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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의 본질이란 무엇인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 5. 20:12
도서출판 유유라는 곳에서 필자의 책을 내주기로 하였다. 일본인인 나에게 한국 출판사가 찾아와 기획 단계서부터 그들이 오리지널하게 제안해서 내는 책이다. 유유출판사 편집자가 보내온 질문에 답하는 구성이다. 이제까지 스무 문항에 답했다. 다음 글은 19번째 질문이다. 어지간해서는 일본 독자가 물으러 오지 않는 스트레이트한 질문이다.
ー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수많은 저서를 통해 ‘학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또한 그것을 다음 세대에 ‘패스’ 혹은 ‘선물(present)’할 필요성을 역설하십니다. 이번에 저희와 기획하신 이 저서 역시 일종의 중요한 ‘학술’ 활동의 일환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학술’의 본질이란 무엇인지를 여쭙고자 합니다.
조금 아까 제가 생각하고 있다는 ‘문무 양도(文武兩道)’에 대한 글에서, 제가 학술에 관해 취하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를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학술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충분치 못했나 보군요. 하여, 제가 생각하는 ‘학술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불가지(不可知)’한 것들이 발하는 기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주의 기원이 38억 년 전이라고는 하지만, 그 ‘앞/전(前)’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언젠가 어느 곳에서 우주는 끝난다고는 하지만, 그 ‘뒤/후(後)’에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그 또한 모릅니다. ‘내측(內側)’을 보아도 그러합니다. 신체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장기와 뼈가 있지요. 안쪽으로 더 들어가보면 세포가 있고, 더 안쪽을 보면 분자, 원자, 소립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그 ‘다음(先)’이 뭔지는 알 수 없는 데까지 맞닥뜨립니다.
결국, 이 우주 가운데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란 그다지 넓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학술의 본무는 이렇듯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단 1밀리씩이라도 확장해 나가는 작업입니다.
무도(武道)란, 인간의 신체라는 ‘미크로코스모스’ 내부에 깊이 파고들어 인간 신체의 구조와 기능에 관해 연구하는 근행(勤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도는 대단히 ‘학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철학에 관해 제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은 아마 보통 철학 연구자들이 말하는 것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철학이 세상의 성립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연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철학에 좀 수도(修道)적인 의미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두뇌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평연하게 말하자면 ‘슬기로이 하는 것*’입니다.
ー
(* 賢くする: 똑똑하다, 현명하다, 약다. 또한, 초월적인 것을 경외한다는 뜻 또한 있음畏い. - 옮긴이)
두뇌의 기능을 향상시킨다는 건 이런 의미입니다. 진화의 필요로, 혹은 생존전략의 필요로 인류의 여명기 때부터 최우선시되었던 과제일 터입니다. 살아 나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이게 필요한 것입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하면 두뇌의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는 제 폭주적인 사변을 전개하겠으니, 반쯤은 흘려듣는 셈 치십시오.
두뇌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특효약은, 난문(難問)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자기 손에 들려 있는 경험적인 지견이나 신체 실감(實感)만으로는 간단히 대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난문에 그럼에도 마주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역사상 최초의 철학자들은 대개 이런 가설들을 세우곤 했습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탈레스). ‘만물의 근원은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어느 모로 보나 우리의 경험 실감(實感)에 부합하지는 않는 지견들입니다. 무척 대단하구나 싶다가도 ‘오호라, 진짜로 그러네요’라고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차라리 ‘이건 아닌데’ 하고 똑소리 나게 반론할 수 있느냐 하면 어지간해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아마 지금 제가 탈레스나 헤라클레이토스랑 토론을 벌여 본다손 쳐도 도무지 논파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탈레스나 헤라클레이토스 자기네들 역시, 사실은 자신이 말한 내용을 믿지는 않았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뭔진 모르겠는데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말해놓고 보면 이걸로 온갖 현상[事象]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별별 사람들한테 ‘그럴 리가 있겠냐?’라는 반박을 받고, 그걸 또 차례로 논파했던, 그런 내력이 있었지 않았겠느냐 하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단적으로 저한테는 ‘그런 느낌이 든다’에 불과하고,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 정말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지요. 근데 아마도 고대 철학자들은 ‘문득 갑자기 떠올린 가설을 놓고서, 요 시비곡직에 관한 토론을 시작해 볼꺼나’ 하고 저질러 보는 것 자체가 곧, 그가 속한 집단 자체의 지성을 활성화시킨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게 아닐까요?
‘초월’, ‘외부’, ‘타자’. ‘공(空)’, ‘유(有)’, ‘무(無)’, ‘인(仁)’. ... 대개 철학적인 주제란 모조리, 일상적인 우리네 경험지(經驗知)로는 승부를 볼 수가 없는 난문이게 마련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그게 무엇인지를 선뜻 말할 수 없는 개념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는 주제에 관해서도, 인간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은 사람의 앎을 뛰어넘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누구 하나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라는 개념에 관한 일의적(一意的)인 정의는 없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것이므로,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이라는 개념은 일의적으로 정의내려져 있지 않은 어휘이므로 그만 쓰도록 합시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을 구사해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토론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을 구사해 대화하고, 토론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일’이 아닐까요? 아마도 이런 ‘엄청난 일’을 통해 인류는 예전부터 점점 슬기로워졌습니다. 이 작업을 바꿔 말하면, 주제가 되는 개념을 결정짓기보다 우선 ‘펜딩(pending)’해놓은 채로, 어느 정도는 시간을 들여 사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막스 베버가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을 터니까, 사회학 분야의 기초 문헌으로 읽은 분이 많을 겁니다. 베버는 이 책에서 논고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렇게 씁니다.
“이 논문의 표제에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깊은 뜻을 가진 개념이 쓰였다. 이 개념을 도대체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에 관한 『정의』 비슷한 것을 내리려고 시도하는 경우 우리는 그 즉시, 연구 목표의 본질에 뿌리내린 모종의 난점에 직면하게 된다.”
말인즉슨,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이 아직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의는커녕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하는지의 여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베버의 머릿속에 순간 막연히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사이에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은 논고에 선행하여 정의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미확정된 개념을 파악한다는 것은 미확정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하여, 연구에 앞서 존재할 법한 게 아니고, 외려 연구의 결말에 가서 파악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겁니다. ‘자본주의의 정신’이 되는 개념의 정의가 “연구의 결말에 가서 파악되어야 마땅”하다는 말은, 다시 말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독자들이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중심적인 개념에 관해 정의하기를 ‘펜딩(pending)’해놓은 채로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야말로 ‘철학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베버가 독자에게 요청한 바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라는 명제에 동의해 주는 게 아닙니다.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논고가 끝날 때까지 정의할 수 없는 어휘로 ‘펜딩(pending)’해 놓은 채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지성을 개발하고자 할 적에는 무언가를 ‘이해했다’라고 안도하기보다도,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했다’라며 불안해하는 사고의 ‘하중[負荷]’을 견디는 게 효험이 있습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현자들은 그 사실을 알아챈 것입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저서 『쾌락원칙의 저편』은 아마도 20세기 동안 가장 많이 반복해 인용된 학술 서적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강박 반복’과 관련된 사례 연구를 통해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이라는 개념을 꺼내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쾌(快)를 추구하고 불쾌를 피한다’라는 쾌락원칙을 따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아무런 쾌감도 기대할 수 없는 과거 경험’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쾌락원칙에 위배됩니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예시로 듭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항상 동일한 결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기껏 도와준 자에게 결국은 반드시 버림받는 자선가들이 있다. (...) 어떤 친우를 갖든지 배신당하고 우정을 잃는 남자들. 어떤 타인을 대상으로, 자신이나 세상으로 하여금 엄청난 권위로 떠받들리게 하고서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 권위를 스스로 쳐 내리고 새로운 권위로 물갈이해버리는 남자들. 또한, 여성과의 연애 관계가 모두 똑같은 경과를 거쳐 항상 똑같은 결말로 끝나는 정부(情夫)들.”
프로이트는 “세 번 차례차례 결혼했는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병들어 몸져누운 남편들이 죽을 때까지 간병해야만 했던” 여성을 그 전형적인 사례로 듭니다. 물론 이 여성은 ‘머잖아 병이 들면서 죽음이 코 앞에 이를 남자’들에게만 연애 감정을 느낀 것입니다.
그들은 엇비슷한 불쾌한 경험을 집요히 반복합니다. 이를 보며 얻을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를 반복한다는 것 자체가 쾌감보다도 한층 더 강한 충동이라는 가설입니다. 인간은 ‘쾌(快)를 추구하는 것’보다도 ‘똑같은 운명을 되풀이하는 것’을 우선시합니다. 프로이트는 이 사실을 통해 깜짝 놀랄 가설을 도출해 냅니다. ‘쾌(快)의 획득이나 불쾌의 회피 이상으로 근원적인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원상회복 충동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본능이란 생명 있는 유기체에 내재하는 강박이다. 따라서, 이전의 어떤 상태를 회복하려는 것일지 모른다.”
“만약 예외 없는 경험으로써, 즉 다종다양한 생물은 내적인 이유 탓에 죽어서 무기물로 돌아간다는 가정이 허용된다면, 다종다양한 생명의 목표는 죽음이라고밖에는 우리는 단언할 수 없다.”
이리하여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Todestrieb)’이라는 개념을 도출했습니다. 그런데 주의하셔야 할 게, 프로이트가 이 가설을 제시한 뒤에 그가 직접 쓴 내용인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전개해 놓은 과정을 과연 확신하고 있는지, 혹은 어느 정도까지 믿고 있는지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도 이를 믿지 않으며, 다른 이에게조차 이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겠노라고 답하련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어느 정도까지 믿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어떤 사고 과정에 몸을 맡기고 그것이 인도하는 데까지 따라가는 일이 가능한데, 이는 그저 학문적인 호기심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강조는 우치다)
‘학술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프로이트가 그 대답을 여기서 제시해 주었을 겁니다. 학술의 본질이란 “어떤 사고 과정에 몸을 맡기고 그것이 인도하는 데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종 제 경험지나 신체 실감(實感)과 양립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자본주의 정신’, ‘죽음의 본능’, 혹은 니체의 ‘초인’,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Gattungswesen]’도 사정은 모두 같습니다. 아무도 그런 것들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따라서 그들의 책을 읽고 나서 ‘오호, 「초인」이란 이런 거네. 이제 좀 알겠다’라며 무릎을 칠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지에도 신체 실감(實感)에도 맞아떨어지지 않는 ‘알 수 없음[未知]’을 끌어안고서, 그리고서, ‘그것이 이끄는 곳까지 따라가는’ 것, 그것이 학술 수행이 갖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렇게 인류는 그 지적 능력을 이제껏 향상시켜왔습니다.
자연과학 분야가 그렇게 ‘미지(未知)’의 영역을 ‘기지(旣知)’로 풀어나가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동의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성과가 실적으로 가시화되니까요. 따라서, 자연과학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는 여간해선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야 철학은 예의 ‘미지의 영역을 기지(旣知)로 풀어나가는’ 능력 그 자체를 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거니와, 수치상으로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능력이 산출해 내는 결과물[outcome]뿐입니다.
프로이트가 한 말을 빌리자면 “내가 어느 정도까지 믿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사량(思量)할 수 있는 능력을, 철학은 개발하고자 합니다.
저는 무도가로서는, 인간 신체에 잠재해 있는 ‘사람의 앎을 뛰어넘는 능력’을 꺼내놓기 위한 기법을 연구, 개발하고 있는 소이가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학술 연구자로서는 ‘사람의 앎을 뛰어넘는 것’에 대해 사량(思量)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합니다. 이 둘이 목표하는 바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2023-12-27 09:5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일본의 「오늘」을 독해하기> <저잣거리의 미중론(美中論)>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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