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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치바街場」라는 개념에 관해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 30. 11:23

    한국에서 필자가 낼 다음 책은 ‘Q&A책’이다. 이런저런 질문을 받아서, 필자가 대답하는 것이다. 이미 25개 정도의 질문에 답했으므로 슬슬 책이 만들어진다. 다음은 새해 첫날에 도착한 박동섭 선생의 질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이다.

     

     

    ー우치다 선생님의 책 가운데 「마치바街場의 현대사상」 「마치바街場의 독서론」 「마치바街場의 공동체론」 「마치바街場의 교육론」은 이미 한국어판이 나와있습니다. 이 한국어판 「마치바街場 시리즈」 가운데 「마치바街場의 교육론」과 「마치바街場의 독서론」은 제가 옮긴 책입니다.

     

    따라서 한국 출판계와 언론에서는 우치다 선생님을 ‘거리의 사상가’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어의 ‘거리’란, “골목, , 가로, 스트리트”를 의미하는 고유어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치다 타츠루론 제 2부」라는 책에서 ‘마치바街場’를 단순히 한국어 ‘거리’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의논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가 그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으므로 ‘마치바街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쓸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마치바街場’라는 말은 ‘생활자의 실제 감각’이라는 스테레오타입에도, ‘전문적 지견’이라는 스테레오타입에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의, 평범한 생활 감각’에 기초 지어진 평명한(알기 쉽고 분명하다 - 옮긴이) 비평 사상이 이 ‘마치바街場’라는 말에는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어의 ‘고토바’라는 말은 본디 ‘고토(~- 옮긴이)’의 ‘단(; )’에서 왔다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결국 ‘고토바’는 ‘사실’에 비해 언제나 불완전하며, 더욱이 사실에 뒤처질 숙명이라는 말이겠지요.

     

    저는 이 ‘마치바街場’라는 말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단(; 실마리)’을 보여주는 힘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했기에, 구태여 한국어로 옮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우치다 선생님의 ‘마치바街場’라는 말을 한국어로 옮기지 않은 채로 쓰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사고는, 자신에게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른 사고로부터 배워야 하며, 그것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것에 한정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치다 선생님의 ‘레비나스 전도 활동’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남의 사고를 정말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는 채 대치시켜 두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우치다 선생님은 평소에 ‘생활자’와 ‘전문가’ 사이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말, 왕복 운동이 가능한 말을 필사적으로 찾아내려고 하시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과업이 ‘마치바街場의 말’을 하시는 원천이 되지 않나 하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요전번에 보내 주신 우치다 선생님이 최근에 내신 『마치바街場의 미중론』을 읽고서 다시금 실감하였습니다.

     

    이 기회에 한국 독자들에게 우치다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마치바街場’라는 말의 속뜻을 가르쳐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우치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마치바街場’의 의미 말씀이군요. 으음, 저한테 물으셔도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처음 제 책에 쓰려고 골랐던 사람은 고 히로키(江弘毅) 씨라는 편집자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인가 3년 즈음에, 그가 당시 편집장을 하고 있었던 간사이의 생활정보지 『Meets Regional』에 연재 칼럼을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붙였던 제목이 ‘마치바街場의 현대사상’이었습니다. 썩 멋진 제목을 붙였구만 하고 감동했습니다. ‘마치바街場’라는 말은 고 씨가 애용하는 어휘였습니다.

     

    고 씨는 아마도 지식인과 시정 사람이 오고 가는 공간을 ‘마치바街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편집자의 작업은 지식인의 전문적 지견을 소화하기 쉽게 저잣거리에 전하고, 동시에 생활자의 ‘리얼’한 실감(實感)을 학술 세계에 끌어들여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역동적인 왕복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편집자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장에서만 ‘살아있는 말’이 태어나는 법이라고 생각했던 셈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봅니다. 생활자의 실감이 ‘공소(空疎)’하다고 여긴다면 학술적으로 아무리 엄밀해도 현실을 변성(變性)하는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 어디든지 통용되는 범통적(汎通的)*인 지의 층에 달하지 않는 생활 실감은, 결국은 극히 좁은 지역적 한계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 본래 칸트의 철학 용어임; ‘범통적 규정의 원칙’ 등. - 옮긴이)

     

    같은 말을 뒤집어서 말하자면, 생활자가 정말로 자기 생활에 확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학술적으로 범용성 높은 지견에 닿았을 때 그것이 처음 듣는 어휘라고 해도 결코 ‘공소’하다고는 느끼지 않을 터입니다. 또한, 생활자가 (언어, 친족, 교환 등에 대해) 목숨 걸고 지키려는 윤리나 규구(規矩;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 - 옮긴이)가 정말 있다면, 그것은 어디선가 ‘암묵지의 차원’에 통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겁니다.

     

    고 씨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곧잘 ‘우치다 선생님의 말씀은 ‘마치바街場’에서도 통할 만하네요’라는 식으로 제게 말하곤 했습니다. ‘마치바街場에서도 통한다’는 건, 고 씨가 제게 해 준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저는 고 씨가 그렇게 말해주어서 몹시 기뻤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서 있어야 할 장소가 바로 이 마치바街場라는 걸 확신했습니다.

     

    『침대에서 배우는 구조주의』라는 책이 제 ‘마치바街場 적’ 저서 데뷔작입니다.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 바르트 등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의 지견을 일본의 고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게 잘게 부수어 설명한 책입니다. ‘이러한 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쓰였던 구조주의 입문서는 학자가 ‘초심자 상대’로, 이야기를 짧게 줄여서, 대강 개요만 이야기한다고 느끼게 하기 마련이었고, 어떻게 보면 독자를 내려다보는 태도가 없잖아 있었습니다. 기실 그런 유형의 저술 방식을 학자들은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계몽서’라고 부르곤 하던 실정이었으니까요. ‘계몽’이란 말은 곧 ‘몽매를 깨게 하다’(우둔한 인간을 개화한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련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등학생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생활자로서 착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구조주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구조주의라는 건 다름 아닌, 언어와 친족, 교환에 관한 깊이 있는 지견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 역시 언어를 구사하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경제 활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조주의에 대해 사유할 소재는 자기들 경험 속에 넉넉히 존재합니다. 아마 사소한 기회로 ‘살아있는 말’과 ‘죽은 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것은 일종의 ‘역할 연기’를 하는 일이라는 점을 안다든지, 선물을 받고 나서 나중에 아무것도 ‘답례’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들은 ‘인류의 암묵지’에 접근하는 회로에 이미 손이 닿아 있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딱히 ‘계몽’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등학생 스스로 생활 실감의 심층을 향해 수직으로 파고들어가면 됩니다. 그러기 위한 작업의 지침이 되는 책을 쓰려고 했습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독자의 주체적인 결의를 ‘담지하고서’ 책을 쓰는 학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독자의 지성을 신뢰하며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교육자로서의 경험이 가져다준 확신이었습니다.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고 싶다면, 어른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학생들이 지적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란다면, 이미 지적으로 충분히 성숙해 있는 인간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경의’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의’라는 것은 ‘애정’보다도 ‘신뢰’보다도, 까마득하게 전달력이 강한 메시지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주고, 상대방의 의도를 적확히 받아들여 주는 것이 ‘경의’입니다. 그러니만큼 독자의 지성에 분명한 경의를 표하면, 상대측은 ‘받아들일 자세’를 취해 줍니다. 그렇게 되면 ‘저자와 독자 사이의 회로’가 형성됩니다. ‘회로’만 통한다면, 그다음에는 거기에 정보가 흘러다니게 하면 됩니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메시지와 함께, 메시지의 독해 방식을 지시하는 메타 메시지, 이렇게 두 개의 층이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할 말은 당신들이 지적으로 충분히 성숙해 있을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곧 독해의 방식을 지시하는 제 메타 메시지입니다. 그 메타 메시지를 독자가 적확하게 받아들여준다면, 커뮤니케이션 회로가 만들어집니다.

     

    고 씨는 『침대에서 배우는 구조주의』를 읽고서 이러한 제 스탠스를 이해하여 저를 ‘마치바街場의 사상가’로서 설정해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고 난 뒤에 저는 ‘마치바街場의 ~’라는 제목을 단 책을 거의 스무 권 가까이 냈습니다. 스스로 붙인 제목이 아니고, 전부 편집자가 붙여준 것입니다. 아마 굉장히 써먹기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마치바街場의 ~를 제목으로 채용한 책을 쓴 사람은 지금 시점에서 일본에서는 저 혼자인 것 같습니다. 학자와 생활자 사이를 ‘가교하는’ 작업이 너무나 좋아서 펄쩍펄쩍 뛰어다닐 지경인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방증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실로 즐거운 작업인데도 말이죠.

     

    (2024-01-03 07:2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인생은 실전이야, 애송아

    こぞう、Keep it real. - 한국 街場말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書を捨てよ、町へ出よう - 데라야마 슈지

     

     

     

     

    “‘연봉을 누가 누가 더 받나’ 게임에서는 학력과 학벌이 좋을수록 처음에는 일단은 유리하지만 불행하게도 ‘홀로 독립하여 누가 먼저 부자 되나’ 게임에서는 그것들이 정말 별 의미를 주지 못한다. 부자가 되려면 미국인들이 ‘길거리 지식(street knowledge)’이라고 부르는 총체적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대조직에서 배우기는 대단히 어렵다. 언제나 일 전체보다는 일부분만 배우게 되고 맡은 분야 이외에는 관심을 잘 두지 않기 때문이다.”

     

    - 세이노 지음, 『세이노의 가르침』, 123~124(ePub).

     

    “그리고는 스스로 독립하거나 중소기업 같은 작은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좋은 회사’라는 곳에 다니지는 못하겠지만 일 전체를 배우게 되며 ‘길거리 지식’을 얻게 되어 부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만이 중소기업의 천국인 이유는 직원들이 일을 배워 자꾸 독립하기 때문이다.”

     

    - 같은 책, 115(ePub).

     

     

    지식이 고도로 전문화한 시대에는 새롭게 불거진 상황을 ‘읽는 능력’에서 주요 신문사의 기고자들(저명한 정치학자, 지역연구 전문가, 경제학자 등)이 『뉴욕 타임스』의 수준 높은 독자나 기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 테틀록은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에 관한 수필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썼던 말을 인용한다. 고슴도치들은 “중요한 것 하나를 알고” 세상을 보는 이론을 가지고 있어서, 특정 사건을 논리적으로 일관된 틀로 설명하고, 자기처럼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자들을 도저히 참지 못하며, 자기 예상을 확신한다. 특히 오류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

     

     

    나는 산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아탑 안에서 이루어지는 학문 탐구도 중요하지만, 삶의 현장에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한하다. 하지만 그런 살아 있는 지식은 그것을 애써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깨어 있는 눈에만 보인다고 일러주었다. 또한 제도 교육 시스템에 너무 구애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16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설사 몇 년 늦어지더라도 가치 있는 교육, 즉 산 교육을 받는 것이 더욱 중요한 성취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서진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대규모 시장이나 기업은 아니지만) 기업 혹은 레반트 지역의 야외 시장인 수크(Souk)는 너그럽고, 정직하고, 사랑스럽고, 믿을 수 있으며, 개방적인 품성을 지닌 최고의 인간을 배출하는 곳이다. 나는 근동 지역의 기독교 소수파의 한 사람으로서 (특히 소규모) 기업이나 시장은 관용과 인내의 품성을 갖게 해주는 유일한 곳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합리화나 훈계를 배척한다. 안티프래질한 팅커링처럼, 실수는 사소하고 기억에서 금방 사라진다.

     

    나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환경에서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과 충돌하면서 지내기 전까지는 그런 환경이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추구할 수도 있는) 현장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생물학자이자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매트 리들리(Matt Ridley)는 나에게 지성을 중시했던 페니키아 상인(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가나안 상인)의 기질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 나심 탈레브, 『안티프래질』, 37.

     

     

    일본어로는 ‘시장’(市場)이라고 쓰고 이것을 ‘이치바’(いちば)라고 읽는 경우와 ‘시조’(しじょう)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두 단어는 똑같은 한자를 사용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경제학자인 마미야 요스케는 『시장사회의 사상사』 서문에서 ‘이치바’와 ‘시조’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이치바’가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킨다면, ‘시조’는 추상적이라 ‘장소성’이 희박하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집 근처에 생선 가게, 양품점, 꽃집, 두부가게, 튀김집, 과일 가게, 야채 가게 등이 좁은 골목의 양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왁자지껄하게 이루어졌다. (…) 쓰키지는 결코 비효율적이고 전근대적인 이치바가 아니다. 그곳은 수산물 시장 중에서도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거대한 매매장이다. 쓰키지가 생업의 터전인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많은 상인의 인간관계 위에 구축된 정묘한 관행과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쓰키지는 17세기 초기에 만들어져서 관동 대지진으로 파괴된 니혼바시 어시장의 전통을 계승하는 존재이다. “시장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난날 도쿄 변두리 조닌(町人)의 전통을 이어 받은 존재라는 데 자부심이 있다. 장인, 잡역꾼, 가족, 친구, 고객을 연결하는 개방적인 마음의 끈 그리고 소규모 가족 기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집과 일터가 같다고 봐도 되고, 거기에서는 종종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혈연관계와 생산 행위에 관해서 사회적, 경제적인 교섭을 하는 번잡한 일을 완수하였다”라는 의미에서 쓰키지 시장은 ‘쓰키지 시조’로 불리고 있지만 엄밀하게는 ‘시조’가 아니라 ‘이치바’다.

     

    (…)

     

    이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이치바’에 관한 ‘시장 경제론’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공급 곡선이 교차하거나 추상적인 경매인이 가격 결정을 하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체적인, 살아 있는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하는 가운데 현실에서 물리적인 물질과 에너지의 들어가고 나감을 만들어 내는 장면에 관한 고찰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처리 불가능할 것이 분명한 방대한 셈이 쉽게 실현되는 기적이 펼쳐지는 현실의 이치바에 관한 고찰이다.

     

    - 야스토미 아유미, 『단단한 경제학 공부: ‘선택의 자유’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19~31.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갈등이 절정에 올라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양측 사이에서 무언가 균형을 찾으려고 했다. 반 위크 브룩스는 1915년에 발표한 저서 『미국의 성년식』에서 자기보존의 장치와 삶의 신비를 명확히 구분 짓는 사회에 대해 불평을 토로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는 두 부류의 대중이 있다. 문화적인 대중과 사업적인 대중, 이론의 대중과 활동의 대중, 메테를링크를 읽는 대중과 돈 버는 데만 골몰하는 대중이다. 전자는 대체로 여성적이고 후자는 남성적이다.” 그는 이러한 두 문화 사이에서 ‘호혜적인 중간 지대’를 찾으려고 했다. 그는 ‘이상을 현실 속으로’ 넣고자 했으며 좋은 것과 좋게 만드는 것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 데이비드 브룩스, 『보보스』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달콤한 향기엔 변화가 없을 것을.

     

    - 『로미오와 줄리엣』

     

     

    단어들은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사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음성이다. 그러나 음성과 그 대상 또는 사상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어느 동물을 일컫기 위해 굳이 ‘dog’, 신을 일컫기 위해 ‘god’을 선택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전혀 없다. 다른 음성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일한 이유는 사회적 관습이다. 어떤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 물건은 이런 소리로 부르자는 식의 동의가 중요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단어들은 동의를 거친 자의적인 상징들이다. 물론 돈도 그렇다.

     

    - 데이비드 그레이버

     

     

    우치다 다쓰루에게 ‘마치바’와 같은 말의 역할은 그것을 연구의 지침으로 삼고 생활 원리로 살아내는 사람의 실천을 통해서 현실 그 자체를 분절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매일의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여러 사상을 총체적으로 더듬고 탐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한 말들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사후적으로 알 수 있다.

     

    - 박동섭, 『우치다 다쓰루』

     

     

     

     

    중유는 자가 자로(子路)이고 노나라 변 지역 사람이다. 공자보다 아홉 살 아래이다.

     

    자로는 성격이 거칠고 용맹한 힘을 좋아하며 뜻이 강하고 곧았다. 수탉의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수퇘지의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 다녔다. 그는 한때 공자를 업신여기며 포악한 짓을 했다. 그러나 공자가 예의를 다해 자로를 조금씩 바른길로 이끌어 주자, 자로가 나중에는 유자의 옷을 입고 예물을 올리며 공자의 문인들을 통해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자로가 정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말했다.

    “그들(백성)보다 앞장서고 나고, 그들(백성)을 수고롭게 하라.”

    자로가 좀 더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된다.”

    자로가 물었다.

    “군자도 용기를 숭상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의를 최상으로 여긴다. 군자가 용기만을 좋아하고 의가 없다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기만을 좋아하고 의가 없다면 도적이 된다.”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또 다른 것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

     

    자로는 공자를 따라 천하를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다. 길을 가다가 장저, 걸닉, 삼태기를 멘 노인 등을 만났다.

    자로가 노나라 계씨의 재()가 되었을 때 계손이 물었다.

    “자로는 대신이라고 말할 만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자리만 채우는 보통 신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자로는 누대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괴외는 두려워 석기와 호염을 내려 보내 자로를 공격하게 했다. 그들이 공격하여 자로의 갓끈을 끊자, 자로는 이렇게 외쳤다.

    “군자는 죽을지언정 갓을 벗지 않는다.”

    마침내 자로는 갓끈을 다시 맨 뒤 죽었다.

     

    - 『사기』 「중니 제자 열전」

     

     

    They sat silent in the coal-black cave of vines. Ma said, “How’m I gonna know ’bout you? They might kill ya an’ I wouldn’ know. They might hurt ya. How’m I gonna know?”

    Tom laughed uneasily, “Well, maybe like Casy says, a fella ain’t got a soul of his own, but on’y a piece of a big one—an’ then——”

    Then what, Tom?”

    Then it don’ matter. Then I’ll be all aroun’ in the dark. I’ll be ever’where— wherever you look. Wherever they’s a fight so hungry people can eat, I’ll be there. Wherever they’s a cop beatin’ up a guy, I’ll be there. If Casy knowed, why, I’ll be in the way guys yell when they’re mad an’—I’ll be in the way kids laugh when they’re hungry an’ they know supper’s ready. An’ when our folks eat the stuff they raise an’ live in the houses they build—why, I’ll be there. See? God, I’m talkin’ like Casy. Comes of thinkin’ about him so much. Seems like I can see him sometimes.”

    I don’ un’erstan’,” Ma said. “I don’ really know.”

    Me neither,” said Tom. “It’s jus’ stuff I been thinkin’ about. Get thinkin’ a lot when you ain’t movin’ aroun’. You got to get back, Ma.”

     

    - Steinbeck, John. The Grapes of Wrath, New York: The Viking Press,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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