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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선 <해녀들> 서평 (우치다 타츠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5. 16. 17:25
출처: blog.tatsuru.com/2020/05/11_1307.html
허윤선의 시집 <해녀들> 에 대한 서평을 니시니혼신문에 기고했다. 제주도의 해녀들을 주제로 한 시집이다. 이지치 노리코 씨의 부탁으로 썼지만, 정말로 시에 대해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나는 한국 문학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시는 내게 있어 더욱 어려운 분야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시가에 대해서조차 한 번도 서평을 써 본 일이 없다. 어째서 이런 인간에게 서평을 의뢰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번역자인 강신자 씨와의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강 씨는 '가모메 구미' 라는 트리오로 내가 주재하고 있는 개풍관에서 나니와부시(일본의 민속 성악 -역주) 와 판소리의 합동 공연을 개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제주도에는 두 번 가본 일이 있다. 한 번은 강연을 위해, 두 번째는 제주도의 생활문화와 그곳의 아픈 역사를 자세히 알고 있는 오사카 시립대의 이지치 노리코 씨가 인솔한 '수학 여행' 으로써. 그런데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제주도를 떠올릴 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처음 방문했을 때 우연히 걸어 들어간 어항의 식당에서 먹은 '고등어조림' 이다. 이곳 섬 사람들이 일본인과 같은 방식으로 요리한 것을 똑같이 맛있게 먹었다고 내 위장이 증언했을 때, 갑작스레 한일의 가까움과 먼 거리를 나는 동시에 느꼈다.
멀게 느껴진 것은, 거의 같은 생활 문화로 몸을 살찌웠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웃 나라 사람이 이 섬, 혹은 쓰시마나 오사카에서 어떤 것을 경험했는지 나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앞에 두고 풀이 죽었다.
나는 제주도의 바닷바람에 단련된 생활자의 얼굴을 마주 대하면 '위축된다'. 그것은 이 시집의 모든 항을 마주칠 때 내가 느끼는 정직한 감회이다. 그것은 공포도 혐오도 위화감도 아니다. 본 적 없는 할머니에게 갑자기 '백 년 전에 너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분위기의 날이었지' 라는 말을 듣고서는 그랬던가, 나는 이 사람과 혈연이었는데, 무언가 '심한 일' 을 저질러 이렇게 되었구나. 그런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 같은, 존재하지 않은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2020-05-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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