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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올해의 우치다 타츠루 뉴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 26. 15:30

    2023년 마지막 날을 맞았으므로, 상례로 행하는 ‘올해의 중대 소식 발표’를 하겠다.

     

     

    (1) 오른쪽 무릎에 인공 관절 수술을 받았다. 이에 티타늄 무릎이 되었다.

     

    201911, 지독한 감기가 들고 나서, 오래전 다친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을 견디기 어려워졌다. 스프레이형 진통제를 도포하고, 보호대를 칭칭 감고서 수련을 계속했으나, 점차 참을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이키도를 할 수 있기는커녕 일상생활조차 영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모리오카에 갔을 때 비행기에서 발을 질질 끌면서 내리려니까 승무원분이 ‘휠체어를 준비해 드릴까요?”라고 물었을 정도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미야케 접골원 원장인 미야케 마사키 선생의 조언에 따라 외과적 수술을 받기로 했다. 처음에는 고베 가까이에 있는 나라(奈良)의 병원에서 수술받을 예정이었다. 와중에 2차 소견을 들으러 쇼와대학병원 정형외과에 갔는데 ‘저희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주십시오’라고 간곡히 이르기에 그러기로 하였다. 도쿄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걸리적거리기는 하였으되, 인맥이 있는 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게 뭔가 편리할 수 있겠다고 여겨, 46일에 수술을 받게 되었다.

     

    3월에 들어서자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다리 부근 근육이 경직된 탓에 좌골신경통이 도져서, 방 안에서조차 기어가듯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수술받으러 도쿄까지 가는 게 수술 그 자체보다도 훨씬 힘겨웠다.

     

    수술은 1시간 반만에 끝났으나, 온몸에 튜브가 삽입된 상태가 사흘 이어졌다. 휠체어로 이동하는 법을 연습하고 나서, 재활이 시작되었다. 첫날은 평행봉 같은 것에 양손으로 매달려서 걸었는데 가까스로 십 미터쯤 걷는 게 고작이었다. 과연 걸을 수 있을까 불안했으나, 3주간 입원하면서 재활에 힘쓴 결과, 426일에 퇴원했다. 퇴원 날에도 지팡이를 짚고서 비척비척 걸어 다녔다.

     

    좌골신경통 통증은 근육이 경직되어서 일어나는 증상인지라 근육을 움직이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 될 수 있는 한 자주 걷기 운동을 해서, 퇴원하고 두 달이 지난 622일 아침 수련 시간에 복귀했다. 과연 수련에 참가할 수 있을지 불안했지만, 아무튼 거동할 수 있었다. 정좌 자세는 취할 수 없어도 다치와자[立ち技]는 거의 평상시대로 움직였다. 이래 봬도 48년 동안 계속 수련해 왔던 신체인 것이다. 어디가 고장난다 해도, 다른 부위나 요소가 ‘백업’을 해 주니 어떻게든 된다.

     

    연말 시점에 이르면 수술이 끝나고 이제 8개월 이상 지났다. 이제 수련에는 거의 지장이 없다. 거합할 때 앉아서 하는 게 좀 버겁지만, 앞으로 반년 정도 지나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 이렇게 조금은 더 현역 무도가로 생활할 수 있다. 의학 발전에 감사할 뿐이다.

     

     

    (2) 다다(多田) 선생님의 아이키도 등 강습회가 다시 열린다.

     

    코로나 동안 줄곧 중지되었던 다다 선생님 본부 도장에서의 강습회가 재개된다. 지난 10, 12월에 있었으며, 11월에는 지유가오카 도장에서 주최하는 검・봉[] 강습회가 있었으므로, 매월 다다 선생님께 지도받을 수 있었다. 다다주쿠도 슬슬 일상 회복[平常運転]한 것 같았으므로, 어렵게 어렵게 다다 선생님께 ‘내년 12월에 고베 가이후칸에서 열릴 강습회에 다시금 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여쭈었더니, ‘그러마’라고 즉답해 주셨다. 2024121일에 선생님께서 왕림하신다. 2019년 이래 5년 만에 열릴 강습회이다. 우리 가이후칸 도장에 돌아와 이 일을 보고하였더니 모두 환호했다.

     

     

    (3) 117일에 이케가미 로쿠로 선생이, 33일에 쓰루자와 칸야 씨가 돌아가셨다.

     

    이케가미 선생*이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목소리가 건강해 보이셔서 마음을 놓고 ‘퇴원하신다면 꼭 마쓰모토로 뵈러 가겠습니다’라고 약속했더니만, 급거 부고가 날아들었다. 미야케 야스미치 선생과 함께 마쓰모토에 찾아뵙겠다고 말했던 찰나 미야케 선생이 돌아가시고, 이케가미 선생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20년에 걸쳐 필자의 신체를 돌보아 주셨던 명의 두 분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만날 수 있을 때 만나두어야 하지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하는 법이라는 걸 통절하게 깨달았다.

    (* “대학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의료 행위는 다 해 보았는데도 전혀 차도가 없는 환자라도 이케가미 선생은 ‘어쩐지 낫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케가미 선생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언젠가 대학병원으로부터 전신이 마비된 여고생이 실려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케가미 선생은 그때 일단 9자 주문을 외면서 손가락으로 허공에 세로 4, 가로 5줄을 긋고 주술을 부렸다고 합니다. 임병투자개진열재전 하고 말이지요. 그러자 그 소녀의 마비가 풀렸다고 합니다.” <배움엔 끝이 없다> 82~83- 옮긴이)

     

     

    칸야 씨가 암으로 투병하고 있던 줄은 몰랐다. 1월에 도쿄 도나리마치가배에서 열렸던 신년 모임에서 뵈었는데, 평소라면 기모노 차림으로 샤미센을 연주해 주었을 터였음에도, 그날만큼은 양복 차림으로 늦게 도착해, 인사만 하고 바로 자리를 뜨셨다. 돌이켜보면, 모두에게 고별인사를 하러 와 주신 것이다. 칸야 씨의 장례식은 도쿄 인근의 히가시무라야마 시에서 있었으나, 그 무렵에는 걷는 것조차 어려웠던 상태였으므로, 장례식에는 예를 다하지 못하였다.

     

    칸야 씨는 필자가 고베여학원대학 재직 당시 ‘아트매니지먼트 부전공’을 수강 하던 학생들을 ‘아트매니지먼트 실습’ 차원에서 ‘하나야구라 회() 공연’ 스태프로 받아주시기를 부탁드렸던 것이 인연의 실마리였다. 당시 국립극장*의 디렉터를 지내던 야나이 겐지 씨에게 소개받았던 것이다.

    그때 실습 내용으로는 ‘하시모토 오사무 씨가 가사를 쓴 사쓰마비와** () 공연’을 보고 난 뒤, 하시모토 씨로부터 ‘프로듀서의 철칙’을 주제로 한 강연을 듣는 화려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칸야 씨를 떠올리자면 야나이 씨 그리고 하시모토 오사무 씨도 마찬가지로 동시에 떠오른다. 칸야 씨와 차분하게 이야기한 것도, 그러고 보면 하시모토 씨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였다. 아다치 마호 씨, 야나이 유코 씨와 넷이서 하시모토 씨에 관한 추억을 이야기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거의 일간 이토이 신문’에서 진행했던 하시모토 씨 관련 연속 강의 첫 회(이때가 코로나 직전이어서 아직 모일 수 있었다) 뒤에 아다치 씨가 합류해 하시모토 씨의 추억 이야기를 했던 일도 있었다.

    (* 국립극장: 도쿄 지요다구 소재. 문부성 일본예술문화진흥회 운영. 주로 가부키, 분라쿠, 일본 무용, 일본 국악, 아악을 공연함. - 옮긴이)

    (** 사쓰마 비와: 무로마치 말기 가고시마에서 융성했던 비파(호금), 또한 그것을 반주로 하는 서사 음악. 시정에서 행해졌던 町風과 사족의 士風을 에도막부 말기에 이케다 진베에가 융합했던 正派 외에, 메이지 시대 도쿄에서 나카다 긴신이 세운 錦心流, 그 문하에서 나온 스이토 긴조가 고안했던 니지키 비와가 있다. 악기는 가쿠비와(楽琵琶)보다 작은 총연장 약 1미터, 44주四弦四柱로 주()는 크고 높다. 부채꼴의 대형 바치()로 켠다. 니지키 비와는 55. - 옮긴이)

     

    고베여학원대학에도 와 주셨거니와, 고베 가이후칸 도장에도 와주셨다. 하토야마 유키오 씨가 총리직을 그만 둔 직후에 도쿄 가구라자카에서 같이 식사한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자니 끝이 없다.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있다. 칸야 씨가 고베여학원대학 워크숍에 와 주셨을 때이다. 대학 당국이 내어드린 수고비가 말 그대로 박봉이었기에 ‘나미키야’ 에서 스시를 대접했다. 둘이서 카운터 앞에 나란히 앉아 스시를 들고 있으려니까, 평소 같았으면 묵묵히 있었을 초밥 장인 양반이 호기심에 못 이긴 나머지 ‘우치다 교수님, 저분 대체 어떤 일 하시는 분이지요?’라고 물어왔다. 우치다처럼 평범한 남자가, 예스러운 히사시가미 머리모양을 쭉 내밀고서 화장을 두텁게 한, 누가 봐도 ‘맵시 있는’ 사람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미녀를 데리고 온 점, 너무나도 ‘있을 수 없는 사태’인지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쓰루자와 칸야: 조루리 즉 ‘기다유’ 샤미센 예인.)

    (** 조루리:

    긴 이야기극이자 일본 민속악. 16세기에 아이치 현 중・동부에서 맹인 음악가의 악극으로 발생하였다. 비파나 부채 장단을 반주로 하였고, 머잖아 야하기矢作지방 토호의 ‘조루리’ 영애와 우시와카마루와의 연애담을 읊은 「조루리 히메 모노가타리浄瑠璃姫物語」 (「조니단 소시十二段草子」)가 널리 받아들여져, 같은 가락으로 다른 서사를 읊게 되었으며, 이를 조루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17세기 초부터 샤미센 연주를 반주로 한 인형극을 동반하여 닌교조루리人形浄瑠璃가 일어났으며, 처음에는 교토에서, 후에는 다른 대도시에서 유행했다. 초기에는 ‘에도’의 긴피라부시金平節, 도사부시土佐節, 게키부시外記節, ‘교토’의 이세지마부시伊勢島節, 가쿠타유부시角太夫節, 가가부시加賀節, ‘오사카’의 하리마부시播磨節, 분야부시文弥節 등 옛조루리가 성행했다.

    1684년 다케모토 기다유(竹本義太夫)가 오사카의 다케모토극장에서 ‘기다유부시’를 읊기 시작해, 여기서 기다유부시가 조루리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후에 분고부시豊後節나 그 계통의 도키와부시常磐津節・기요모토부시清元節 등의 ‘가부키 조루리’, 또한 잇주부시一中節・가도부시河東節・신나이부시新内節 등 실내에서 듣는 우타()조루리 등이 파생했다. - 옮긴이)

     

     

    (4) 올해도 책을 많이 냈다.

     

    『신 전쟁 전 일본(新しい戦前)(시라이 사토시 씨와의 대담, 아사히신서), 『마치바의 성숙론(街場の成熟論)(문예춘추), 『마치바의 미중론(街場の米中論)(동양경제신보사), 『긴장이 배제된 힘(気はやさしくて力持ち)(미사고 치즈루 선생과의 서간문, 쇼분사), 『해 뜨기 직전 (이 가장 어둡다) 夜明け前(が一番暗い)』 (아사히신문출판), 『일본 종교의 쿠세(日本宗教のクセ)(샤쿠 뎃슈 선생과의 대담, 미시마 사), 『일신교와 제국(一神教と帝国)(나카다 고, 야마모토 나오키 선생 등과 대화, 집영사 신서), 『부활한 자본론: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시리즈 최종권(甦る資本論)(이시카와 야스히로 선생과의 서간문, 가모가와 출판사), 『’어떤 재판에 관한 전기’를 읽다』(「ある裁判の戦記」を読む』) (야마자키 마사히로 씨와의 대담, 가모가와 출판사).

     

    앤솔러지 등에 투고한 글도 있으나, 단독 저술 및 공저 가릴 것 없이 생각나는 건 이 정도인 것 같다.

     

    내년에는 『용기론(勇気論)(고분샤), 『오다지마 다카시가 쓴 트윗(小田嶋隆のtweet)』이 봄 무렵에 나올 예정이다. (원고가 마무리되었기 때문). 가을까지는 『곤도 세이쿄(権藤成卿論)(월간일본)를 탈고하고자 한다. 한국 유유출판사라는 곳에서 ‘외국 출판사 오리지널 기획’ 으로 한 책도 나올 예정. 『알베르 카뮈론』 완성은 2025년에 될 듯하다.

     

    저작 리스트 중에서는 아무래도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시리즈 전 5권을 장장 15년에 걸쳐 완결지을 수 있었던 게 가장 기쁘다. 함께 해 주신 이시카와 선생과 마쓰다케 노부유키 씨의 후의에 그저 감사할 뿐.

     

    야마자키 씨의 재판이 끝났던 건 작년 2022년이었다. 정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승소를 기념해 ‘승전회’를 열고 있다. 올해에도 7월에 모일 예정이다.

     

    ‘야마자키 마사히로 씨의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을 통해 1000만 엔을 넘는 기부액이 모였다. 재판 비용을 지출했던 한편, 야마자키 씨의 책 『어떤 재판에 관한 전기』, 그리고 필자와의 인터뷰집을 출판하기 위해 일부 지출하였다(기부해 주셨던 분들에게 2부씩 보내드렸다). 그밖에, 여타 괴롭히기 소송(언론 자유를 위한 것임 - 옮긴이)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토 시오리, 아리타 요시후, 기도 마사키, 스이도바시 하카세, 그리고 또 한 분(익명 요청)에 기부를 했다. 이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5) 여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우선 새해 전날에 떠올랐던 게 이 정도다. 또 생각나는 게 있으면 추가해 두기로 한다.

     

    (2023-12-31 17:2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어라, 이건……하고 몸을 반쯤 일으켜 페이지를 뚫어지게 들여보았더니 오구치 가쓰지(小口勝司) 이사장이 웃으며 나를 보고 있다.

    ‘갓짱’은 히비야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나는 오타구의 변두리 시골풍 중학교에서 히비야고등학교에 진학한 터라 딱딱하게 긴장했고, 1학년 때부터 공부만 했다.

    갓짱은 간다신사 경내에 사는 도쿄 토박이 출신으로 말쑥한 도시 소년이었다.

    (…)

    ‘딱 한 자리’ 비어 있을 뿐인데도 그는 어떻게 내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교실 뒤에 놓아둔 쓰레기통을 끌고 와 그 위에 당연한 듯 가방을 올리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이다.

    나는 깜짝 놀라 갓짱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갓짱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AERA』에 실린 사진과 똑같이 웃는 얼굴로 미소를 짓더니, “우치다 군,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해서 뭘 하려고 해?” 하고 물었다.

    (…)

    다음날 둘이서 아메요코에 갔다가 그 길로 오차노미즈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서는 그의 플루트 연주를 듣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밤이 되었는데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 저녁밥을 얻어먹고 그의 집에서 잠까지 얻어 자고 말았다.

    (…)

    내가 갓짱에게 받은 영향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무엇보다 막 열여섯이 된 나는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미지의 세계에 대단히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갓짱에게 배운 가장 소중한 교훈은 ‘어린애’ 그대로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끝이 있으니까 즐거운 거야”하는 갓짱의 눈빛은 약간 슬픈 듯했다. “, 어른이 되어야지.”

    나는 그 후에도 좀처럼 ‘어른’이 되지 못하고 고생스러운 길을 걸어가야 했다.

    갓짱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 할아버지가 세운 쇼와(昭和)대학 의학부에 들어갔고, 졸업하고는 대학에 남아 연구자가 되어 이윽고 대학교수도 되고 이사장도 되었다.

    따라서 58세의 나이 먹은 갓짱의 웃는 얼굴은 열일곱 때와 그다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81113)

     

    - 우치다 다쓰루, <어떻게든 되겠지>, 68~72.

     

    고등학교 동기이자 내가 가출했을 때 이모저모 도와준 친구가 부친의 전근과 형의 결혼으로 가족이 떠난 커다란 저택에 혼자 살기 시작했습니다. 오차노미즈의 간다신사 경내에 있는 집이라 교통이 편리했습니다. (…) 곧장 불량한 친구들이 꿀 따러 모여드는 벌처럼 모여들었습니다. 한때 전성기에는 ‘집주인’을 빼고 군식구 세 명이 눌러앉아 정치적 밀담, 술자리, 마작 등 무엇이든 거리낄 것 없는 양산박의 성채 같았습니다. (…) 오구치(小口) 집안의 어른들께는 이 자리를 빌려 40년 전에 저지른 잘못을 빌고 싶습니다.

     

    - 같은 책, 54.

     

    대학을 바꾸어 교토대학 법학부를 지망했지만, 유례없는 높은 경쟁률에 걸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순다이 입시전문학교에 들어갔습니다. (…) 전해 도쿄대학의 입시 중지 여파로 순다이학교에는 히비야고등학교의 동기생들이 200명쯤 들어왔습니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 중 곧장 합격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순다이학교에서 재회했습니다.

     

    - 같은 책, 39~40.

     

    조금 더 보수가 좋은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닌 결과, 2때부터 오차노미즈에 있는 ‘뉴포트’라는 재즈 다방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 뉴포트는 그다음 해 실로 ‘간다 카르티에 라탱 투쟁’이 벌어지는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내가 있을 무렵에는 아직 심각하게 위태로운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오차노미즈 거리에는 말로 딱 표현하기 어려운 자유롭고 개방적인 기분이 흘러넘쳤습니다.

    중앙대학이 있고, 메이지대학이 있고, 일본대학이 있고, 메이지대학 옆에는 순다이 입시 전문학교가 있고, 오차노미즈 다리 맞은편에는 도쿄 의과 치과 대학이 있고, 그 앞에는 도쿄대학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일본 최대의 대학가였지요.

    출판사와 서점이 줄지어 있고, 다방과 레스토랑과 악기점과 레코드점이 많고, 어느 가게의 화장실에 들어가더라도 연극이나 독립영화 포스터, 당파의 선전지가 벽에 잔뜩 붙어 있었습니다.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은 다들 신나게 떠들면서 마른침을 삼키며 시대가 몰라보게 변해가는 모양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어린애도 섞여 들어가 “어라, 저건 뭔가요?” 하고 물어보면 “저건 말이지……”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었지요. 참으로 품이 넓은 동네였습니다.

     

    - 같은 책, 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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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차노미즈 관련】

     

    신카이 마코토가 감독한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2022)에서, 도쿄 오차노미즈 지역은 이야기의 주요 무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철역 앞, 준텐도 병원, 간다가와 천변 등이 자세히 묘사됩니다. 또한, 이곳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찍이 소개한 바 있는 지하의 초자연적 존재, 「미미즈」가 깃든 곳이라는 점을 신카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암시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소 놀라운 얘기인데, 다이쇼-쇼와 연간에, 저희 증조부께서, 오차노미즈의 어딘가에 적을 둔 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이분에 대한 행적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요절하셨다고 합니다.

    저 자신은, 저 혼자 지금 자신의 의지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는 없다는 점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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