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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감한 가족 (우치다 타츠루)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6. 13. 21:17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 책은 나와 딸 우치다 룬의 편지 교환집입니다.
    어떤 계기로 이런 책을 내게 되었는지에 관한 소상한 경위는 본문에 써 두었음으로, 그것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서문' 으로써, 다소 일반적인 것, 부모 자식이 된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 것을 써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을 일독하신 분들은 아마 '뭐라고 해야 할까, 이 부모 자식 사이는 미묘하게 삐걱거리는 것 같네' 라는 인상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렇지만 '미묘하게 삐걱거린다' 는 것은 '어떤 때는 잘 굴러간다' 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3할 정도가 죽이 잘 맞는다면, 그럭저럭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입장입니다. 부모 자식 사이란, 그리 찰떡같이 말이 통하지 않아도 돼요. 울퉁불퉁한 모양이나마 대화 자체가 가능할 정도가 살짝 낫지 않겠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다지 '어울려 놀'지 않는 듯 보입니다(내 학생 시절에는 어딜 가도 남자들이 모둠을 이뤄 몰려다녔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은 이유는, 물론 첫째로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가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다른 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귀찮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귀는 게 부담스러운 나머지 집단행동을 그다지 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어째서 '타인과의 소통이 귀찮다'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래 내용은 나의 사견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사견이라는 것은 본디 '이상한 의견' 이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세요.

    나는 젊은이들이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부담을 느끼게 된 이유란, 공감 압력이 너무 강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일본 사회는 지나칠 정도로 공감을 강요하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학교에서의 공감압력이 강해요. 그런 기분이 듭니다. 기뻐하라, 슬퍼하라, 재밌어하라, 냉소하라, 이렇게 주위와의 공감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어요.
    내가 여대 교수였을 때 어느샌가 느끼게 되었는데, 어떤 화제에 대해서도 '맞아! 맞아! 맞아!' 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하이파이브 하는 등의 '커뮤니케이션 했다는 느낌' 을 어필하는 학생이 늘어났습니다. 그런 오버 액션을 암묵적으로 모두에게 강제하고 있다...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뭐가 되었든 그런 공감 표시 행위 자체를 과시할 필요는 없을 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그거 거짓말이잖아요.
    보통 타자와의 사이에 100% 이해와 공감이 성립하는 일은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틀림없는데도 그게 가능하다는 듯이 처신하고 있어요. '그렇게 무리하면 힘들지 않아?' 라고 옆에서 지켜보며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고 해도 말이죠,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어요.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어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사귄 탓에 흉중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의 정말이지 모르고 있던 내면을 엿보고 나서 가슴이 철렁했다든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완전히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올록볼록한 모양' 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요의 노랫말만 해도 보세요, 마음을 허락한 배우자나 연인의 배신 혹은 거짓말에 '가슴이 철렁한' 방면의 경험이 선호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마쓰토야 유미의 <Pearl Pierce>라든지), 그 반대의 사례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마음을 개운하게 종잡지 못하던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을 뒤에 회상하려고 하니 뭐랄까 대단히 제일급이었다... 라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 라든가 <이백 십 일> 이라든가, '그런 것' 말입니다).
    내 의견을 밝히자면,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없는 먼 사람과 보낸 시간을 차후에 그리워하며 떠올리게 되는' 타입의 인간관계가 좋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것을 커뮤니케이션의 기본값으로 채용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런 주장을 이 자리를 빌려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에 '어덜트 칠드런' 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다행히도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부모가 알코올 중독이었거나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도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학설입니다. 그것에 대해 쓴 책을 읽어보면, '어덜트 칠드런이 발생할 확률이 높은 가정' 의 조건이 몇 개 열거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가족 사이에 비밀이 있다' 는 항목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읽고 그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얘기가 거꾸로 된 게 아닌가 했습니다.
    왜냐면, 가족 사이에 비밀이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여러가지 생각을 마음 깊숙이 품고 있어요.
    나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형에게, 결혼한 후에는 아내나 아이에게, 내 '마음 속 깊은 곳' 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알고 있는 척' 만 해 주는 것으로 양해해 주었으면 해요. 왜냐하면 일부러 깊이 숨겨 둔 것이란, 미쳐 날뛰는, 사회적 승인을 얻기 어려운 유형의 사념이나 감정일 것임에 틀림 없기 때문입니다. 딱히 가족들에게 그것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란다든가, 승인해 주었으면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싶지도 않아요. 내버려 두었으면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가족다운 배려' 라는 것이 있다면 '이 사람은 왠지 <마음의 비밀>을 숨기고 있구나' 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 그 얘기를 꺼내지 않고, 거기에는 부주의하게 다가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염치가 있는게 좋지 않을까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운이 좋다면 얼마 안 있어 누군가에게 '이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했던 바가 없었는데 말야...' 라고 고백하는 때가 옵니다. 그런 얘기를 잠자코 들어주는 사람을 '친구' 나 '애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생에 몇 번이고 일어나는 일이 아닌, 특권적 경험입니다. '친구' 라고는 해도,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의 비밀' 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연인' 과 운이 좋아 결혼한 경우에도, 역시 아침저녁 개다리소반을 끼고 '마음의 비밀' 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예요. 마음 깊은 곳에 감춰 둔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예외적이면서 동시에 아주 소중한 경험인 고로 쉴 새 없이 행할 수는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족 사이인데 그렇게 남남처럼 지낼 수 있나요' 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음을 양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남처럼'과 거리를 둔 결과, 골육상잔의 이전투구... 까지 이어진 사례를 나는 많이 봐 왔습니다. 그런 가족은 예외 없이 '거리낌 없는 사이' 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이 진흙탕 싸움을 하기 전까지는 친한 것처럼 보였어요. 서로 허물 없이, 서로 악담을 퍼붓고, 결점을 왈가왈부하며 용모나 행동거지에 대해 신랄하게 비평했는데요. 그것이 '친함' 의 표현이라고 그들 나름대로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가족은 이따금 어떤 계기를 맞아(거의 돈이나 결혼 문제 때문에) 콩가루가 났어요. 그런 겁니다. '가족에게 승인받지 못할 돈의 사용처' 와 '가족에게 승인받지 못할 성적 지향' 에 대해서는 그다지 '친밀한' 코멘트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랬구나... 그런 사람이었구나' 라고 숨을 삼키는 정도로 그친다. 그것이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대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해 말할 때도 사정은 같은 거라고 봅니다.
    아무리 서로 친하다고 해도 반드시 한쪽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 을 말하거나,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행동' 을 해요. 반드시.
    얌전했던 소녀가 갑자기 '이제 질렸어. 내버려 둬' 라는 폭언을 남긴 뒤 계단을 뛰어올라간다거나, 우등생이었을 터일 소년이 '아버지를 쳐 죽이고 싶어' 라고 차가운 눈빛을 한다든가... 그런 일은, 정말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게, 있다' 는 전제로 얘기를 시작하는 게 나아요. 그렇지만, 아직 거기까지 그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그런 장면과 조우했을 때 '친했을 터였을 가족' 은 깜짝 놀라고 맙니다. 그리고 상처입어요.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해서 자신을 상처입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해요. 너무 일방적이다, 심하지 않냐고 생각해요. 이제 균형을 취하기 위해 자신도 상대에게 똑같이 상처입힐 권리가 있고, 의무 또한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서운 얘기군요.
    그렇지만 '그런 일' 이 일어나는 이유는 '가족은 서로 비밀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든가 '가족은 마음 깊숙이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를 전제로 하고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전제가 틀렸습니다. 물론, '마땅히 존재해야 할 가족'에 대한 높은 이상적 목표를 걸어두는 것은 좋습니다. 그렇지만, '존재해야 마땅한 가족' 의 허들을 너무 높여서, 결과적으로 가족이 서로를 항상 '감점법' 으로 채점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차며 지내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가족의 합격점을 다소 낮게 설정해서 '아아, 오늘은 합격점을 땄다. 다행이다' 라고 안도하는 나날을 보내는 편이 정신건강에도 신체에도 이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이 없군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적어요. 어째서일까요.

    나는 그 이유가 '공감' 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어 있어서라고 봅니다. 애초부터 동질화 압력이 강했던 일본 사회는 갈수록 '공감' 이라든가 '기즈나[사람 사이의 유대 -옮긴이]' 라든가 '단결[one team]' 이라든가에 속박되어가고 있어요. 그런 탓에 이제는 숨이 막힐 정도로 살아가기 괴로워지고 있어요. 일본인 여러분, 그렇게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가끔 지하철을 타다 보면 학생들이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듣게 됩니다. 그러자면 정말로 티키타카가 빨라요. 초고속으로 말이 오고갑니다. 때리면 울린다라든가, 척추반사적이라든가, 어쨌든 '말을 삼킨다' 라든가 '우물거린다' 라든가 '잠시 침묵한다'는 행동거지가 아예 없어요.
    하지만 이건 이상합니다.
    이 젊은이들은 아마 그런 초고속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양질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틀렸다고 봐요. 그런 초고속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서클에서의 자기 '위치' 라고나 할까 '역할' 이라고나 할까 '이런 식으로 말하면 이런 식으로 즉답하는 녀석'같은 '캐릭터 설정' 을 획정해 두어야만 해요. 그렇지만, 이건 무지 피곤한 일이기도 할뿐더러, 단순한 피로감이라는 차원 이상의 더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치면 울리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그 자리에서만큼은 기분이 좋아요. 재즈의 인터플레이같은 것이니 '실력 좋은'동료들과 기분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는 일이 어려워져요. '자신 답지 않은' 리액션을 하면 모두가 째려봅니다. '어떻게 된 거야. 너답지 않잖아'라는 핀잔을 들어요. 이것이 '캐릭터 설정'이란 것의 무서운 점입니다.
    분명히 캐릭터 설정이란 걸 받아들이면 집단 내부에 자신의 '자리'가 생겨납니다. 언제나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구들도 생겨요. 그렇지만, 그것은 '기본값을 건들지 말 것'이라고 하는 무언의 명령이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역할로부터 벗어나지 마라, 정해진 대사를 정해진 타이밍에 말해라, 변화하지 말라. 그런 식의 명령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족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너는 ~ 이니까'라고 결정지어져 버려요. 이 ~에는 아무거나 넣어도 좋습니다.
    나 같으면 '다쓰루는 수박을 좋아하니까' '다쓰루는 요령이 좋으니까' '다쓰루는 정이 없으니까' 등등, 무수한 '캐릭터 설정' 이 가정 내에 존재합니다.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해서 그것대로 리액션하면 가족은 기분이 좋아집니다. 가족이 좋아하면 나도 기쁘고요. 듣고 보니 나 자신 확실히 수박을 좋아하고, 요령이 좋고, 정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렇지만, 그건 일종의 '거미줄' 인 것입니다. 정신이 들면 그런 무수한 '다쓰루는 ~ 니까' 로 옴짝달싹 못 할 만큼 굴레에 씌어져 있어요.
    나는 성장했어요. 변화했어요. 당연한 얘기잖아요. <삼국지>의 여몽이 '선비는 모름지기 사흘만 떨어져 있어도 눈을 비비며 다시 대해야 할 정도로 학문에 힘써야 한다' 라는 말을 남겼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랄 때는 사흘 만에 다른 사람이 될 정도의 기세로 변합니다. 그것이 인성이란 것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캐릭터'의 속박이 내구 한계를 넘는 시점에 나는 '죄송합니다. 오랜 기간 여러분께 <우치다 다쓰루>를 연기해 보여드렸습니다만, 이제 이 역을 맡는 데 지쳤습니다. 역할을 그만둡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이라 고하며 고등학생 때 집을 나와버렸습니다.

    가족의 유대감은 항상 '변하지 말라' 는 위압적인 명령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성숙해지기를 바란다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가족의 '유대감'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아이의 성숙과 가족의 유대감은 양립 불가합니다.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유대감이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성숙을 고대하며 유대감을 잘라내버린 아이와 남겨진 가족의 관계 회복은 곤란해져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유대감을 느슨하게 해놓는 편이 좋아요. 그게 긴 안목에서 보면 나은 선택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역할을 그만 두고' 고등학교를 자퇴해 집을 나온 뒤, 경제적으로 곤궁해져서 영락한 채로 집에 홀리듯 돌아갔습니다. 정말이지 면목 없는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잠자코 '그랬냐'는 말 뿐이었습니다. 고집불통 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도, 공감하는 것도 그 시점까지 아버지는 단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소년' 을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맞아들일 것을 결단했어요. 그 당혹스런 표정이 지금도 기억날 정도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50세가 되었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좋은 부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감사해하고 있는 것은, 당시에 '자식을 이해하기를 포기했지만, 좀체 알 수 없는 아들과 서먹서먹 공생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라고 하는 결단을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이 서간집을 통독하신 여러분은 나와 딸의 친밀한 대화보다도 '뭔지 모를 미묘한 알력' 쪽에 흥미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서로 어긋나 있는데 잘도 <우리는 사이 좋은 부모 자식이랍니다> 행세를 하는구나'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말이죠, 그런 겁니다.
    우리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부모 자식입니다. 그렇지만,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는 부모자식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고등학생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치면 울린다' 같이 초고속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잘되는 커뮤니케이션을 취할 수 없는 것 자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럴 수도 있지 하며 포기했어요. 그리고, 어쨌든 상대방을 가족 내부적으로 설정한 '캐릭터'에 가두는 일을 가능한 한 자제합니다. 상대가 점점 모습을 바꾸어도 그다지 놀라지 않아요(조금은 놀랍니다만). 이제는 조금이라도 좋으니 커뮤니케이션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요. 살아생전에는 무리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잖은가 하는 게 나의 기본 자세입니다.
    이런 아비이니 딸아이도 가족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기대를 품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난처할 때는 난처해해도 좋아요. '해 봤는데 이게 참...' '으음, 도무지 공략할 수 없는데' 하는 식으로 팔짱을 낀 채 정원의 해당화에 문득 눈길을 주고 난 뒤, 둘이서 차를 홀짝인다... 같은 모양새의 부모 자식 관계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라고 쓰자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부모자식이란 게 좋을 리가 없잖아'라고 반박할 딸의 한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미안해요. 부모 자식은 어려운 것입니다.

    글을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만, 이런 불가사의한 책의 기획을 지지해 주시고, 우리 부녀를 독려해 주신 주오코론신샤의 야나기 후미쇼씨, 고 이쓰고씨 두 편집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부모 자식간에 둘이서 터놓고 얘기한다는 게 좀 뭣해서 편지 교환같은 건 할 엄두도 못 낼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제 3자의 눈을 신경 쓰며 써 나가다 보니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을 서로 정직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변호사를 사이에 두고서 합의이혼하는 것 같다... 는 불온한 비유를 떠올렸지만 제가 봐도 참으로 부적절하네요. 잊어주십시오.
    무엇보다, 오랫동안 어울려 준 딸에게 감사합니다. 고마워. 가끔은 고베에 놀러와 주려무나.

    2020년 3월
    우치다 다쓰루

    (2020-06-03 11:13)

    저자 약력
    우치다 다쓰루
    1950년생. 사상가, 무도가.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거리의 한일론> 등.

    원제: 『街場の親子論』のためのまえがき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6/03_11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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