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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이 사토시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서평 (우치다 타츠루)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6. 14. 15:10

    개인적인 말을 늘어놓아 송구스럽지만, 경제학자 이시카와 야스히로 씨와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라는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한 마르크스 입문서를 쓰고 있다. 마르크스 주요 저서를 한 권 정도 뽑아 이시카와 씨는 경제학자로서, 나는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중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쉽게 소개한다는 취지의 책이다.

    제 1권에서 <공산당 선언>, <헤겔 법철학 비판>, <유대인 문제>. 제 2권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과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제 3권에서 <프랑스 내란>과 <마르크스 그리고 미국>에 대한 공동 연구. 여기까지 냈다. 최종권에서 <자본론>을 논하며 무사히 시리즈를 끝낸다는 계획이었지만 '다음은 <자본론> 맞지?' 하고 확인해둔 뒤로 2년이 지나고 말았다. 정체되어 있는 이유는 내가 공사다망하여 쓰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시라이 사토시 씨의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이 나왔다. 일독한 뒤 너무 재미있어서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 쓰면 되겠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의 <자본론> 론을 쓰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졌다. 코로나 사태로 한가한 날이 계속되고 있어서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원고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편집자들에게 시라이 씨는 음덕을 쌓게 된 것이다.

    내가 무릎을 쳤던 '과연! 이런 식으로 쓰면 되는구나!' 의 '이런 식으로' 란 '어떠한 방식' 이었던 것일까. 그것에 대해 써 보고자 한다.


    시라이 씨의 이 책은 '입문서' 다. '<자본론>의 위대함을 스트레이트로 독자에게 전하는 책을 쓰고 싶다' 라는 시라이 씨의 생각이 표현된 입문서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없는 젊은이를 독자로 상정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진수' 를 별안간 씹어 삼키게 하겠다는 대담하기 그지 없는 의도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했다.

    엄청난 역작으로 불려야 마땅한 '입문서' 의 판별 기준은, 상정 독자의 지성을 어느 정도의 레벨로 설정했는가의 초기 설정으로 거의 결정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평범한 전문가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하면 갑자기 '계몽'이라는 스탠스를 취한다. 상정 독자의 지성을 상당히 낮게 설정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리더 프렌들리'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실패한다.

    '계몽' 은 '저자는 박식하고, 독자는 무지하다' 는 '지의 비대칭성' 을 전제로 한다. 그런 자세는 커뮤니케이션을 저해할망정, 활성화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계몽' 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이 독자를 위압하거나 굴욕감을 선사할 가능성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저자가 독자에 대해 충분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경우 독자는 그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마음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사람은 자신이 상대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아닌지 여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자신이 상대방으로부터 경의를 받고 있는지 아닌지는 곧장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정말로 독자에게 무언가를 전하고자 할 때 대부분의 경우, 독자가 '마음을 여는 일' 을 하게끔 하지 못하면 달성할 수 없다. 독자들이 이제까지 갖고 있던 자신의 사고방식을 일단 '괄호 안에 넣고', 자신의 '잣대' 를 들이대는 일을 잠깐만 자제한 채 저자가 하는 말을 '통째로 삼키지' 않으면, 정말 전하고 싶은 것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일' 뿐인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회로를 닦는 것' 이라는 수행적인 작업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 그 회로에 따라오는 컨텐츠의 시시비비나 진위 여부는 일단 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독자가 책을 읽어나감에 있어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을 이해하고자, 자기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느끼는 방식을 일시적으로 '괄호 안에 넣고' '책꽂이에 꽂아' 둘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그 책은 커뮤니케이션의 회로 형성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마음을 열고' 라는 비교적 온당한 동사를 사용했지만 실은 그리 쉬운 얘기만은 아니다. 독자가 '마음을 연다' 는 것은 어느 부분에서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 자신으로 남아있는 한, 눈 앞에 놓인 페이지에 쓰여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읽고 있는 페이지를 이해하려면 나는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목숨을 건 도약' 과도 같은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것, 그것이 '마음을 연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삼엄한 책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시라이 씨의 이 책은 그런 저서이다.


    시라이 씨는 독자들에게 '목숨을 건 도약' 을 요구한다. 가혹한 요청이다. 그 점을 시라이 씨도 알고 있다. '자, 이게 낙하산이라는 거야. 이걸로 저 목표점까지 뛰어내려 봐. 그럼 출발이다' 하는 식으로 씩씩하게 말한다손 쳐도, 아마 다리가 풀려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뛰어내리기 전에 세심히 스트레칭을 하는 차원에서, 지금부터 행하게 될 '도약' 이 어떠한 역사적인 문맥 가운데 형성되어 왜 지적 성숙에 있어서 필수 과목이 되었나를 조곤조곤 읊는다. 독자에게 '두려운 일' 을 시키는 책은 프렌들리한 얼굴을 하고 다가간다. 그런 것이다.

    이 책은 정말로 주의 깊게 쓰여졌다. 그렇지만 그것은 반복해 말하는데 '계몽적' 인 의도에 기반한 주의깊음과는 다르다. 시라이 씨가 매우 세심하게 설명하는 까닭은, 독자에게 이제부터 '엄청난 일' 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시라이 씨는 '사색하는 사람' 이면서 동시에 '행동하는 사람' 이다. 그는 (사회인이라는 입장상 그다지 소리를 높이지는 않지만) 기회가 있다면 '혁명을 하고 싶다' 고 마음먹는다. 그래서 사실 그의 모든 책을 통해 시라이 씨는 '함께 혁명을 도모할 동지' 를 스카우트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에게 이제부터 굉장한 일을 권한다' 할 때의 '굉장한 것' 은 그것이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 의 후기에서 '혁명의 경험을 완수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저술하는 것보다 한층 더 유쾌하고, 또한 한층 더 유익하기도 하다' 라고 썼다. 분명 시라이 씨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책은 '독자로 하여금 행동으로 이끌기 위한 책' 이다. 읽고 나서 '알겠습니다. 아이고, <자본론> 을 잘 알아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도로 끝낼 일은 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자본제 사회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혁명을 이루려면 이제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요?' 하고 독자가 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책을 쓰는 사람은 드물다.

    전에 구와하라 다케오는 사람을 평가할 때 '함께 혁명을 할 수 있는지' 를 기준으로 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건 제법 멋진 기준이라고 본다.

    혁명 투쟁이란 것은 거개가 지하활동 기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탄압받고, 경찰에게 쫓기고, 체포와 투옥을 당하고, 고문받고, 처벌받을 리스크에 둘러싸인 일상이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운동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레닌이 말한 대로 나날의 활동이 대단히 '유쾌' 하기 때문이다. '그래, 혁명을 하자' 마음먹고 동료를 모아 조직을 만들며 기관지를 낸다든지 하는 날들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압도적으로 '유쾌' 하기 때문에, 탄압에서 처벌로 이르는 불길한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 이 전경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함께 혁명을 할 수 있는 사람' 이란 '함께 있으면 사는 게 유쾌해지는 사람' 인 것이다. 함께 있으면 매일의 하잘 것 없는 사소한 일들이 빛나 보이는, 현실의 세부에마저도 깊은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그런 사람이 '함께 혁명을 도모할 수 있는 자' 이다. 시라이 씨는 그런 저자로서 다가간다. 이것은 현대 일본에서 참으로 예외적인 위치 설정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시라이 씨의 '리더 프렌들리니스' 에 대해 쓰는 동안 책 내용을 소개하기도 전에 예정된 자수를 넘기고 말았다. 몇 마디 말로는 정말로 이 책의 참맛을 요약할 수 없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있게 읽은 부분은, 어찌하여 사람은 '자본에 봉사하는 정도' 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일을 (그것이 자기 자신을 더욱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조차 상관하지 않고) 이 정도로 고분고분하게, 아니 희희낙락하며 받아들이는가, 라는 물음을 둘러싸고 쓰여진 부분이었다.

    우리들이 사는 시대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인간의 기본적 가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지니는 가치나 꼭 돈이 되지 않아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을 자본에 봉사하는 도구로만 보는 것이다." (시라이 사토시, 오시연 역,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68p)

    정말이지 말 그대로인데 문제는, 어째서 사람들은 거기에 저항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가 수탈당하는 측의 인간 안에 깊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도착을 마르크스는 '포섭' 이라고 부른다.

    이 '포섭' 과 '본원적 축적' 이 잉글랜드 농업 혁명기의 '울타리 치기' 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맑스주의 교과서에 쓰여져 있으나, 시라이 씨의 설명만큼 이해하기 쉬운 것을 필자는 읽어본 적이 없다.

    인간들이 자신을 수탈하는 제도에 머리를 조아리려는 뒤틀린 심성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 신체의 깊은 곳에서부터 짜 올린 목소리로 그 제도에 'No' 를 외치는 날이 오기 전까지, 자본주의의 하자나 부조리를 아무리 논해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혁명적 주체의 형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라이 씨는 이 책의 결론부에 이렇게 쓰고 있다.

    "(...) 매일 시리얼만 먹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속삭임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그때 그건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계급투쟁은 시작된다. 러시아 혁명을 묘사한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도 수병들에게 상한 고기를 먹게 했기 때문이다. 그 분노가 상관을 쓰러뜨리고 계급투쟁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Ibid, 266~277p)

    최종적으로 '반항' 의 기점이 되는 것은 인간의 몸뚱아리다. 일찍이 앙드레 브르통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세상을 바꾸라' 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생활을 바꾸라' 고 랭보는 말했다. 이 두 슬로건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것이었다."

    그 말대로라고 생각한다. '생활을 바꾸는' 것 없이 '세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사람의 인간이, 피와 뼈를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 생물로서의 깊은 층위에서 '그것은 싫다' 는 반항의 절규를 낼 때, 노동자는 자본주의적인 '포섭' 으로부터 몸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리고 '포섭' 에서 벗어난 노동자의 눈 앞에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 이래의 자본주의 전 역사가 한 눈에 펼쳐진다. 그래서 노동자가 다음으로 선택할 행동은 어떤 모습으로, 그 말이 지니고 있는 바른 의미로서의 '혁명적' 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겁쟁이를 일으켜 세울 만한' 것에 관한 '혁명적' 인 저서가 등장한 것을 기쁘게 여긴다.

    (2020-06-12 13:5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6/12_1352.html

     

    書評・白井聡「武器としての「資本論」(東洋経済新報社刊) - 内田樹の研究室

     私事から始めて恐縮だが、経済学者の石川康宏さんと『若者よ、マルクスを読もう』という中高生向けのマルクス入門書を書いている。マルクスの主著を一冊ずつ取り上げて、石川さん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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