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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군중심리, 의료정책, 자본주의의 미래 그리고 살아남는 법 (우치다 타츠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6. 9. 12:17
<프레지던트 온라인> 이라는 매체가 메일로 질문장을 보냈다. 거기에 답변했다. 동 매체에서는 사진과 함께 볼 수 있다. https://president.jp/articles/-/35721 아래는 간행물에 가필한 롱 버전.
질문 1 코로나 사태 가운데 '자숙 경찰'이 횡행하는, 지금 사회 전체에 비정상적으로 흉흉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어떤 사회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모종의 대의명분을 위해 평소라면 용납되지 않을 비행이 허용된다' 는 분위기를 감지하면, 타인에 대해 갑자기 공격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법률, 도덕, 상식의 '감시' 에 의해 폭력성을 억지할 수 있습니다만, 기회가 주어지면 공격성을 해방해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우리 집단은 일정 비율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리스크를 잘 자각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마침 '자숙 경찰' 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만, 딱히 어떤 명분이라도 좋은 것입니다. 그걸 구실로 하면 타인을 매도한다든가 상처입힌다든가, 굴욕감을 안겨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움직입니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법률이나 규범의식, 상식이나 '하늘' 이나 '세간의 눈' 을 활성시켜 놓아서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이라면 어떤 짓을 해도 처벌 받지 않는다' 라는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2 "정의맨" 들의 특징 말씀입니다만, 문제의 배경에 있는 시스템에 관한 제언이나 개선보다 개인을 억누르는 경향이 강한 것은 어째서라고 생각하십니까.
기질적으로 공격적인 사람들은 그 공격성을 발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의' 를 내거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시스템의 개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때리기 쉬운 개인, 가장 약한 개인을 찾아내서 거기에 폭력을 집중해요. '자숙 경찰' 은 공중 위생에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감염자를 낙인찍으면 감염 경로 불명 환자가 늘어날 뿐이므로 자숙 경찰이란 존재 자체가 백해 무익인 것입니다.
3 '분위기' 하나만으로 인해 갑자기 사회적인 상호감시로 이행하는 것은, 일본인 고유의 민족지적 기습인 것일까요.
거리의 분위기에 휩쓸려 사고를 정지하는 것은 일본인의 '특기' 입니다. 그게 잘 작동하면 '일억 총 단결' 이 되거나 '일억 총 중산층' 이 되어서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실현시킬 수 없는 일제적인 행동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쁘게 작동하면 소수에 대해 비관용으로 일관하게 되어, 다수에 항의하는 이의나 반론을 폭력적으로 탄압해요.
지금 일본 사회의 전면적 정체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비관용이 가져온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전쟁 중의 일본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4 현 아베 정권의 코로나 대책은 계속 뒤처지고 있습니다만, 어째서 이 정도까지 위기 관리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요.
감염증은 몇 년에 한 번씩 유행하면서 커다란 피해를 가져다 줍니다만, 그것 이외의 시기에는 감염증 대책을 위한 의료자원이 모두 '낭비' 로 보이게 됩니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필요한 것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 공급해 재고를 제로로 한다는 '저스트 인 타임 생산방식' 을 공정 관리의 요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풍토에서는 '여분(슬랙)으로서의 의료 자원' 의 중요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5 이번 코로나 사태로 드러난 것은 일본 의료 시스템의 슬랙 부족이었습니다. 1996년에 845개소였던 보건소가 현재 469개소로, 감염증에 대응하던 9716병상은 1869병상까지 줄어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일본 의료 정책의 기본은 오래 전부터 '의료비를 삭감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한편, 감염증 대책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닥칠 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해 의료자원을 충분히 비축해 두는 것' 입니다. 될 수 있는 한 듬뿍 '여유' 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의료비를 삭감할 것인가' 라는 의료 정책과 아귀가 잘 맞을 리 없습니다.
이번 실패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잠시동안만큼은 비축의 필요성을 느꼈겠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정부는 '이번 감염증 대책에 일본 정부는 성공을 거뒀다' 고 마무리지을 터입니다. 성공한 이상, 반성할 점도 개선해야만 하는 점도 없어요. 그렇게 어느샌가 다시 의료비 삭감 노선으로 돌아가 '낭비' 를 줄이기 시작하겠지요.
그러므로 지금 여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앞으로 일본은 질병관리본부도 만들지 않고 보건소도 늘리지 않으며 감염 병상도 늘리지 않고, 의료기기의 비축도 늘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다음 감염증 사태를 맞아 또다시 의료 붕괴에 직면하게 되겠죠.
6 카뮈의 <페스트> 에서는 의사인 리유가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함이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의 경우에는 즉, 자신의 직무를 다 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라고도 발언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의료 현장을 지키면서,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의료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료 자원의 유한함을 항상 염두에 두는 일입니다. 의료붕괴라고 하면 말은 이상야릇하지만 한마디로 수용 가능한 환자 수가 의료 기관의 캐패시티를 넘었다고 하는 수량적이고도 산문적인 사태입니다. 이번에는 가까스로 의료 붕괴 직전에서 멈췄습니다만 이것은 거의 의료 종사자의 개인적인 헌신과 노력에 의한 것이어서, 제도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후폭풍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과로사 직전의 근무환경을 의료종사자에게 요구하는 시스템은 개선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의료자원은 의료와 관련된 살아 있는 인간이니까요.
7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초 고령화 사회를 맞아 한정된 의료자원을 어떻게 지키면 좋을까요.
이제까지 사람들은 의료에 대해 상품과 같이 그것을 살 경제력이 있는 인간만이 의료 자원을 향수할 수 있다는 시장 원리 주의적인 해결책을 적용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방법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감염증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미국에서의 대규모 감염 확대와 1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 수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는 2750만명의 무보험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증상이 발현되어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어 중증 환자가 됩니다. 보통 질병이라면 '돈이 없어서 죽는 것은 자기 책임이다' 로 끝날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감염증의 경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감염원이 된다면 감염의 리스크가 사회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감염증은 전 주민이 동등하게 양질의 의료를 받지 않는 한 대처할 수 없는 질병입니다. 여기에 시장 원리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의료 자원이 유한한 이상 어딘가에서 '선긋기' 는 필요합니다만, 고래적부터 의료종사자는 '환자의 빈부나 신분에 따라 의료의 내용을 바꿔서는 안 된다' 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의대에서는 졸업식에서 그 선서를 제창하고 있을 터입니다. '선을 그어라' 하고 명하는 현실과 '선긋기를 해서는 안 된다' 는 선언 사이에서 갈등이 생겨나요. 의료 종사자라는 것은 그 고뇌를 직무의 일부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환자인 우리들은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런 까다로운 이야기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를 간단히 해 달라는 인간은 의료에 대해 입을 열 자격이 없습니다. 히포크라테스가 그런 선서를 의료 종사자들에게 이른 것은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도 환자의 빈부 차에 의해 진료 내용을 바꾸는 의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현실' 을 '선언' 으로 대치하는 것, 즉 의료 종사자들을 갈등 가운데 휘말리게 하는 것으로 하여금 의료의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이 갈등에 대한 고뇌를 동력으로 해서 의료는 진화했어요.
만약 고대 그리스에서 '돈이 있는 인간만이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다. 가난한 이는 치료를 받을 수 없다' 는 심플한 룰을 채용했다면, 의료 종사자를 양성하기 위한 의학 교육에도, 효과적인 치료법의 개발에도, 보험 제도의 설계에도, 그것을 실행할 인센티브가 없습니다. 인간은 갈등을 통해서만, 심플한 해결법이 없다는 괴로운 조건 아래에서만 비로소 '그런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해결 방식' 을 발견해 온 것입니다. 유한한 의료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까 '모른다' 는 것은, 어제 오늘 시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8 세계의 상황을 보면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글로벌 사회의 취약성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고밀도의 도시생활, 대량의 사람과 물건의 유통이라는 현대 문명의 발전 과정이 앞으로 크게 변화하는 것일까요.
이번 팬데믹으로 미국은 중요 의료장비나 약품의 전략적 비축이 대폭 부족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정부는 필요한 마스크와 인공호흡기의 1%밖에 비축해 두지 않았습니다). 대만과 한국은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의료장비의 비축을 진행해 온 덕에 감염 억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들의 사례로부터 선진국은 모두 의료 자원에 대한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미 필요한 의료장비나 의약품의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같은 일이 에너지나 식량 등의 기초적인 물자 전반에 대해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사가 달려 있는 물자는 돈을 내도 살 수 없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전 세계는 다시 한 번 확신한 까닭입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여기서 일시정지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 일극 집중이라는 라이프스타일이 감염증 리스크에 더없이 취약하다는 것이 이번에 밝혀졌습니다. 원격 근무를 실천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위해 딱히 매일 통근할 필요 없는 이상 일부러 높은 임대료를 치르며 도시에 살 필요는 없다고 느꼈을 터입니다.
3.11 이후에 도쿄에서 지방으로 이주자가 급증했습니다만 같은 일이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도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자와 히로후미는 일본의 경우 총 인구의 20~25%가 농촌 인구로 편입되는 것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시뮬레이션했습니다만, 이 수치에 근접해 갈 지도 모릅니다.
9 각국이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은 것이 틀림없습니다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 질서 가운데 자본주의의 존재 양상도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트럼프의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리더십을 가질 의욕이 없습니다. 이 정책을 이어나간다면 미국을 대신해 중국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주역이 되겠지요. 중국은 일대일로 권역을 중심으로 의료 지원을 통해 우호국 파이프를 만들고 있어요. 중국의 초 패권 국가화를 바라지 않는 국가들은 그것을 방해하겠지요. 그렇지만, 결정타는 어느 쪽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분간 '지정학적인 교착 상태' 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인간과 상품의 흐름이 멈춘 것에서 보이듯이, 글로벌 자본주의도 피로누적에 따르는 쇠약을 피할 수 없겠지요. 이 기간에 '플랜 B' 로 하루 빨리 바꿔 채용하는 나라가 살아남고, 낡은 성공 모델에 고착하는 나라는 탈락합니다.
10 만약 코로나가 자본주의의 분기점이라고 한다면, 경제적 불황 아래에서도 국민의 식량이나 의료를 지키기 위해 어떤 사회 모델을 생각해야 할까요. 선생님의 비전을 알려 주십시오.
주지하고 있는 것은 인구 동태학적 사실입니다. 앞으로 일본은 초 고령화, 초 저출생 사회에 진입하게 됩니다. 2100년의 인구 예측은 중위 추계로 4950만 명. 현재의 1억 2700만명에서 7750만 명 감소합니다. 연간 90만 명의 기세로 인구가 줄어듭니다. 이제 경제 성장 같은 것은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사람들이 기분 좋게 살 수 있는 '작은 나라, 적은 국민小國寡民' 모델의 새로운 국가를 구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일본 열도는 온대 몬순이라는 온순한 기후에 둘러싸여 깊은 숲, 대량으로 흐르는 맑은 물이 있고, 대기도 청정하며, 식물상과 동물상도 다양한 자연 조건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자연 조건을 살린 농림수산업, 동시에 풍부한 자연 자원과 전통문화를 살린 관광, 예술,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아시아 제일이었던 교육과 의료, 그것들을 대들보로 한 나라 구축이 앞으로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11 애프터 코로나를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필요한 도덕관, 윤리관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미지의 상황에 던져졌을 때에도, 자유도와 선택지를 최대화하는 것이 운신의 기본입니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알지 못할 때는, 어느 정답이라도 자신의 선택지 가운데에 그것이 포함될 수 있도록 움직인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위해 자유나 선택지가 많은 쪽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체 감각을 갖춰두어야만 합니다.
일상적으로 '불쾌한 것을 견디고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는 사람이 만약 그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어느새 치명적으로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위기적인 상황에 조우했을 때, '좀 더 자유도가 낮은 편, 좀 더 선택지가 적은 편' 에 자신이 뛰어들어 먹혀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2020-05-27 09:52)
원제: パンデミックをめぐるインタビュー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5/27_0952.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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