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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경파에게조차 ‘경계선’을 긋지 말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놓고 우치다 다쓰루가 고찰하는 “폭력을 다스리는 지혜”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2. 5. 12:44

    ‘폭력’에 관한 물음에 내가 답한 글이 ‘문예춘추 인터넷판’에 올라갔다. 지금 공개되어 있으나, 머지않아 새로운 인터넷 기사에 묻힐 게 자명하므로 이곳 개인 블로그에 남겨 둔다.

     

     

    ー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연일 언론과 SNS에 소름 끼치는 광경이 지나가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전쟁의 희생자는 언제나 어린이와 병든 이 같은 약자들입니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윤리와 도덕은 무력하기만 한 걸까요?

     

    ‘압도적인 폭력’을 앞에 두었을 때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압도적인 폭력’을 ‘제어 가능한 폭력’으로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질의 전환이 아니고, 양을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제관계론에서는 ‘위기’를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dangerrisk가 그것입니다. danger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로는 제어할 수 없는 위기’, ‘묵시록적 위기’를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risk는 ‘컨트롤’ 할 수 있고, ‘관리’ 할 수 있으며, ‘헤지[hedge]*’할 수 있는 위기를 말합니다. 정치외교의 요체는 ‘DangerRisk로 감소시키는 것’이라 일컬어집니다.

    (* 헤지hedge : 엇갈려 놓다, 울타리・경계선을 치다. 어물어물하다. 방어 수단, 방어물. 전하여, (인플레이션 등에 대비해)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다. - 옮긴이)

     

    저는 이러한 지성의 작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무()로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악을 근절할 수는 없습니다. 사정이 그러할지언정 그 사실을 앞에 두고서 절망할 짬이 있다면, 그것을 ‘절충할 수 있는 범위 안(원문 受忍수인 限度内한도내 - 옮긴이)’에서 감소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짜내는 게 낫습니다.

     

    전시 국제법이라는 법률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비전투원을 공격해서는 안 되며, 아울러 의료 시설, 교육 시설, 종교 시설 등을 군사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한가한 소리나 하고 앉았군’ 하고 코웃음 치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모릅니다. ‘이건 전쟁이잖아. 전장이 된 곳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 인간이 휘말리는 건 당연하지’ 라는 겁니다. 그런 사고 방식이 ‘쿨’하고 ‘리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본에는 존재할 겁니다. 일본에는 지난 80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전쟁일지라도 교전수칙은 있어야 한다’라는 고된 합의 형성에 부심해 온 사람조차 ‘교전수칙을 지키기만 하면 피해자는 나오지 않는다’는 걸 꼭 믿어서 그렇게 주장해 왔던 것은 아닙니다. 전투의 한가운데 있는 병사가 총구 앞에 선 시민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한순간만이라도 격발을 ‘망설이게’ 되기를 희망했기에 이러한 수칙을 정한 것입니다. 전시 국제법은 비전투원이 입을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를 무()로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폭력을 근절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 행사를 억제하기 위한 세상 온갖 시도는 헛수고다’라는 결론으로 무작정 빠져드는 것은 ‘어린아이’나 할 행동입니다. 폭력을 근절할 수는 없지만, 폭력을 억제할 수만큼은 있습니다. 사정이 원래 그러하니까 한 사람이라도 사상자를 줄일 방도를 고안해 내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할 일입니다.

     

    실제로, 지지부진한 감은 있습니다만 그래도, 인간 사회는 조금씩 ‘인간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노예제도, 고문, 종교재판, 인종・성차별은 지금도 잔존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것들을 당당히,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하는 사람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적어도 합법적으로 시행하는 공적 기관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200년 전과 비교해 봤을 때 대단히 진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의 제어는 ‘원리의 문제’가 아닌, ‘정도의 문제’입니다. 이는 참과 거짓, 혹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닙니다. 이런 논의를 ‘오십보 백보’라며, 어떻게든 정도를 조절하려는 노력 자체를 냉소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력하게나마 ‘오십 보’의 차이를 축적함으로써 인류 사회는 조금씩 살기 좋은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만 보더라도, 각기 지지하는 진영 스스로 저마다 ‘정의’라고 주장하며 격한 여론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어느 쪽이 ‘정의’인지를 따지는 것은 원리적인 의논입니다. 원리적인 의논에는 결론이 안 나옵니다. 한 쪽이 100% 악이면, 다른 쪽은 100% 선이라는 식의 전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올바름의 정도 차이’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허무적인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올바름의 정도 차이’를 냉정하게 고량(考量)해야지만 폭력은 억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에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러시아령으로 편입했을 때, 푸틴 대통령은 크림 반도에서 러시아계 주민이 차별, 박해당하고 있으므로 러시아는 인도적 입장에서 이에 개입한 바이며, 또한 러시아 편입은 주민투표의 결과 압도적인 민의를 얻은 결과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푸틴은 ‘민족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된다’와 ‘민주적인 수단에 따른 결정은 엄숙하다’는 식의, 국제 사회가 ‘트집을 잡지 않을’ 대의명분을 내걸었습니다.

     

    2022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에도, 러시아와 푸틴은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나치화하고 있다’는 망상적인 ‘서사’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국제사회에서 이 서사를 믿은 세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2014년과 2022년에 러시아는 ‘똑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의 반응은 같지 않습니다.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행위’를 한 것은 아닙니다. ‘국제 사회의 상식을 지키려는 척하는’ 러시아의 노력이라는 차원에서 이 두 군사 행동 사이에는, 간과 못 할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제 사회는 러시아를 침략자로 보고, 우크라이나가 수행하는 국토 방위 전쟁을 국제법상 합법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나름대로의 유효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 일본에는, 오랜 기간 여러가지 이유로 러시아에 어느 정도는 우호적인 담론들이, 정치적 입장 상관 없이, 한국보다 다소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 옮긴이)

     

     

    하마스의 테러로 인해 이스라엘 국민 1400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니 가자 침공은 이스라엘이 가진 자위권의 발동으로써 당연하다는 말은 ‘원리적으로는’ 올바른 주장입니다. 하지만 ‘자위권의 행사’로 가자에서는 비전투원 시민들이 13000명 살해당하고, 의료 시설, 교육 시설, 종교 시설 등 군사 목표로 해서는 안 될 건물이 폭격을 받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면 이제는 ‘자위의 과잉’이 됩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허용되지만, 자위적 폭력에도 한도가 있다’는 점도 또한 국제 사회의 상식입니다. 러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도를 넘은’ 즉 정도의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천지에 ‘한도’란, 미리서부터 제시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한도를 넘고 나서야, ‘한도를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도(限度)란 항상 사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스라엘의 공격이 하마스의 군사 거점만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병사들이 비전투원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그치게 하는 노력을 했었더라면, 국제 사회의 여론은 혹여 이스라엘을 옹호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정’하고 ‘그치게 하는’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한 쪽 진영에만 미리 마련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양 쪽 모두에게 싸울 대의명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도를 넘은’ 측은 ‘정의를 주장할 권리를 잃게 됩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ー 슬라보예 지젝은 ‘하마스 강경파와 이스라엘 강경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는 하마스 강경파와 이스라엘 강경파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게 아니라, 이러한 양 극단 세력을 총체적으로 묶은 연후에 이들과 대립하는,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경계선을 다시금 획정해야만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젝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경계선’적 사고에 반대합니다. ‘경계선’이라는 말을 그대로 쓴다고 한들, 폭력이 보다 효과적으로 억제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조차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살해당하면 신념이 흔들리는 수가 있습니다. ‘투쟁만이 바람직한 미래를 실현시켜준다’고 믿는 사람조차 너무나 많은 유혈을 목도하고 난 뒤에는 투쟁의 공허함을 느끼는 수가 있습니다.

    (* 저자가 몸소 겪어 온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지견智見임을 시사. 졸역 누가 괴물일까? 전체주의적 상호감시와 공격성, 사람을 죽여본 적 있나요?  - 옮긴이)

     

    제가 친하게 지내는 젊은이 나가이 요스케(永井陽右) 억셉트인터내셔널 대표는 소말리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정규군에서 투항해 온 병사들의 사회 복귀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소년병으로 징집당해 전투에 지속적으로 투입되어 온 게릴라 병사들이 어느날 ‘전장이 지긋지긋해진 나머지’ 시민 사회로 복귀하고자 할 때 그것을 물심 양면으로 돕는 일입니다. 나가이 대표와 ‘억셉트’ 사람들의 노력은 ‘경계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끝없는 폭력의 연쇄에 피폐해진 소말리아가 결국 가까스로 도달하게 된 하나의 실천적 결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 편 네 편 하는 ‘경계선’을 고정화시키지 말 일입니다. 경계선이 딱 있어버리면 원리를 추종하는 자들은 그것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원리주의자에게 ‘주홍 글씨’를 새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극단적인 사람’을 ‘그냥 사람’ 진영으로 불러 거두려는 노력을 ‘그냥 사람’들은 그쳐서는 안 됩니다.

     

     

    ー 인류는 어째서 2차 대전의 교훈에서 배우지 못한 채 지금과 같은 ‘제노사이드’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일까요?

     

    금번 가자 침공이 ‘제노사이드’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국제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1948년에 제정된 조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2) 집단 구성원의 심신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는 것(고문, 강간, 약물 주입 등) (3) 집단을 파멸시키기 위한 일련의 생활 조건을 강제하는 것(의료 및 교육 기회의 박탈, 강제 수용, 강제 이주 등) (4) 집단 내부의 신생아 출생을 방해하는 것 (5) 집단의 어린이를 강제적으로 타 집단으로 떼어놓는 것.

     

    이스라엘은 가자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제까지 ‘거대한 감옥’ 안에 가둬 놓고, 그 생활 조건을 다양하게 방해해 왔습니다. 지금 상황만으로도 ‘제노사이드’ 정의 제 (3)항의 요건을 충족시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군 측에서 가자의 비전투원과 하마스의 전투원을 구별하려는 전장에서의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1)항의 ‘집단 구성원의 살해’가 적용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제노사이드’로 여겨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폭력에 제동에 걸리지 않을 경우 결국 국제 사회의 여론은 이를 사실상의 ‘제노사이드’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제 사회가 이스라엘에 구체적인 ‘벌’을 내릴 권한은 없습니다. 그들의 군사 행동을 저지하기 위한 실력 행사를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민은 앞으로 오랫동안 국제 사회 속에서 스스로 ‘이스라엘 국민’임을 떳떳하게 밝히고 다니지 못하게 되겠지요. 어떤 이스라엘 사람은 이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길 겁니다. 좌우지간, 앞으로 이스라엘 국적이 해외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을 전망입니다. 신변의 안전을 고려한다면, 어느 나라의 여권을 가졌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이스라엘이 다시금 국가로서 존엄과 신뢰를 회복하기를 희망한다면, 이번에 네타냐후 총리가 주도했던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그 책임을 그들의 손으로 철저하게 물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겠다는 국민적 합의를 달성해야만 합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노사이드는 결국 제 살 깎는 일’이라는 경험적 법칙을 인류 전체가 공유하게끔 노력하는 일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인류의 학습 속도는 매우 더딘 것입니다.

     

    (2023-12-02 17:54)

     

     

    저자 소개

    우치다 다쓰루(內田樹)

    1950년 도쿄 출생. 사상가, 무도가.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합기도개풍관 관장. 도쿄대 문학부 불문학과 졸업.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박사 과정 중퇴. 전문 분야는 프랑스 현대사상, 무도론, 교육론 등. 사가판 유대문화론』으로 고바야시 히데오 상, 일본변경론』으로 신서대상 수상. 여타 저서에 『망설임의 윤리학: 성, 전쟁, 이야기에 관하여』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원숭이 사회(サル化する世界)』 『일본 습합론(日本習合論)』 『코뮌의 부활(コモンの再生)』 『포스트 코로나 세상(コロナ後の世界), 편저에 『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등이 있다. (202311월)

     

     

    출처: 우치다 다쓰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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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부로부터

     

    유대계 러시아 출신 한국인 노르웨이 주재원, “우리들의 볼로쟈” 박노자 교수의 블로그에도, 독자 제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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