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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그리고 왜 코로나19에 그렇게 대응했는가 (우치다 타츠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5. 15. 17:04
원제: コロナ禍についてのアンケート
출처: blog.tatsuru.com/2020/05/10_1022.html
어느 매체로부터 Q&A 형식으로 인터뷰가 있었다. 자수에 제한이 있어서 장문 판본을 여기에 게재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일어났던 일본이나 세계의 상황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감염증의 세계적 유행 그 자체는 2002년의 SARS, 2009년의 신종 플루, 2012년의 MERS 등과 같이 짧은 간격을 두며 정기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팬더믹도 별로 전대미문의 대사건일 리가 없습니다. 확실히 바이러스 그 자체는 그 때마다 '모르는 것' 입니다만, '미지의 바이러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에 대한 수순은 '아는 것' 입니다. 할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감염증 대책 센터를 설치하고, 거기에 정보와 권한을 집중하는 것, 의료 자원을 비축하는 것, 충분한 예산을 들여 감염증의 임상과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전문가를 육성해 두는 것... 이 정도겠지요. 딱히 기적적인 예견 능력이나 초인적인 의료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산문적이고 현실적인 '준비' 를 해 두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이나 대만, 뉴질랜드는 모두 준비해 둔 매뉴얼 대로 행동해서 감염을 조기에 억제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일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스크가 없고, 방호복이 없고, 인공호흡기가 없다... 와 같은 물량적인 원인으로 몇몇 나라에서 의료 붕괴와 가까운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이러스의 힘이 강력해서가 아니라, 위기 대응 능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태는 여러 나라가 갖고 있는 위기 대응 능력의 우열을 뜻밖에 가시화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는 그 차이가 크게 확대되어 국력의 격차로써 확실히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임할 수록 사람들의 정신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사람은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천재지변에 처한 경우와 같이 '잃어버린 것'을 따지기보다 '아직 수중에 남아있는 것'을 손꼽아 보는 것이 정신 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자신은 아직 건강하다, 아직 가족이나 친구도 있고, 살 집도 있고, 먹을거리도 있고, 일 할 능력도 있다... 그런 것들을 열거해 보는 것이 좋아요. 그런 사람이 빨리 털고 일어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을 돌볼 수도 있어요. 무심코 '나만큼 불행한 인간은 없다' 라는 말을 내뱉는 유형의 자기연민에 집착하면 거기로부터 상당히 벗어나기 어려워져요. 뭐, 그렇게 말은 해도 '마음을 가다듬을 정도의 여유 따위는 없다' 소리를 듣는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습니다만.
■감염자 수는 검사자 수에 비례합니다만, 일본의 사망자 수가 미국/유럽과 비교해 극도로 적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 감염자도 사망자도 적은데 왜 일본은 이 정도로 절망감이 큰 것일까요?
검사 건수가 적은 것은 당초에 일본의 방역전략상 검사수를 늘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말씀드립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런 말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3월 말까지 정부도 도쿄도도 도쿄올림픽을 개최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복수의 의료 선택지가 있었던 경우, 그 중 '가장 감염자 수를 적게 낼 것 같은 옵션' 을 채용할 용의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감염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정책을 철회한 뒤, 방역 전략이 전환된 후 감염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검사 건수가 늘어야만 할 터였고, 실제로 총리도 4월 1일에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주가 지나도 총리의 지시가 실현되지 않았어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지시를 내렸다' 말하면 실제로 '검사 건수를 억제하라' 고 현장에서는 다른 지시를 낸것에 그치지 않은 게 아닐까요. 아니면 '검사 건수를 늘려라' 하는 지시를 내려도 현장이 거기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나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감염증 컨트롤 센터가 기능하지 않고 있어요. 의료 현장에 의한 의료 붕괴와는 다른 차원에서 통치 기구의 기능 부전이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크도 총리가 배포를 발표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 '준비중' 입니다. 발주처의 이름을 캐물어도 정부는 곧바로 답변하지 않았어요. 은폐할 일도 아니고, 정말 몰라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부에서 내린 지시가 어디까지 닿으며 누가 책임을 지는 일이고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조차 총리실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마스크 두 장 조차 나눠주지 못하는 무능한 컨트롤 센터가 검사 건수를 늘린다는 어려운 업무를 완수할 리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의사회나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검사 확대에 착수했다... 라는 게 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태에서 공감할 만한 정책을 취한 나라나 지도자가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차이잉원 대만 총통, 문재인 한국 대통령, 재신더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곧장 '비상시 모드'로 전환해 감염 억제에 성공한 점에서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감염 억제에서 한 발 늦었지만, 국민을 향해 똑바로 정보 개시와 정부의 대책 방향을 명시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어요. 뉴욕 주의 앤드루 쿠오모 지사, 캘리포니아 주의 개빈 뉴섬 지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헛짓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 대책을 시행해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위기 대응이라고 하면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고 강권적으로 통제하는 방법과, 국민에게 진실을 전하고 자발적인 협조를 요청하는 방법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성공할 지는 모릅니다. 단기적으로는 중국 같은 중앙 집권적인 수법에 공이 돌아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철권 통치에 유유자적 따라가면서 자신은 사물이나 현상을 생각하지 않고 판단도 하지 않는 유아적 국민을 만들어내는 나라보다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판단을 통해 적절히 행동할 수 있는 국민적 성숙을 요구하는 나라 쪽이 '복원력(resilience)' 측면에서 바람직해요.
'복원력' 이란 실패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힘, 잘못된 정책을 재빨리 보정할 수 있는 힘, 아슬아슬한 위기를 회피할 수있는 힘입니다. 그것이 참된 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동서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백악관의 정책을 엄격히 비판해 나간 국내의 반항적 정치 문화를 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국을 비판하는 타국이 보기에는 '꽤 괜찮은 여지' 였지요. 또한 대담한 정책 전환을 맞는 새로운 기준이 되었어요. 소련에는 그와 유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국력이 쇠하고 있는 것은 대항적인 정치적 문화가 희박해져서 '자기들끼리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 서로 비관용적인 정치 세력' 이 팽팽히 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단순한 이항 대립에서는 '복원력' 이 나오지 않습니다.
중국이 앞으로 미국을 제패하고 초강대국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국내에 '복원력' 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담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이 경험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이 높아진 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도 들립니다. 달리 긍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일본의 통치 기구가 아베 정권의 7년 동안 선진국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열화된 것이 가시화 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으로 NHK를 필두로 해서 국내 매체는 사실을 은폐하고 '일본은 잘 대처했다' 는 정부 캠페인을 벌이겠지요.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게 통할 지 몰라도 세계의 전문가들이 '일본 정부가 발표한 데이터에는 역학적인 신뢰성이 없다'는 평가를 철회하지 않는 한, 각국의 통행이 재개되어도 일본에는 해외로부터 사람이 오지 않고, 일본에서는 바깥에 나갈 수 없는 사실상의 '쇄국' 상태에 떨어질 리스크가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개시하고 과학적 신뢰성이 있는 데이터를 발표해야만 합니다. 국내라면 공문서를 얼마든지 날조 은폐할 수 있습니다만 국제 사회를 상대로 그런 수법은 쓸 수 없어요. '개국' 을 위한 비용으로써 정부가 잘못한것도 포함해 정보 공개를 해 나갈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일' 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영국 NHS의 의료 종사자들에게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거나 자신들이 솔선해 후방 지원에 들어간 광경을 보며 대중 가운데 '사회'가 내면화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일본이 '사회'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대처 정권 당시 '사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단호한 자기책임론에 의해 영국의 국민적 연대는 분단, 노동자 계급의 빈곤화가 진행되며 '언더 클래스' 라는 새로운 계급이 태어났습니다. 여기에 대해 지금의 영국 사회에는 역사적 반성이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퇴원하는 국민에게 연설을 하며 NHS를 매우 칭찬했습니다. 대처 이래 영국 보수당은 '자기책임론' 에 입각해 의료나 복지, 교육에 투입되는 국비를 삭감해 왔기 때문에, 존슨 총리는 자신들이 예산을 깎은 NHS에게 도리어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정직하게 실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의료가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공공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다시 영국 사회의 '상식' 으로 재정립되어 가는 징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지난 20년 간 의료를 시장에 위탁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감염증 대책 예산도 삭감했습니다. 병원 경영자가 의약품의 재고 제로화라든가 병상 가동률의 향상을 적극적으로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의료자원의 비축이나 병상 수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정상성 편향' 에 씌인 눈으로 보면 감염증용 약품기재나 병상은 팬더믹 이외의 때에 '낭비' 로 비칩니다. 그러므로 아슬아슬할 때까지 삭감해요. 그리고, 몇 년에 한 번 감염 확대를 맞아서는 '어째서 비축하지 않은 거냐. 왜 병상이 부족한 거냐' 고 탄식해요. 자신들이 초래한 결과인 줄도 모르고.
지금 일본 의료 행정의 혼란은 오랫동안 '의료비의 삭감' 을 재정상의 과제로 해 온 정부가 '의료비의 증대' 로밖에는 대응할 수 없는 국면에 조우했다는 것에서 기인했습니다. 말하자면 엑셀을 밟으면서 브레이크를 밟는 것 같은 것이기에 운신할 수 없어요. 그것이 의료행정에 있어서의 '병목' 이라는 실상이 아닐까요.
앞으로 일본은 다시 이제까지의 '의료비 삭감' 노선으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 팬더믹에 대비해 '의료비 증대도 불사한다' 는 각오를 할 것인지, 그것을 우리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의료는 고액 상품이므로 돈이 있는 인간은 양질의 의료를 받을 수 있지만, 돈이 없는 인간은 의료도 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신자유주의적인 의료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상이 감염증에 적용될 수는 없어요.
미국에는 무보험자가 2750만 명 있습니다만 '돈을 낼 수 없는 인간에게는 의료를 받을 자격이 없다' 라는 신자유주의 룰을 채용한다면 빈곤층에서의 감염 확대를 저지할 수 없게 되어 어느샌가 국민 전체가 파멸적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주민 전원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음으로써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 '사회가 존재하는' 것으로밖에 감염증을 제어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슬슬 일본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비상 사태에 있어서의 예술(표현활동 전반) 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예술이 해야만 하는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현실을 보는 데는 여러가지 시점이 있고, 사물의 가치를 재고 따지는 데에는 여러가지 '잣대' 가 있습니다. 그것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장소(틈새) 가 늘어나고 다양화해요.
어느 시점에서 보면 절망적인 사태여도, 다른 시점에서 보면 전환기의 징후로 보이는 경우가 있어서 어떤 '잣대' 로 재면 무가치한 것이 다른 '잣대' 로 맞춰 보면 보물로 보일 수도 있어요. 예술은 그런 '보는 방식의 다양성' 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상시일수록, 곤란한 때일수록, 사람은 살아 남기 위해 예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뮈의 <페스트> 가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지금 읽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되는 책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비상시일 수록 머리를 차갑게 해서 넓은 시간대 가운데 눈 앞의 일을 '비인정非人情' 하게 관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는 고전을 읽는 것이 가장 좋아요.
카뮈의 <페스트> 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우리들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팬더믹에 던져져 '어떤 삶이 옳은 것인가' 를 필사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는 '답' 이 다릅니다. 페스트를 단지 두려워하는 자, 페스트와 싸우는 자, 페스트 가운데 진리를 구하는 자, 페스트를 이용하고자 하는 자... 누구의 삶이 옳은가, 저자는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독자 자신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디포의 <페스트>는 1665년에 런던 시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사망한 페스트 참사의 '실록' 입니다. 디포 자신은 당시 5세여서 아마도 들은 것을 썼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절망에 찬 도로를 절규하며 달리는 반라의 남자라든가, 주민 전원이 죽어서 개미 한 마리 없는 거리의 불안함이라든가, 디포의 소년 시절 트라우마적 경험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쓰여져 있습니다.
치사율을 제외하면 런던의 페스트 참사는 일본의 그것과 참으로 닮았습니다. 런던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주민들을 시골의 주민들이 거부하는 이야기가 상세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사실 런던으로부터 탈출한 사람들 중 비바람에, 그리고 기아에 쓰러져 거리에서 비명횡사한 사람이 많이 나왔습니다. 죽은 이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페스트 사망자로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외지에서 온 차를 불태우고, 차에 흠집을 내는 사람은 조금 더 사태가 악화되면 '죽어' 라는 말을 입에 담을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두는 편이 좋아요.
한 권 더 고르자면 가모노 초메이의 <호조키>. 태풍, 화재, 기아, 홍수, 돌림병... 어쨌든 교토의 거리에 불어 닥친 여러 천재지변에 대해 초메이는 저널리스틱한 관심을 갖고 현지 취재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깨달음을 얻게 돼요. 무감동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람들이 보는 관점과는 다르게 바라보며 사람들이 일희일비하는 것과는 다른 '잣대' 로 사람의 생과 사에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눈 앞의 아비규환이 어느새 잠잠해져요.
비인정의 골격을 다시금 배우고자 한다면 나쓰메 소세키의 <구사마쿠라>를 추천합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이것이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인 전체가 일종의 집단 광기 상태가 되었을 때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소세키는 '초연과 해탈에 이해득실이라는 땀을 빼버린 마음가짐' 을 구하고자 '별세계' 를 유람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020-05-1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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