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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의 세계 (우치다 타츠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4. 26. 12:31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4/22_1114.html
<월간 일본>에 긴 인터뷰가 게재되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관해.
■ '독재인가, 민주주의인가' 라는 역사적 분기점
—— 전 세계가 코로나 위기 대응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코로나가 일단락된다고 해도 더 이상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님은 코로나 위기에 대해 어떤 문제 의식을 갖고 계십니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재난으로 인해 이제까지 있어 왔던 세상의 모습은 일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 세계의 정치 체제나 경제체제가 달라지게 되겠지요.
가장 염려되는 것은 '코로나19가 민주주의를 압살할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민주국가보다 독재국가가 적절히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할 리스크가 있어요. 이번에 중국의 도시 봉쇄나 '일야성' 적인 병원 건설이나 의료 자원의 집중이라는, 어쨌든 민주국가에서는 실시할 수 없는 정책을 강권적으로 내려보내 결과적으로 감염 억제에 성공했습니다. 반대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가을 선거에서의 재선이라는 자기 편의만 우선한 고로 감염 당초에는 '아무 문제 없다'고 허세를 부려 초동 대응에 크게 뒤처졌습니다만 감염이 확대되자 유권자를 겨냥한 정책을 연발했습니다. 과학적이고 거시적인 정책을 쓰지 않았어요.
이 차이는 코로나 재난이 종식된 후 '미국의 상대적인 국위 저하'와 '중국의 상대적인 국위 상승' 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팬더믹을 계기로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미국의 현 상태가 역전돼요.
중국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원이 된 초기 단계에서는 정보 은폐나 책임 회피 등 비 민주적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 보였습니다만, 당 중앙이 손을 본 이후에는 강권적인 수법으로 단숨에 감염확대를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중국은 이제 다른 국가를 지원하기까지 합니다. 중국은 마스크나 검사 키트, 인공호흡기, 방호복 등 의료 자원의 생산거점입니다. 어떤 나라도 유혹을 저버릴 수 없는 것들을 국내에서 윤택하게 생산할 수 있어요. 이 어드밴티지를 이용해서 시진핑은 의료지원 측에 섰습니다.
이탈리아는 3월 초순에 의료 붕괴 위기에 처했습니다. 지원을 요청했지만 EU 국가들은 반응하지 않았어요. 중국만이 지원을 보냈어요. 인공호흡기나 마스크, 방호복을 보냈습니다. 이로써 이탈리아 국민의 대(對)중국 평가가 단번에 올라갔어요. 제 이탈리아 지인도 '지금 의지가 되는 것은 중국 뿐' 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중국도 국익 우선입니다. 그렇지만 트럼프가 가을 대선 까지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비해 시진핑은 앞으로 5년 뒤, 10년 뒤의 지정학적 지위를 내다보며 지원에 들어갔어요. 코로나 위기 대응을 통해 중국은 국제 사회를 떠받들 능력도, 의지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미국은 국제 사회의 리더십을 사실상 방기했어요. 코로나 사태와의 전쟁은 앞으로도 경우에 따라서는 1년 이상 계속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이 궤도 수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후의 국제 협력 체제를 중국이 지도하게 될 지도 몰라요.
——이번 중국의 성공과 미국의 실패가 명확해졌습니다. 그것이 '코로나 이후'의 체제로 이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코로나 팬더믹이 종식되면 위기를 되짚어 보는 단계가 되었을 때 '미국과 중국의 명암을 가른 것은 정치 시스템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라는 논의가 나올 터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정치 시스템을 비교해 보면 우선 중국은 일당 독재로 피 튀기는 권력 투쟁에서 살아 남은 인간이 톱에 오릅니다. 실력주의 경쟁이니 무능한 인간이 톱에 오르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그에 비해 미국의 유권자는 반드시 유능한 통치자를 뽑을 필요는 없어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통찰한 바와 같이 미국의 유권자는 자신들의 지성과 덕성 수준에 맞는 이에게 친근함을 느껴요. 그러니 트럼프같이 우둔하며 덕성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이 대통령으로 뽑힐 리스크가 있어요. 토크빌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미국 대통령은 앤드루 잭슨이라고 인디언 학살밖에 공적이 없는 범용한 군인이었지만 미국의 유권자는 그를 두 번이나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게 중국의 경우라면 치명적이었겠지만 미국은 연방제와 삼권 분립이 확실히 기능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우둔한 대통령이어도 통치 기구에 치명상을 안길 수는 없어요.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미국의 민주주의보다도 중국적 독재 쪽이 성공하는 듯 보여요. 유럽이나 일본도 기가 죽어 '민주제를 제한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분명히 나옵니다.
중국은 이미 안면 인식 시스템 등 포괄적인 국민 감시 시스템을 개발해서 아프리카나 싱가포르, 중남미 독재 국가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국민을 감시 관리하는 시스템에 있어서 중국은 이미 세계 최고입니다. 그런 압도적인 통치기구에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이 자민당에도 있으니 그들은 머지 않아 '중국에게서 배우자'라고 말하기 시작하겠지요.
■ 어째서 아베 정권에는 위기 관리 능력이 없었던 것인가
—— 그런 대세 속에서 일본의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일본은 팬더믹 대응에 확실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어떤 정도의 규모의 실패였는지는 최종적인 감염자 사망자 수가 확정될 때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방법을 그르치지 않는다면 사망자 수는 아마 적은 수로 끝낼 수 있을 터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동시에 중국, 대만, 한국, 일본 이렇게 4개국이 코로나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감염을 거의 저지했습니다. 대만과 한국은 초동 대응이 눈부셔서 이미 하향세입니다. 그 가운데 일본만이 감염이 확대되기 전 단계에서 중국 한국이나 유럽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어드밴티지가 있었는데도 검사체제도 치료체제도 정비하지 않은 채로 2개월을 허비했어요.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그걸 정말이지 활용하지 않은 채 감염 확대 국면을 맞게 되었어요.
—— 어째서 일본은 실패했을까요.
위정자가 무능했다는 말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총리 기자회견을 보면 일목요연합니다. 이 정도로 위기 상황인데도 아베 총리는 관료가 써 준 걸 읽는 것밖에는 할 수 없어요. 자신의 언어로 현 상황을 설명하고 방침을 논하며 국민에게 협력을 구하는 게 불가능해요.
독일의 메르켈이나 영국의 보리스 존슨,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는 정말이지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발신했습니다. 여기에는 낄 수도 없어요.
아베 총리는 국회 청문회에서도, 기자회견에서도, 물음에 성실히 대답하는 일을 지금까지도 해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고, 대답을 흐리고, 뻔뻔하게 식언했습니다. 내뱉은 말을 이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정치가를 저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국가 재난적 상황에서 결코 배의 키를 맡겨서는 안 되는 정치가에게 일본인은 키를 맡겨버렸습니다. 아베가 일본에게 크나큰 손실을 안겨주었을지언정 그것은 그런 인물을 7년간 권좌에 앉혀 준 우리 일본인들의 책임입니다.
감염증 대책으로써 해야 할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성공 사례를 모방하고, 실패 사례를 회피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중국이나 대만, 한국의 전례에서 배울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하지 않았어요.
첫째로는 도쿄 올림픽을 예정대로 개최하겠다는 의도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일본은 감염이 확대되지 않았다. 방역 체제도 완벽하고 모든 것이 통제 하에 있다" 고 말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검사도 하지 않았고 감염 확대에 대비한 의료 자원의 확보도 병상의 증설도 하지 않았어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다면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최악의 사태 도래를 막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인의 고유한 민족지적 기습民族誌的奇習 입니다. 기분은 이해하지만 그런 주술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이 근대 국가의 위기관리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선행하는 성공 사례로부터 배우지 않은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아베 정권이 '이데올로기 정권' 이기 때문입니다. 정책의 옳고 그름보다도 이데올로기에 충성하는 쪽을 우선시했어요. 그래서 유효한 수단이 존재한다고 해도 중국이나 한국이나 대만의 성공 사례를 모방하지 않아요. 야당도 차차로 대안을 내놓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채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성공 사례나 대안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누가' 발의한 것인가만 문제입니다. 적대시하고 깔보는 것들이 하는 것은 아마도 절대 모방하지 않아요.
아베 정권에게 있어서 주관적 소망은 객관적 정세 판단에 선행해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원이 자동적으로 '그렇다' 라는 사실로 물질화해요. 아베 총리 개인에게는 그것이 일상적인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토모[森友], 가케[加計], 사쿠라오미루카이[桜を見る会] (모두 권력 남용 스캔들 -역주) 도, 어떤 사안이라도 총리가 '그렇지 않다' 고 선고한 공문서는 어느새 소멸하고, 총리가 '모른다'고 맹세한 것에 대해서 관계자 전원이 기억을 잃어버려요. 아마 그 전능감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겠지요. '감염은 확대하지 않는다. 금방 종식한다'고 자신이 말하기만 하면 그것이 그대로 현실화한다고 반쯤 믿어버리고 맙니다.
리스크 헤지라는 것은 '양 쪽에 건다'는 것입니다. 양쪽에 거는 것이니, 올-인은 배제해요. 리스크 헤지에서는 '준비했지만 사용하지 않은 자원'이 반드시 쓸모 없게 됩니다. '준비했어도 사용하지 않았던 자원'을 경제학에서는 슬랙[slack; 여분]이라고 부릅니다. 슬랙이 있는 시스템이 위기 내구성이 강해요. 슬랙 없는 시스템은 약해요.
도쿄 올림픽에 대해서는 '예정대로 개최할 준비' 와 '올림픽이 중지될 정도의 팬더믹에 대비한 방역 대책의 준비' 두 가지를 동시 진행적으로 행하는 것이 상식적인 리스크 헤지입니다. 올림픽 준비와 방역 체제 중 어느 쪽은 '슬랙'이 돼요.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대응할 수 있지요.
그러나 아베 정권은 '올림픽 개최' 라는 한 곳에 걸었어요. 그것을 아무도 막지 못했어요. 그것은 지금 일본 정치가나 관료중에 리스크 헤지라고 하는 아이디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비용 대비 효과라든가 '저스트 인 타임(도요타가 시작한 것으로 유명한 생산관리 기법 -역주)' 이라든가 '재고 제로'라든가 하는 것만 말하기 때문에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슬랙이 필요하다' 라는 것의 의미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어요.
감염증의 경우, 전문적인 의료기구나 병상은 팬더믹이 일어나지 않으면 거의 쓸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료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 이라든가 '병상 이동률의 향상' 이라든가를 의료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는 정치가나 공무원은 감염증용 의료준비를 쓸모 없다고 생각해 삭감합니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 팬더믹이 일어나서 차례차례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보며 '어째서 준비하지 않았는가?' 라고 놀라는 일밖에 할 수 없어요.
■ 코로나 위기로 중산계층이 몰락한다
—— 일본이 실패했기 때문이야말로 독재화 흐름이 생겨난다. 어떤 말씀입니까.
일본은 코로나 대응에 실패했습니다만 이것은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라서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까지의 실패를 총괄하고 어디를 고쳐 나갈까 하는 것입니다. 평소대로였다면 '어리석은 위정자를 뽑은 탓에 실패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 현명한 위정자를 선출합시다'라는 간단한 얘기가 될 텐데요.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코로나 종식 후 자민당은 '헌법 때문에 필요한 정책을 실행하지 못했다' 라고 마무리 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코로나 대책에 실패한 것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지나치게 배려한 탓이다' 라며 자신들 실패 책임을 헌법의 하자로 전이하고자 할 거예요. 우파 논단에서는 개헌으로 비상 사태 조항을 신설하자든가 교육 제도를 바꿔 멸사봉공의 애국 정신을 함양하자든가 말하는 패거리들이 나오겠지요.
코로나 이후에는 '모든 게 헌법 탓' '민주제는 비효율적이다' 라는 언설이 반드시 나오게 됩니다. 이것과 어떻게 마주 대할 것인가, 그것이 코로나 이후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뜻 있는 미디어는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언론의 자유를 사수하기 위한 논진論陣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월간 일본> 같은 건 금세 폐간이예요.
—— 아베 정권은 코로나 대책과 함께 국민 생활을 지키는 경제 정책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불러일으킨 최대의 사회적 영향은 '중간 계층의 몰락' 이 결정적으로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것은 '두터운 중산층' 입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에 의해 세계적으로 계층 양극화가 진행되어 중산층이 점점 가늘어지고 빈곤화하고 있어요.
코로나 사태가 초래한 소비 감소로 기초 체력이 있는 대기업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의 많은 수는 도산이나 폐업으로 이어지겠지요. 소소하게나마 자립한 자본가였던 시민들이 노동 이외에는 팔 것이 없는 무산 계급으로 몰락해요.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 사회가 '한 줌의 부유층'과 '압도적 다수의 빈곤층' 으로 양극화해요. 이것은 망국의 시나리오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중산층을 보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야당은 어느 곳이나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해 민주주의를 지키자' 라는 정치 과제에 대해서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품고 있을 터입니다. 그러니 다음 선거에서는 '중산층의 중흥과 민주주의'를 목표로 할 것인가 '계층의 양극화와 독재'로 전락할 것인가의 선택에 관한 선거라는 것을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중산층이 몰락해 민주주의가 형해화하고 만다면 일본의 정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계층의 양극화가 진행되면 더욱 후진국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포티즘(연고주의) 이 발흥해 그다지 많지 않은 국부를 소수 지배 계층이 배타적으로 독점한다고 하는, 이제까지 개발 독재 국가나 후진국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정치 체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있어왔던 노골적인 네포티즘 사례를 보면 이게 아베 정권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재자와 그 일족이 권력과 국부를 독점해 그 콩고물을 받아 먹는 사람들 사이에 무리가 형성돼요. 그런 근대 이전으로의 퇴행이 일본에서는 이미 시작되고 있어요.
■ 민주주의를 수행하는 '어른'이 되어라!
—— 앞으로 일본은 강권적인 국가로의 유혹을 강하게 받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망국의 길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만 하겠습니다.
확실히 단기적인 스팬으로 보면 중국 같은 독재 국가 쪽이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민주주의는 합의 형성에 시간이 걸리니 작업 효율은 나쁩니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민주적인 국가 쪽이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시민의 상당수가 '성숙한 시민', 다시말해 '어른' 이 아니라면 기능하지 않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시민의 7% 정도가 '어른' 이 아니라면 민주주의적 시스템은 돌아가지 않아요. 일정 수의 '어른' 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민주주의의 취약성의 양면을 일컫건대, 민주주의의 수행적 강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성숙을 재촉합니다. 왕정이나 귀족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수의 위정자가 현명하다면 나머지 국민은 어느 정도 우둔해도 미숙해도 상관 없어요. 국민이 모두 '아이' 여도 독재자 한 명이 현자이면 국가는 적절히 통치될 수 있어요. 오히려 독재제도에서는 집단 성원이 '아이'인 쪽이 잘 기능해요. 그러니 독재제는 성원들의 시민적 성숙을 요구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돼' 라고 얼릅니다. 그 결과 자신 스스로 사물과 현상을 생각하는 힘이 없는, 쓸모 없는 국민만 늘어나서 국력이 쇠잔해지고 국운이 다 해요. 그 점에서 민주주의는 시민에 대해 '요구사항이 많은' 시스템인 것입니다. 그래도 그 덕에 복원력이 강한 창조적인 정치 체제가 될 수 있어요.
민주주의가 존속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면 간단합니다. 시스템으로서는 이미 완성되었으니까요. 다음은 '어른'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은 그것 뿐입니다.
—— 카뮈는 유명한 소설 <페스트>에서 최종적으로 '페스트를 남에게 옮기지 않는 신사'의 존재에 대해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금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힌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페스트> 에서는 맹위를 떨치고 있는 페스트에 대해 시민들이 뜻을 모아 보건대를 조직합니다. 이것은 나치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의 비유로 여겨집니다. 지금 우리들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하는 '페스트'에 대항해 나가면서 동시에 독재화라는 '페스트'에도 대항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스트>은 현재 일본의 위기적 상황을 우화적으로 그리고있는 것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페스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은 하급 관리인 그랑입니다. 낮에는 관청에서 일하고, 밤에는 취미인 소설을 쓰는 인물입니다만 보건대가 조직되었을 때 곧바로 지원해요. 관청 일과 집필 활동 사이에 헌신적으로 보건대 활동을 받아들이고, 페스트가 종식된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요. 아마 그랑은 카뮈가 실제 레지스탕스 활동 가운데 만났던 용감한 사람들의 기억을 소재로 만든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딱히 영웅적인 것을 행하자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의무로써, 하나라도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을 맡았어요. 마치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같은 캐주얼함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했어요. 그것이 카뮈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시민으로서의 '신사' 였다고 생각합니다.
'신사'에게 영웅주의는 필요치 않습니다. 과잉 의식을 가진다든가 사명감에 긴장한다면 기나긴 싸움을 이어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니까요. 일상 생활을 평온하게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지속해서 싸워나갈 수 없어요.
'코로나 이후'의 일본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른' 으로, 될 수 있는 한 '신사' 가 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2020-04-2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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