 ‘무신론자’입니다. 이런 제가 소위 한국 개신교회 열심히 다닌다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점차 스멀스멀 약이 오르곤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너희들은 지옥 간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이게 무시당하는 것 같거든요. 결국 무심코 ‘하늘에 계신 주님이 그렇게 좋냐?’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본질적인 질문만 들고 오셨네요. 가르쳐 드릴 겸 답장해 드립니다.
첫 번째 주신 질문은 ‘지성적이라는 것’과 ‘종교적이라는 것’ 사이의 관계성에 관해서였지요?
그동안 제가 쓴 책에서 누차 밝혔기는 하되, 저는 과학적 지성과 종교적 지성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하나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개념 모두 언뜻 보아 무작위로 생기(生起)하는 것 처럼 보이는 사상(事象)*의 배후에, 모종의 아름다운 질서가 존재하고 있음을 직감하여, 그 질서를 알려는 정열에 구동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에서는 이를 ‘법칙’이라고 하고, 종교에서는 ‘섭리’라고 합니다.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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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① 관찰할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나는 사물과 현상. ② [수학] ‘사건(事件)④’의 구용어. - 옮긴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주 큰 것에서부터 아주 작은 데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앎을 초월한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의 작용은 이러한 ‘사람의 앎을 초월한 무언가’의 경역(境域) 안쪽으로 1밀리미터라도 내디디고, 인간의 행보를 펼쳐나가는 것, 즉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인간의 정리(情理)가 통하는 세상’을 펼쳐나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주공학이나 나노기술 얘기에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 가운데에는 ‘인간성’이란 개념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다른 이를 향하는 폭력을 억누를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폭력이 정당화될) 기회만 있다면 타인의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거리낌이 없기는커녕, 가끔은 즐거이 행합니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다른 이에게 굴욕감을 안겨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 자신의 권력이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나머지 자제심이란 게 소용없는 사람이 있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위 사람들의 삶의 의욕을 꺾어 놓는 데만큼은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그들을 구동하고 있는 ‘충동’ 역시, 저는 어떤 종류의 ‘사람의 앎을 초월한 무언가’로 여기곤 합니다. 이건 단적으로 ‘악에 관한 문제’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과학적 지성의 연구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적 지성에 있어서는 아마 이게 최우선적인 질문이 될 겁니다.
저는 첨단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갖고 있는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문가들한테 맡겨두지요. 그런데 인간의 마음과 몸이 어떻게 작동하느냐 하는 얘기가 나오게 되면, 자기 몫의 마음과 몸이라는 ‘실물’이 떡하니 있는 거예요. 이를 연구하는 데 제가 쓸 수 있는 시간은 평생토록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사람의 앎을 초월한 무언가」에 대한 이해를 1밀리라도 개진하는 것’을 지적 과제로서 스스로 떠안기로 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이 살 만한 세상, 인간의 정리(情理)가 통하는 세상’을 조금씩 넓혀가고자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말의 정의를 약간 고쳐 쓰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조리’라는 말의 정의를 약간 넓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악에 관한 문제’는 어쩌면 ‘인간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거의 전일적으로 다루는 분야가 종교적 지성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말은 변신론(辯神論; Théodicée)의 핵심을 이루는 질문입니다. ‘어째서, 신이 창조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창조주가 전지전능하다면, 악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근데 악이 존재한다는 건, 이 세상은 결국 신이 창조하지 않았다는 말 아닌가?’라는 힐난인데 여기에 대해,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했던 시도가 변신론입니다. (신의론神義論, 신정론神正論이라고도 한다. - 옮긴이) 고대 시절부터 다양한 변신론이 나오고 있지만, 그 어떤 신학자도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최종적인 해답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받아들임으로 하여, 인간성에 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깊어졌다는 이해의 결과가 ‘고작 이거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애써 반론할 여지는 없지만요.
또 한 가지, ‘구원’ 얘기를 해봅시다. 저는 어쩌면 ‘구원’이라는 개념은, ‘될 수 있는 한 까마득한 시간의 지평 가운데 사고하라’고 인간에게 요청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미륵보살은 부처님이 입멸하고 나서 56억 7천만 년 뒤의 미래에 이 세상에 나타나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합니다. 유대교는 메시아가 내림(來臨)할 것을 그 신앙의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도, 메시아가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내일인지도 모르고, 56억 년 후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역시 ‘최후의 심판’을 믿기에 그들 종교 자체가 성립하는 것입니다만 그 최후의 심판이란 게 언제인지도 모릅니다. 내일인지도 모르고 (위와 같음).
‘구원을 믿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천문학적인 시간의 지평 속에서, 세상만사를 사량(思量)하는 습관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저는 이러한 ‘망외(望外; 바랐던 바 없던 상상 이상 - 옮긴이)의 효과’야말로 ‘구원’이라는 종교개념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방무우大方無隅 대기만성大器晚成 대음희성大音希聲 대상무형大象無形’.
‘커다란 사각형[方形]에는 모서리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커다란 그릇은 만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커다란 소리는 잘 알아들을 수 없다. 커다란 것에는 형상이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는 ‘대기만성’만이 보육 현장에서의 드문 용례로 자리 잡았을 겁니다(아니면 사어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 다른 사자성어들은 이제 인구에 회자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저는 매우 긴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인즉 ‘커다랗다’라는 개념에는 그 자체로 깊은 의미가 있다는 점입니다. 노자가 ‘커다랗다’고 일렀다 함은 ‘손에 들고 있는 「계량도구」로는 계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커다란’ 것에 관해서는, 사실 ‘커다랗다’는 형용사조차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으레 ‘계량도구’를 적용할 수 없는 이상, 진짜로 ‘거대한’지 아닌지 그 여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거대한 것’은 거시적인, 우주적인 스케일 가운데 놓아두어야지만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게 노자의 가르침입니다.
종교적 지성이란, 이렇게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 ‘거대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릅니다. 인간이 쓸 수 있는 도량형기로는 결코 고량(考量)할 수 없는 것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자신의 무력(無力)과 비소(卑小)에 관한 의식이란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태여 ‘나는 무력하고 비소한 존재’라며 위축되라든지 무력감한테 가서 나 좀 좀먹으라고 놔두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내가 욕망하고 있는 건, 그렇게까지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커다란 무언가」는 아닌 걸 거야’라는 점을 깨닫고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 조금은 선선한 기분이 되라는 겁니다.
‘구원’은 본래, 인간적 도량형으로는 고량(考量)할 수 없는 것에 압도되는 경험을 말합니다. 박동섭 선생이 만나셨던 크리스천이란 분이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라고 주장하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신불(神佛; 일본에서 초월적 존재를 뭉뚱그려 일컫는 말 - 옮긴이)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의 무량성(無量性)’을 실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거대한 것’에 대한 외포(畏怖)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2024-01-15 18:1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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