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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한일론> 서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4. 26. 18:31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4/25_1215.html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번은 '한일관계'를 테마로 해서 앤솔러지를 펴냈습니다. 그 취지에 대해서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기고자에게 보낸 '기고 의뢰' 문장을 싣고자 합니다.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나에게서 '여러분' 명의로 메일을 받아오신 분들은 금방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번에도 재차 앤솔러지 기고를 의뢰드립니다.
주제는 '한일관계' 입니다. 이것이 아마 지금의 일본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논쟁적 주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논건에 대해 어러분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한일 관계는 내가 아는 한 사상 최악입니다. 더 관계가 나빴던 시대도 과거 어느 시점에는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지금이 최악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거기에 대해 나 자신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누구에게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미디어 보도가 나타내는 한, 이번 일은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배상 청구 판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물론이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한일관계의 긴 역사가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65년으로 문제의 시점을 분기해서, '거기서부터' 얘기가 시작해 그 이전의 것은 '해결 완료' 로써 고려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만 한국 사람들은 기분이 개운치 않습니다.
법리상 조리가 있는 것과 감정적으로 기분이 편치 않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혼동한 채로 억누르고 억눌러도 문제는 끝나지 않을 뿐입니다.
한일관계는 어제 오늘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천년을 거쳐 깊은 관계를 지속해 온 이웃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문제'보다는 하나의 '대답'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양국이 각각 고유하게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 운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이 '정답'을 오히려 '문제'의 영역으로 되돌리려고 합니다.
영문을 모를 이야기라서 죄송합니다만, '이제 답이 나왔잖느냐' 라고 할 적에 '미안합니다만 조금만 더 <답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고 있음> 이라는 지점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요청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쪽이, 답을 내는 것보다 지적으로 생산적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당사자들 각자가 자신감 넘치게 논리정연한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당사자들 어느 쪽도 자신의 의견을 잘 갈무리할 수 없을 때 대화적인 환경이 성립한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나타내는 것과 같이, 어떤 입장이든 '쾌도난마' 유형의 언설은 무효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언설을 이미 지지하고 자세를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는 있어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해소하는 힘은 없으니까요.
당면하고 있는 한일관계에 대해서 똑똑한 누군가에게 '정답을 보여주세요' 라고 부탁하는 것보다 인내심 강하고 끈질기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가능한 환경을 다지는 것이 오히려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쾌한 주장을 단념하더라도 입장을 달리 하는 사람에게 '의지할 곳' 을 제공할 수 있는 말을 선택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고를 의뢰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성가신 일입니다.
말썽을 안겨드리기는 했지만 나는 어느 분께도 '한일 문제를 해결할 비책을 보여주십시오' 라고 부탁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안토니오 이노키의 명언 중에 "위기라고 하는 것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복잡한 것이 '뭉치'가 된 것이다. '뭉치'를 하나 정도 풀어나간다면 위기는 반드시 극복 가능하다" 라는 게 있습니다. 한일관계는 여러 실이 엮여서 '뭉치'가 된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매듭을 칼로 일도양단해 난문을 해결했습니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 무수한 '매듭' 가운데 한 가지라도 좋으니 매듭의 구조를 밝히고, 될 수 있다면 '여기는 이렇게 하면 풀릴 지 모른다' 라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기고를 부탁드린 것은 반드시 한일 문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그 식견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의 협력을 머리 숙여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상이 '기고의 청탁' 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본서의 의도가 무엇인지 여러분도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질문의 해법을 내보이는 책이 아닙니다. 적은 수지만 '의지할 곳'을 예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로서는 이 책을 펴낸 보람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원고를 수합해 읽어보았는데, 기고자 여러분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 있어서 숙지하고 있는 '매듭' 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의도를 양지해 주신 기고자 여러분께 편저자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개인적인 것을 말씀드리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답을 내는 것'에 흥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옳고 그름은 어느 쪽에 있는가라고 잘라 말하기보다는 쌍방이 서로 '이것은 간단히 풀 수 없는 문제다' 라고 각오하며 차라도 홀짝이면서 작은 한숨을 내쉬고 무심코 정원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시작하는 쪽이 얘기를 진전시킬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곤란해 하는 사람들이 멍하니 같은 정원을 바라보며 '매화가 피었군요' '그렇네요' 라며 끄덕이는 쪽이 결과적으로 상호 이해가 깊어지는게 아닐까요.
곤란할 때는 솔직하게 곤란해 한다. 모를 때는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한다. 일이 잘 안 풀리면 풀이 죽어 있는다. 그런 방향이 지력과 체력을 아울러 유연하게 한다는 것은 오래 살다 보니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입니다. 별로 역설도 무엇도 아니고,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곤란할 때는 '적당히 힘을 빼'게 되었습니다. '적당히'라는 말에 그 나름대로의 지혜와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낙관과 비관의 중간 정도 어디쯤에 걸쳐 있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활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일관계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입니다.
그럴 때는 무력감에 짓눌려 있는다거나 하는 게 아니고, 반대로 '이걸로 단숨에 해결'이라는 만능 해결책을 구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이거, 엄청 어려운 문제예요' 라고 문제 아래에 밑줄을 긋고 잠시 줄곧 바라보는 쪽이 자기 자신의 지적 성숙에 유리합니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난문에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자신이 그 정도로 현명하지 못하니까' 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 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일생을 걸어도 거기까지 현명해지지 못한다면(아마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걸로 좋지 않습니까. 잠깐이라도, 5분이라도 앞으로 기어나가 최후에는 진흙탕 속에 얼굴을 박은 채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라고 해도 나는 별로 후회가 없습니다. 어쨌든 한일관계는 2000년래의 역사가 있으며 근대로 한정해도 강화도조약 이래 150년에 걸쳐 얽히고 설킨 것이니 '내가 끝장을 내겠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고, 바라서도 안 됩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한국인 친구 몇 명과 사귀며 그들로부터 한국을 이해하고, 나를 통해 일본을 이해해 보자는 자그마한 대화의 장을 손수 만드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집단적 영위입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그마한' 누적으로밖에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세워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나의 벽돌을 쌓는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그 벽돌을 쌓는다. 수 십년, 어쩌면 몇 백년이 걸릴 지도 모르지만 그 벽돌의 무게가 장려한 대궐이 될 지도 모르고, 폐허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지도 모릅니다. 앞날은 알 수 없습니다. 나 개인으로서는 한일 양국 사이에 있는 초원에 덩그러니 세워진, 지나가는 사람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소박한 정자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논집에는 부디 한국 분들도 기고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편저자로부터 기고를 부탁받으신 두 분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집필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을 제외하면 현대 한국 지식인이 집필한 저서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저 사람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라고 물을 수 있는 정점 관측적인 분을 나는 알고 싶습니다. ('한국의 요로 다케시' 라든가 '한국의 시바 료타로' 라든가 '한국의 쓰루미 슌스케'와 같은 분이 있어서 무언가 일어날 때마다 그 탁견을 여쭐 수 있게 된다면 내 마음은 얼마나 편해질까요).
그 점에 있어서는 자신의 무력함을 정말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음에 한 번 더 한일론에 대해 펴낼 기획이 있게 된다면 그때는 한국의 언론 사정에 밝은 분에게 편저를 부탁드려 인선을 맡겨 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본서의 기획에 관해 웃는 얼굴로 질타해 주신 쇼분샤의 안도 아키라 씨의 아량과 관용에, 그리고 다시 한 번 기고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을 다해 사의를 표명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책이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포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2020년 3월)
(2020-04-25 12:15)
[불초소생 옮긴이의 주석]
졸견이지만 부디 들어주시기를 청합니다.
근 10년에서 70년 전 사이의 미시적 관점에서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 한일 관계는 좋았던 기간이 더 길었습니다(30년 가까이 되는 군부 독재 시기에 유난히 그랬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번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도덕적 부채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정치에 관한 상세한 얘기지만 들어주십시오. 문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난히 돌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당선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정치 지형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그의 문제 의식에 개혁파들이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이 노 전 대통령은 일본의 방송에도 출연했고, 산적한 문제에 관해 대화와 논리로 풀려고 하는 의지를 자주 표명했습니다.
문 대통령의 집권 과정은 이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었다고 하면 어떨런지요. 노 전 대통령 때는 숙청의 대상이 거의 없었습니다만, 혁신파가 권력을 잃고 있었던 사이에 생긴 일로 인해 '처리' 해야만 하는 대상은 갈수록 늘어만 갔습니다. 다시, 문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절친한 사이로, 둘 다 도덕적 부채가 없다시피 합니다만, 문 대통령 시절에 반일 문제가 크게 부각된 것은 대개 여기에 기인합니다. 그의 적대 세력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한편, 노-문 대통령의 강고한 지지층인 소위 X세대(현 4~50대)의 속사정도 있습니다. 이들이 청년이었던 90년대에 한국은 아직 후진국이었고, 이제 막 소비 사회가 도래하려고 하는데, 동시에 일본 상품(공산품과 미디어를 포함합니다)의 세계적 위상은 높았습니다. 이 헤이세이 시대 30년을 모두 거치고 나서, 객관적으로, 두 나라의 격차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대개) 일본 문물을 향수해 오던 X세대가 사회의 중간 관리층으로 성장하면서, 그들의 권력 의지가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비뚤어진 우월감이 아닌가 하고 저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한국인들이 반일 기조로 돌아서기 전까지 가장 출국을 많이 하는 국가 중 하나가 일본이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끝으로 도덕적 부채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본에 우호적인 사회 지도층은 대개 극우파입니다(미국을 좋아하는 자민당 주류들과 비슷하지요). 지식인들이 일본 문제를 솔직하게 말하는 경우는, 제가 과문한 탓이지만 거의 없어 보입니다. 어두운 이야기입니다만, 문화 자본이라는 게 있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누가 향유할 수 있었을까요? ... 아무튼, 지금 한국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쪽은 좀 더 철저하고 야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걸 덜 가진 쪽은 어땠을까요. 이렇다 할 코호트 연구는 (과문한 탓에)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제가 팔로우하는 문필가가 몇 명 있습니다만. 적어도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줄로 압니다. (그것보다 미국이 더 큰 문제니까요!)
한일 문제와 관련해 긴 안목으로 거시적인 통찰을 할 수 없어 유감입니다만, 적어도 1년 래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솔직하게(그리고 아무에게도 이해 받기 힘들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앞으로도 중요한 파트너입니다. 하지만, 진혼의 일을 게을리 했다가는 화를 입게 됩니다. 다행인 것은 물밑에서 서로 관심을 너무 많이 쏟고 있다는 현상도 발견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자기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종류 뿐이지만요. 예, 어려운 문제입니다. 정말로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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