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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이 도키치 「대동 합방론」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 2. 19:03
(옮긴이 일러두기: 다음 글에서의 樽井藤吉 저 『大東合邦論』 발췌문의 번역은 김동희, 김윤희 역, 『대동합방론』 , 전주 : 흐름(흐름출판사), 2020을 준용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면수 표기는 졸생이 하였습니다.)
<곤도 세이쿄(権藤成卿)*론>을 저술하고 있는 도중, 행론(行論)**의 필요로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 합방론>을 조술(祖述)***하게 되었다. 이 두 문헌은 한데 엮을 수 있는 논고이며, 또한 다루이의 사상과 그에 연관된 ‘아시아주의’의 구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므로, 이 부분만을 사전에 공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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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도 세이쿄: 1868~1937. 사상가, 제도학자. 제국주의 노선에서 탈피, 고대 중국의 사직 봉건제를 이상으로 하는 농본주의를 제창하였는데, 이는 아시아 제국(諸國)의 자연적 자치를 주장하는 데에 이르렀다.
** 행론(行論): 이 글의 원저자 우치다 다쓰루의 조어.
*** 조술(祖述): 선인(先人)의 설(說)을 근본으로 하여 서술하는 것.
다루이 도키치(1850~1922)는 야마토 나라*에서 났다. 상경한 뒤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파 국학**을 배우고서, 세이난 전쟁 때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측에 선다. 내전에서 패한 뒤, 무인도에 이상적인 마을을 세우고자 개척에 힘썼으나 실패. 나가사키로 옮겼을 적에는, 자신의 학설이 서양에서 말하는 ‘사회주의’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사가현을 거점으로 하는 ‘동양 사회당’을 결성한다. 그 즉시 해산 명령을 받은 동시에, 다루이는 금고형에 처한다(1882년). 출옥 후 현양사***의 히라오카 고타로, 도야마 미쓰루의 지우를 얻어(知遇を得て; 뜻과 재능에 대한 후원 – 옮긴이), 김옥균과 만나서 한국에서의 정치 혁명에 실력(무력武力 -옮긴이)으로 관여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한국에서 폭탄 투쟁을 벌이고자 했던 오오이 겐타로와 후쿠다 히데코(가게야마 히데코 - 옮긴이) 등이 체포된바, 다루이 또한 이에 연루되어 다시금 투옥당한다(1885년 오사카 사건). 출옥 후인 메이지 25년(1892년)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 이듬해인 메이지 26년(1893년)에 <대동 합방론>을 간행하였다. 이렇듯 약력만 보더라도 참으로 파란만장하게 살다 간 사람이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에 활약한 자유민권운동 투사(원문 ‘장사壮士’ - 옮긴이) 치고서 이만한 ‘훈장’을 지닌 사람이 드물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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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토: 大和. 오늘날의 일본 나라 현(奈良県) 출생임을 일컫는다. 일본을 상고 이래로 일컫는 다른 말이기도 한 이 ‘야마토’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다.
** 국학: 유교와 불교 전래 이전의, 고지키(古事記) 만엽집 등 일본 고유의 사상을 궁구한다.
*** 현양사: 자유민권운동, 대륙진출 등을 꾀한 정치 결사.
<대동 합방론>은 한문으로 쓰였다. 한국・중국의 지식인들을 독자로 상정한 고로, 당시 동아시아의 링구아 프랑카였던 한문으로 쓴 것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다케우치 요시미(1910~1977 - 옮긴이)가 현대 일본어로 옮긴 것이다.
다루이는 우선 역사상 ‘연방’, ‘합방’이라는 제도가 절대로 드물지 않은 바, 그 사례를 열거하며 시작한다. 합방(合邦)은 그리스를 필두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독일, 영국, 미합중국이 그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 한일 양국은 그 지형은 순치(脣齒) 같고, 그 세력은 양륜(兩輪)같고, 그 정은 형제와 같고, 그 의리는 서로를 밝혀 주는 벗과 같이 동등하다”(59쪽)는 조건에 있으며, “계몽하여 문명개화의 지경으로 진보하고자 한다면 양국은 맹약을 체결하여 하나로 합방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달도이다.”(60쪽)
서양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채택한 사례가 많으나, 동아시아에서는 그 선례가 없다. 새로이 등장한 논설이기는 하되, 단지 그 이유만으로 ‘망탄(妄誕) 무계’한 논설로 치부해 이를 물리칠 수만은 없다. 다루이가 합방의 설을 제창한 소이는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를 따라 서로 만나 발현”(같은 쪽)되었던 것이지, 머릿속에서 꾸며낸 공리공론은 아니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일이 설령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훗날 어찌 합동의 계기가 없지 않겠는가?”(62쪽) 문제는 이것이 시의적절한가의 여부, 그뿐이다.
합방한 나라의 그 국호(國號)는 ‘대동(大東)’으로 한다. 이 이름을 찬한 이유를 다루이는 이렇게 쓴다. “지금 합방국의 명칭을 ‘대동’이라고 한 것은 양국 장래의 융성함이 마치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음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 귀국자들이 ‘동(東)’자를 별호로 여겨 (...) 조선 또한 ‘동(東)’자를 별호로 생각했다. 조선이라 칭한 것은 상고시대 단군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아침 기운이 선명하다’는 말을 취한 것 (...) 아아 양국이 ‘동(東)’자를 사용한 것이 부절(符節)과 같은데”(69쪽)
일본과 한국은 서구 열강에 비할 때, 공히 그 국력이 미약하다.
“그 정치가 여전히 군주전제이고 국력이 미약하며, 그 국민이 고통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 우리와 같다. 만약 동감하면 어찌 동기(同氣)가 서로 모여 같은 아픔을 서로 가엾게 여기지 아니하는 것인가? 옛날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사람은 상호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타고 있던 배가 태풍을 만난 것과 같은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 서로 협력하여 이를 방어했다. 지금 우리 한일 양국은 세계의 일대 변천 상황에 직면하여 동양에 표류하는 배와 같다. 이 배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면 동종의 형제이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이 일찍이 서로 적대시한 것과는 다르다. 어찌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태풍의 노도를 방어하지 않는 것인가?”(213~214쪽)
여기서 말하는 ‘태풍’, ‘일대 변천 상황’이란 물론 서구 열강에 의한 동아시아 식민지화의 압력을 이른다.
다루이는 합방의 이점을 꼽기 전에, 우선 합방 반대론을 논박하며 시작한다. 반대론 중의 하나는 “조선은 빈약한 국가이다. 지금 조선과 합동하는 것은 부자가 빈자와 재산을 공유하는 이치”(221쪽)라는 것인데, 무릇 아쉬울 짓을 어찌 도모하느냐 하는 금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루이는 이에 놀라운 반론을 내세운다.
“옛날부터 가난한 사람이 부한 사람이 되고, 약소한 나라가 강대국이 된 예는 많다. 아직 그러한 변화의 조짐을 볼 수 없다고 하여 장래를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된다.” (222쪽)
이는 오늘에 이르러 일본과 한국을 바라볼 적에 그야말로 ‘말 그대로’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1인당 GDP는 한국이 2019년에 이미 일본을 제쳤다. 다루이는 논의를 더욱이 이어간다.
“옛날 우리나라는 한국으로부터 배워 오늘날의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 우리가 조선을 몽매에서 깨워 개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은덕을 갚는 일이다.”(222쪽)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문화적인 ‘증여’를 받은 처지다. 은혜를 갚을 반대급부 의무가 있다. 이는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나 윤리적으로 보나 옳은 언명이다. 국방상의 이점 또한 있다.
“변방 수비의 비용을 부담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은 단지 조선만을 방어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방어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조선이 다른 나라에 의해 침략당하면 합동하지 않았을지라도 방관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조선의 수비는 곧 우리의 수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선의 이로움은 곧 일본의 이로움이고, 일본의 이로움은 곧 조선의 이로움이다. 만약 합동한다면 어찌 조선과 일본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222~223쪽)
이 구절에 우리는 가슴이 철렁해진다. 40년 뒤 일본인은 ‘내선 일체’, ‘만몽(만주와 내몽골 - 옮긴이)은 일본의 생명선’ 등 거의 똑같은 논리로 다른 나라를 짓밟게 되는데, 그때에는 이미 ‘덕을 갚겠다’라는 윤리적인 책임감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분명히 지금의 조선은 약하고 가난하매 이는 정치의 책임이다. 정치를 바로잡으면 조선은 부활할 수 있다. 다루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선에 정치적 내란의 조짐이 있다는 분석은 분명 옳다. 그러나 내란이란 사람이 행하는 것이지 하늘의 조화가 아니다. 합방제도를 이루어 그 폐해를 혁신하면 저절로 그 조짐은 사라질 것이다.”(223쪽)
조선의 정치가 혼란한 것은 약소국이기 때문이다. 합방하여 강대하게 되면 절로 ‘자주의 기상’을 일으킬 것이다.
다루이는 이어 정한론을 배격한다. 필자는 과문한 탓에 이리도 사근사근한 논법으로 정한론을 비판하였던 경세가를 달리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조선을 취하면 반드시 국력이 피폐해지고 그 원망을 사게 될 것이다. 논자는 이것을 알고 조선을 취하고자 한다면 다른 나라 사람이 조선 땅을 근거지로 삼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 협의해서 조선과 합동하면 큰 다행이다. 과연 무엇 때문인가? 공명정대함을 가지고 합동하면 우리는 군사를 사용하지 않고 조선을 취할 수 있고, 조선도 군사를 사용하지 않고 일본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군 한 명의 공명(功名)은 수많은 병사의 희생이 따르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쟁 자금을 사용하여 조선의 개명을 유도한다면 원망 살 일도 없고 덕을 베풀게[徳を樹(た)つる] 되는데(...)”(224쪽)
여기서 말하는 ‘다른 나라 사람’이란 아마도 러시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일본이 정녕 제정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대항하고자 하면 가일층, 조선을 얻느라고 전비를 잃고, 사상자를 내며, 조선인의 증오와 원한을 살 뿐인 ‘정한’은 어리석은 책략이다.
“한일 양국은 싸워야 할 나라가 아니므로 마땅히 화친해야 하는 나라이다.”(225쪽) 그런데 과연 조선 사람들이 이 말을 믿어줄 것인가? “그러나 조선인은 이와 같은 논설은 일본인이 우리를 궤변으로 희롱하고 기만하는 말로 듣는다. 아, 나를 궤변이나 늘어놓는 무리로 보는 것인가?”(같은 쪽)라며, 다루이는 장탄식한다.
다루이는 대한제국의 왕통을 호지하겠노라고 약조한다. 무릇 합방은, 조선 황제가 일본의 천황에게 신속(臣属)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두 왕통이 “형제의 결의를 맺고”(226쪽), 병립하는 것이다. 양국은 합방하고 나서는 제각기 자기 나라 왕을 섬긴다. 으레 “(...) 합방제도는 그 국민이 서로 각 나라의 군주를 받”(같은 쪽)들게 마련이다.
다루이는 일본과 한국의 합방은 설하면서도, 청나라와의 합방은 어렵겠다고 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동아시아 전체가 하나의 연방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 본토[漢土], 타타르, 몽고, 티베트계 여러 나라”(242쪽)가 “자주권을 회복하여”(같은 쪽), 제각기 독립국일 것이 조건이다. 허나 청나라가 타타르, 몽고, 티베트를 끝끝내 자신들의 변방 속국으로 두고서 그 종주권을 포기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에 일본이 뜻을 떨치자면 이들 변방 나라들에 청나라와 맞서 독립・내란을 벌이도록 사주해야 한다. 이를 청나라가 용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일 양국은 먼저 합방한 후에 청국과 합종하여 백인종의 침략을 방어해야 한다. (...) 합종과 합방은 그 제도가 분명히 다르다.”(같은 쪽)
그럼에도 일본과 청국 두 나라의 연대는 앞으로도 지향해야만 하는 장기적 목표이다. 현재 동아시아가 식민지로 넘어가지 않고 온존해 있는 까닭은, 일본과 청나라라는 두 강대국이 동아시아에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다행은 이 두 강국이 있어 우리 황인종의 존엄이 보호되고 있음에 있다. 만약 황인종 가운데 두 나라가 없다면, 저 백인종은 우리 아시아 전 대륙을 유린하여 우리 형제인 황인(黃人)을 노예로 삼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대륙의 흑인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243쪽)
옛날 진나라가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차례차례 주변 나라들을 무너뜨렸을 때 마지막으로 제나라와 초나라가 남았다. 제나라의 신하가 간하기를, 지금은 초나라와 동맹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해야 마땅하다는 이치를 설했으나, 제나라의 왕은 이를 듣지 않았고, 진나라 왕과 함께 초나라를 멸망케 했다. 진나라는 훗날 당연하게도 제나라를 쳐 무너뜨리고서 천하를 통일했다.
다루이는 일-청 양국을 ‘제나라와 초나라’라고 일컫는다. 연합하여 싸우면 “능히 백인과 대적할 수 있지만”(244쪽), 백인의 이간 공작에 놀아나면 둘 다 망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래 중국 영토를 잠식하고 있는 장본인 영국과 야합하여 일본을 내치려 하고 있다. “어찌 동종(同種)의 우방국과 협동 화합하여 다른 인종의 침략을 방어하지 않는가?”(245쪽)
청나라는 현재로서 일본과 한국의 합방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는 독립국이다. 독립국끼리 합방을 도모코자 할진대 어찌하여 개입한다는 말인가! 만약 조선이 정히 청나라의 속국이라 그리한다면 한국 황제가 형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는 데에는 일본이 반대하지 않는다. 신하의 예를 갖추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금 하나에 그치는바, 국민 전체가 청나라의 신하 되지는 아니하기 때문이다. 다루이는 그렇게 논한다.
“대동합방은 청나라에 유익하고 아무런 해가 없음이 이와 같다. (...) 아마도 대동합방이 성사되면 불리함을 느끼는 세력은 청나라가 아니라 서구 백인일 것이다.”(249쪽)
청나라의 동쪽에 열강의 침공을 막을 ‘방패’가 될 일대 강국이 출현하는 것이다.
“대동합방이 실현되면 청나라의 강력한 지원군이 되기 때문이다. (...) 조선을 믿을 만한 나라로 되게 하는 것은 현재 중국의 급무이다.”(같은 쪽)
다루이는 논리를 더욱 진전시켜, 청나라로 하여금 “태종이 청나라를 건국한 취지”(253쪽)를 돌이켜, 안남(安南; 베트남 - 역주)을 도우며 “자주독립권”(같은 쪽)을 회복시키고, 더욱이 “섬나(暹羅; 태국Thailand의 예전 이름인 시암Siam의 한자음을 표기한 것이다 - 원주), 미얀마(緬甸)를 연합하여 말레이반도를 백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같은 쪽), 인도에까지 교통을 닦아 인도인으로 하여금 “영국인의 교만을 꺾고”(254쪽), 이렇듯 대의로 말미암으면 “사방 여러 나라를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올 것”(같은 쪽)이라고까지 말한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청나라는 “아시아 황인종 일대 연방국”(같은 쪽)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루이는 이렇게 결론을 낸다.
“저 백인이 우리 황인을 섬멸하려는 조짐은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 황인이 이겨내지 못하면 백인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동종인의 일치단결한 세력을 키우는 데 있다.”(같은 쪽, 강조는 우치다 다쓰루)
인종 간 전쟁이라는 아이디어는 그로부터 40년 뒤 이시하라 간지의 <세계최종전쟁론>에서도 반복된다.
“지금 일본과 지나(支那)는 동양에서 여태껏 승부가 나지 않은 대전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도 필경은 일본과 지나 양국이 진정으로 제휴하기 위한 고민의 소치인 것입니다. (...)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민족 국가를 완성해 나가며 부득불 타민족을 경시하는 경향을 심화시켰던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대만, 조선, 만주, 지나에 이르기까지 타민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던 최대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는 점을 깊이 반성하는 것이 곧, 만주 사변 처리, 쇼와(昭和) 유신 완성, 동아 연맹 결성의 기초조건입니다. (...) 세계의 형세가 오늘날에 이르러, 과학 문명에 낙후된 동아의 제 민족이 서양인과 맞서 대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정신력과 도의력(道義力)을 바탕으로 제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임을 여기서 강조하는바, 총명한 일본 민족과 본토 한족은 공히, 이른 시일 내에 이러한 세운을 터득하고서 진심으로 양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시하라의 ‘동아 연맹’은 일본, 중국, 만주에 의해 구성된다*.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아 신질서’, 도조 히데키의 ‘대동아 공영권’ 구상 등과 표현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진대, 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하고 수탈하면서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은 이러한 유형의 아시아 연방 구상을 줄곧 논해 왔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 일본의 군사 행동은 침략, 수탈, 혹은 식민지화가 아니다. 거시적으로 보게 되면 이 모든 게 ‘서양인과 대적’하고자 아시아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연방을 형성토록 하는 노력이라 하는 익스큐즈(excuse; 원문 그대로 표현 - 옮긴이)를, 패전날까지 일본 전쟁 지도부는 포기하지 못했다 (지금도 ‘대동아전쟁은 아시아 해방 전쟁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본에는 존재한다). 그만큼 우리 일본인들에게 아시아 연방이라는 아이디어가 사상적인 구심력을 가졌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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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타이완섬과 조선 반도를 포함한 개념일 것으로 생각된다. 오야마 마스다츠倍達, 즉 극진 무예가 최영의 역시 이시하라의 이러한 주장에 공명했던 것으로 일본에 널리 알려져 있다. - 옮긴이)
아시아주의라는 사상과 운동은 본래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다케우치 요시미가 술회했던 바에 대해서 조금 전 인용하였다. 필자가 생각하건대 아시아주의를 정의하기가 불가한 이유는, 그것이 서로 상극인 무수한 사상적 입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구심력’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여서이다. 정한론에서 대동합방론을 거쳐 대동아공영권까지, 혁명가・식민지주의자・군인・실업가 통틀어, 사상적 입장과 이해를 초월해, 모두가 이 아이디어 앞에서 완전히 무방비했다. 필자는 이 사실에 흥미를 품는다. 어찌하여, 메이지・다이쇼・쇼와 시절 통틀어 일본인들은 아시아주의가 발하는 구심력에 이렇게까지 저항을 못하고 굴복하였던 것인가. 왜 그것에 대항할 정치적 언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이를테면, 아시아 나라들과의 연대보다도 서양 나라들과의 연대를 우선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주장했던 언설이 이 시기에 과연 존재했었던가? 아시아주의에 대항하는 언설로써 필자가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후쿠자와의 ‘탈아론’을 제외하면, ‘일유 동조론’ 즉 일본이 유대인과 연대하여 세계 지배를 목표해야 한다는 정도밖에는 없다.
‘탈아론’은 자기 벗이었던 김옥균을 참살당하게 한 조선의 현실에 대한 후쿠자와의 감정적인 반발의 산물인바, 이는 그가 오랫동안 숙성시켰던 사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일본인들 사이에 조선・중국을 하대하는 심성을 형성케 함으로써, 아시아주의를 오히려 가속화했다.
‘일유 동조론’은 대단히 흥미 깊은 논건임에도, 여기서는 깊게 논의할 만한 여유가 없다. 일유동조론은 메이지 시대에 주로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기독 청년들에 의해 시작된 담론이다. 그들은 미국에 가서 목도한 바, 피아 사이에 가로놓인 문명개화의 차이에 대경실색하였다. 그때, 그들은 미국 사회에서 (황인종과 마찬가지로) 차별을 받는 유대인들에게 비틀린 동포 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일유동조론을 전개했다. ‘일본인과 유대인은 모두 서구 사회에서 박해받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인종 집단이 서구 열강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본인과 유대인은 서양 나라들을 누르고서 천하를 경멸하며 쏘아볼[睥睨する] 영적 사명[聖史的使命]을 부여받았다’. 이는 곧 ‘유대인 음모설’과 하이퍼 내셔널리즘이 뒤섞인 기이한 언설이었으되, ‘일본인과 그 동포가 서구 열강과 투쟁한다’라는 구도 그 자체는 아시아주의와 동일하다.
이시하라 간지는 만주를 유대인의 ‘고향 땅’으로 하고, 그곳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맞아들여, 그곳에 전 세계의 유대계 자본을 불러들임으로써 산업의 근대화를 달성하고, 이와 함께 미국에 있는 유대인을 이용해 미국 내부에 ‘일본 친화적 여론’을 형성하겠다는 몽상적인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다. 이시하라의 머릿속에서 만주는 오족협화의 ‘왕도낙토’였으므로, 이는 시오니즘과 일유동조론과 아시아주의의 혼효(混淆)*였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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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효: 일본어 こんこう; contamination(언어학, 지질학 등에서). 혼성. 의미와 형태가 비슷한 두 어(語) 구(句) 또는 문(文)이 뒤섞여 새로운 어(語) 구(句) 또는 문(文)이 만들어지는 것. 또한, 우치다 다쓰루가 제창한 사상적 개념어 ‘습합(習合)’에도 유의할 것. - 옮긴이)
‘일본인을 포함한 다섯 민족[五族]과 유대인’이 동맹관계를 맺고서 서구 열강과 대항하는 것이다. 그 어떤 언설이든 ‘일본인이 동포와 동맹하여 서구 열강과 맞선다’라는 구도만큼은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동포’로 어떤 민족을 택할까 하는 문제는 어쩌면 부차적인 중요성밖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로부터 필자는 적잖이 폭주적인 사변을 농(弄)해보겠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의 역대 보수 정권이 채용했던 ‘미국 종속을 통한 미국으로부터의 자립을 도모’한다는 국가 전략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는, ‘미국과 동맹을 맺어서,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구도와 같다. 정말 비논리적이지만, 구도 그 자체는 아시아주의와 동형적이다. 이것이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전후 80년간에 걸쳐 일본인이 자각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 자체, 아시아주의적인 구도가 얼마나 깊숙이 일본인에게 내면화되어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혀준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아시아주의적 구도는 일본인에게 혈육화되어 있는 일종의 ‘민족적 추향성(趨向性)’*이다. 그렇게 가정해 놓고 보면, 일본 근대사에 일어났던 온갖 역사적 사건을 실은 하나로 잇닿일 수 있는 골격으로 세울 수도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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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향성: 주성([생물학, 생리학] 走性; taxis).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생물이 외계로부터 받는 자극에 대하여 행하는 방향성이 있는 운동. 운동이 자극원으로 향하는 경우를 양(陽),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경우를 음(陰)이라고 함. 자극의 종류에 따라 주광성(走光性)·주화성(走化性)·주류성(走流性)·주촉성(走觸性) 등으로 나눔. 또한, 중력·전기·열·습도 등에 대한 반응도 볼 수 있음. 주향성. 추성(趨性). 추향성.
(2023-12-23 10:1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일본의 「오늘」을 독해하기> <저잣거리의 미중론(美中論)>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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