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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리구미'와 공격성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5. 1. 09:12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4/27_1819.html
시민들의 상호 감시가 시작되고 있다.
골든 위크의 외출 자제에 편승하여(2020년 코로나19 유행 시점임 -역주) 외지에서 온 차량을 몰아세우고 공격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휴업 권고에 따르지 않고 개업하는 점포에 낙서를 한다든가 비품을 망가뜨리는 사람도 나왔다.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들이 감지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그런 것'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분노에 따랐을 뿐이다' 라는 자기 정당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봐 왔다.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이번에도 반복해 말한다.
우리들의 사회는 '자신이 행하는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공격성을 억제할 수 없는 인간'을 일정 수 포함하고 있다. 그들이 그런 인간인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일종의 병이다.
인간은 '지금이라면 무엇을 해도 처벌 받지 않는다' 라는 조건을 부여받았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가로 실질적인 인간성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내 경험적 확신이다. 전에 혐한 언설에 대해 썼을 때 나는 이렇게 밝혔다. 읽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중요하기에 다시 실어둔다.
혐한 언설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래의 동기는 '자신의 반 사회적인 공격성, 폭력성을 방출해 누군가를 깊이 상처 입히고 싶다'라는 본원적인 공격성이다. '평범한 때라면 결코 허락되지 않는 행위를 지금은 할 수 있다' 라는 조건을 부여받으면 갑자기 폭력적, 파괴적으로 돌변하는 인간이 세상에는 일정 수 있다. 보통은 법률이나 상식이나 세간의 눈이나 '하늘'의 감시를 의식해 억제할 수 있지만 어떤 종류의 '무법 상태'에 처하게 되면 폭력성을 발동하는 것을 억제 못 하는 인간이 있다.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우리들의 부모 세대 사람들은 전쟁 때 그것을 알고 있었다. 보통은 마음씨 좋은 아저씨나 소심한 젊은이가 '지금은 무엇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라는 환경에 던져지게 되면 약탈, 강간, 살인을 거리낌 없이 행한다는 실제 사례를 본 것이다. 전쟁 중의 사람들은 인간이 때때로 터무니없이 폭력적이고 잔혹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도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훨씬 작은 스케일이지만 비슷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대학 당국의 관리를 받지 않는다는, 혹은 경찰이 오지 않는다는 보증이 있을 때 일부 학생들이 얼마나 파괴적, 폭력적으로 바뀌는가 나는 내 눈으로 봤다.
그 첫 번째는 산리즈카의 공항 반대 투쟁 당시 학생들이 무임승차하는 것을 보았을 때이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개찰구를 넘었기 때문에 역무원은 저지할 수 없었다. 차표를 구매한 내가 놀라워하고 있으니 활동가 중 연장자가 웃으며 '자본주의 기업에게 계급적 철퇴를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정치적 논리를 입에 담았다.
그러나 지바의 작은 역에 내려서 포장마차의 어묵을 학생들이 멋대로 먹어 치우는 것에는 놀랐다. 그만 두라고 나는 말렸지만 학생들은 껄껄 웃으며 서 있었다. 포장마차는 딱히 철퇴를 내려야만 하는 자본가가 아니다. 그저 영세한 자영업자이다. 그 생계를 위협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군중에 편승해' 별로 먹고 싶지도 않던 어묵을 무전 취식했다. 훔쳐도 처벌 받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다면 훔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학생 운동의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지만 여기에 가담한 학생들에게도, 그 사람을 공격해야만 하는 특단의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정치적인 대의명분 ('반혁명에 철퇴를') 에 입각해 지금이라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보증이 있었기에 낯선 학생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가격한다든가 허벅지에 대못을 박아넣는다든가 했다. 그 학생들은 이후 대학을 나와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었다. 지금은 연금 생활자가 되었으리라.
나는 이런 사람들을 진심으로 '무섭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을 '대의명분이 있다면 무엇을 해도 처벌 받지 않는다'라는 환경에 결코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법률이나 상식이나 세간의 눈은 '무엇을 해도 처벌 받지 않는' 환경이 출현하지 않게 오랫동안 신경을 쓰며 작동되었던 것이다. (후략)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명확한 휴업 지시를 내리지 않고 민간의 '자숙'에 맡겨 버린 탓에 '자숙에 따르지 않는 자는 시민이 처벌을 내려도 좋다' 라는 구실로 폭력 행사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이것은 혐한 언설에 편승해 시민생활 가운데 결코 허용될 수 없는 비열하고 추악한 공격성을 발휘하는 사람들과 '동류'의 사람들이다. '자숙'이라는 애매한 행정 지도는 시민들의 상호 감시를 독려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감시에 그치지 않고 '자숙하지 않는 시민을 공격해도 처벌 받지 않는다' 라는 심증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예를 들어 SNS에서 격하게 공격적인 말을 써재끼는 사람들의 다수는 익명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가라고 특정될 수 없다는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언동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보증이 있다는 것을 알 때, 과잉 폭력적으로 바뀌는 인간' 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모든 인간이 그렇다' 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틀렸다. 세상에는 '자신이 누군가라고 특정될 수 없다는 느낌이 들 때, 처벌받을 리스크가 없을 때' 라고 할 지라도 '하늘'이 보고 있다는 자제심을 잃지 않으며 상식적으로, 젠틀하게, 절도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자신과 같다'고는 아마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이 앞으로도 그런 인간이 되자고 생각하고 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어느 쪽이나 소수파이다. 아마 각각 집단의 10% 내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지經驗知이기 때문에 엄밀하지는 않다). 나머지 80%는 이 둘 중 어느 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행동양식이 바뀐다.
'어떤 때라도 평온하게 시민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행동한다. 평시에도 비상시에도 변하지 않는다. 보통 '처벌 받을 리스크가 없을 때 과잉 폭력적인 사람'은 '처벌 받을 리스크'라는 가변적인 조건에 따라 행동 방식을 바꾼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바뀐다. 그것이 가시화하는 것은 '처벌의 리스크'라는 지극히 산문적인 조건에 따라서이다.
'외출 자제' 는 행정이 명확한 기준도, 거기에 대한 패널티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 사이에 '지금이라면 사람을 공격해도 처벌 받지 않는다' 라는 확신이 조성되었다.
지금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리고 있다. 슈퍼의 점원에게 호통을 친다거나 ATM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혼내는 사람들은 전원이 '자신이 사회적인 정의를 집행하고 있다' 고 생각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아무리 폭력적으로 행동해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을 수 없다. 그들을 막을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법률이 기능하고 상식이 기능하며 '세간의 눈'이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사카에서 휴업 권고에 따르지 않는 가게 이름을 공표한다고 한다. 이것은 '이 가게에는 어떤 공격적인 짓을 해도 처벌 받지 않는다'는 보증이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오사카 부 지사府知事는, 인간이 조건부로 얼마나 공격적일 수 있는가를 알고 있어서 그 기회를 항상 엿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혹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고, 공격하는 사회는 아마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게는 '관리 비용이 굉장히 싸게 먹히는' 사회로 보이리라.
게슈타포는 더 없이 효율적으로 반정부 인사를 체포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수사 능력이 우수해서가 아니다. 체포자는 거의 이웃이 밀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을 상호 감시하게 하면 통치 코스트가 극적으로 삭감된다. 그 대신에 '대의명분을 내걸고 이웃을 공격하고 모욕감을 안겨주는' 것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해방시키고 만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그다지 경계심을 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2020-04-27 18:19)
[각주]
1. 도나리 구미(隣組)에 관한 설명: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에는 중국과 같이 '도나리구미隣組'라는 5호戶에서 10호씩 묶은 소단위 조직이 있었다. 그것이 주민의 최소 책임 단위가 되었다. 이 소단위 조직의 수장이 소단위 자체의 모든 일을 지휘한다. 그는 소속 주민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책임을 지며, 의심스러운 행동이 있으면 보고하고, 낯선 자가 나타나면 관헌에 고발했다.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처음에 이 조직을 폐지했다가 후에 다시 부활시켜 '도나리구미'라 이름 붙였다. 도나리구미는 도시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만들었는데, 지금(1946년 -인용자 주)의 농촌에서는 거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루스 베네딕트, 김윤식·오인석 옮김, 『국화와 칼』(을유문화사, 2008), 117~118쪽.
널리 알려져 있듯이 유사한 조직체로서 이씨 조선의 오가작통법, 북한의 5호담당제, 한국 유신체제의 반상회 등이 있다.
2. 골든 위크는 한국의 4월 말 5월 초의 황금 연휴 비슷한 개념으로, 여기에 속하는 일본의 공휴일은 4/29 쇼와의 날, 5/3 헌법의 날, 5/4 녹색의 날, 5/5 어린이날 등이 있다.
3. 산리즈카 투쟁이란 글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나리타 국제공항 부지의 개발과 존속에 관련한 산리즈카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의 현재진행형 분규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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