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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분석과 전망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5. 1. 21:34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4/28_0932.html
어느 매체로부터 메일로 Q&A로 현상에 대해 코멘트를 의뢰받았다. 자수가 제한되어 있어 긴 버전을 써 둔다.
1) 지금 '이런 사회로 괜찮은가' 라고 많은 국민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위기가 고발, 가시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베 정권의 무능하다고 할 만한 '신자유주의'의 해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베 정권의 무능 무대책은 수상 개인의 속인적인 결점이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정권과 그 지지층이 받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결함이 치명적인 모습으로 밝혀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두드러지는 특징인 자원의 '선택과 집중'에 있습니다. 이익을 올릴 만한 섹터에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채산성 없는 부문은 잘라내 버립니다. 효율, 생산성, 비용대비 효율... 그런 마음가짐을 최우선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코로나 사태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선택과 집중' 전략이 팬더믹 같은 사회적 위기에 정말이지 쓸모 없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관리의 요체는 '리스크 헤지' 입니다. 이것은 '가장 낙관적인 것'과 '가장 비관적인 것'까지 몇 가지의 시나리오에 신경 써서 각각에 대해 해책안을 세워 두는 것입니다. 어느 쪽의 시나리오대로 위기가 일어날 경우에는 그것대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만, 그 이외의 모든 시나리오는 '꽝'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거기에 투하한 자원은 전부 '헛 것'이 됩니다. 이 '허사, 여유, 유휴(slack)'는 위기관리상의 당연한 비용인데도 불구하고 '선택과 집중' 논자에게 이 코스트는 용납될 수 없어요. 이 비용을 용인하는 것은 그들의 이데올로기 근본 부분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기관리라고 하는 것은 집단 전체를 구하기 위해 집단 전체가 주체가 되어 행동하는 것입니다만 '선택과 집중' 논자는 집단을 몇 개의 단위로 분절해서 '우선적으로 자원을 분배하는 섹터' 와 '생산성이 낮아 버려야 할 섹터' 를 수치적 기준에 따라 차이화하는 일이 본업이라서 '집단 전체를 구하기' 위해 '전체가 주체 되는' 일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자에게는 '위기관리' 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위기에 임해 머리를 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살아 남는 것과 외면해야 하는 것을 어떻게 차별화 할 것인가' 라는 문제 뿐입니다.
감염증은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와 상성이 대단히 나빠요. 그렇다는 것은 감염증은 '언제 도래할 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미지의 감염증을 위해 의료진을 고용하고 의료자원을 비축하고 병상을 확보해두어야만 합니다. 팬더믹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쓸데없는 것' 이었다는 것이 돼요. 실제로 2002~3년 세계에 확산되었던 SARS는 일본에 감염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예산을 투입한 SARS대책은 모두 '물거품' 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2009년의 신종 플루 뒤 당시 민주당 정권은 감염증용 시스템 개선과 의료자원의 비축을 시작했지만 아베정권이 된 후 치워 버렸습니다. '예산의 낭비' 로 보인 것이겠지요.
지금 위기대응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정부도 도쿄도都도 '도쿄 올림픽을 예정대로 개최' 한다는 시나리오밖에 준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2월 단계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지 못할 정도 규모로 감염이 확산되는 경우' 에 대한 '최악의 시나리오'도 준비해서 어쨌든 마스크나 검사 키트나 인공호흡기나 방호복의 비축, 의료체제의 정비를 시작했어야 했을 터였어요. 분명히 그 준비는 감염이 모양새 좋게 '사전 섬멸' 된다면 허사가 될 것입니다만 시중 감염이 시작한 경우에는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요. 위기관리라는 것은 '헛일을 각오'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만 중앙도 도쿄도 그 각오가 없었어요.
2) 국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만 할 문제가 드러난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어떨까요. (아베 정권이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배경에 대해. 그 기전, 미디어 문제, 문화, 국민성 등을 포함해 말하자면 지배적인 구조나 이미지에 대해)
이제까지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일본인에게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함' 이라는 발상 그 자체가 희박합니다. 이것이 교육의 문제인가, 민족의 문화인가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면, 최악의 사태가 초래된다' 라는 주술적인 신앙이 일본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심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라고 말하면 '재수가 없다' 라고 타박을 듣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게 패배주의다' '그런 비관론은 집어치워라' 는 매도를 당합니다.
'전진훈戦陣訓(1941년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가 내린 행동규범 -역주)' 은 '백전 백승의 전통'을 읊으며 '반드시 이겨야 한다' 고 가르칩니다. 실제로는 전투 단계에서 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 경우 어떻게 '손실폭'을 줄여나가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가 하는 프래그머틱한 군인의 지혜를 독려해야 했을 터였습니다만 일본군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 자체를 금지당했어요. '그런 것'을 생각하는 걸 소중히 여기는 문화였다면 '전진훈' 같은 공허한 문서가 쓰여질 리가 없었겠지요.
'손실폭' 이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일본인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기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이번의 '사전 섬멸'에 관해서도 '후생성이 리스크를 과소평가했다면?' 이라고 상정하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억압되어 있어요. 그것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의료현장에서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후생성이 무오류라고 의료 관계자가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그 정도로 실패를 누적해 온 관청에 대해 전문가가 그런 평가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면 전국민이 단번에 비관론으로 돌아서서 머리를 쓸 수 없게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최악의 시대를 불러오게 된다... 고 폭 넓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생각하기보다 '모든것이 잘 돌아가는 장밋빛 미래' 를 상상해 다행감에 푹 젖어있는 게 좋다, 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운 나쁘게 예상 밖의 위기적 상황에 조우하면 모두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함께 피해를 나누고, 함께 참회하자...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멋대가리 없는 것은 말하지 말고, '기즈나(絆; 3.11 당시의 유행어로, 연대의 개념에 가까움 -역주)'로 한 번 더 부흥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을 일본인은 오랫동안 반복해 왔습니다. 이 병적 경향은 '일본인은 위기 관리 능력이 없다' 라는 냉엄한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결코 개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3) 그렇다면 코로나 위기를 극복해서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망, 활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일본의 통치 기구는 제도로서 훌륭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시스템을 관리운영하는 인간의 질이 열화하고 있어요. 어떤 뛰어난 제도라도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솜씨가 나쁘면 손 쓸 수 없게 돼요. 문제는 통치기구를 관리운영하는 요직에 어떻게 '시민적 상식을 갖춘 제대로 된 어른'을 앉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선거로 국회의원을 뽑을 때 미디어에서의 지명도나 화려한 실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양식과 시민적인 성숙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도 사회는 조금이나마 바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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