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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야스시 <호구지책의 비가> 서평 (우치다 타츠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7. 5. 10:06
표지 사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개를 태운 리어카에 매단 자전거에 타고 있는 남성의 사진이다. 책에 관한 소개문을 앞서 읽은 탓에, 아마도 촬영지는 상해이고 피사체는 시골에서 상해로 돈 벌기 위해 나와 '3D'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농민공일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 있었다.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폐품 회수 리어카의 누추한 전경을 배치해 놓은 구도는 사회 격차를 표현하는 데 있어 흔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진에는 그런 예정조화를 무너뜨리는 '무엇인가' 가 있었다. 그것은 그 폐품회수업자 남성이 담고 있는 독특한 표정이었다.
본문을 읽어나가니, 그것이 젠카이 씨라고 하는 허난 성 출신의 노동자와 그의 반려견을 담은 상해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매우 근대적인 도시의 한귀퉁이에, 호화 도시 생활과는 어떤 연고도 찾아볼 수 없는 채로 살고 있을 터인 폐품회수업자의 표정에 나타난 기묘한 밝음에 나는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우리들은 세계를 단순한 이항대립으로 이해하고는 한다.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빈곤층, 강권적인 정부와 반항적인 시민, 희망과 절망... 현대 중국 사회를 관찰할 때도 우리들은 그런 심플한 이항대립을 적용시킨다. 우리들의 단편적인 지식에 기초해 상상한다면, 농민공이란 중공에서는 원리적으로 존재할 리 없는 무권리상태의 프롤레타리아이고, 그렇게 된 이상 그들의 표정은 어둡고 슬픔에 가득 찬 절망적인 분노를 자아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 우리들은 그들이 딱히 어둡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으며, 반권력적인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책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확실히 현대 중국의 계층격차와 사회적 불공정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그것을 '고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발하고자 한다면 그 자격이 있는 자는 차별과 수탈의 피해자로서 위와 같은 농민공들이어야만 한다. 그래도 그들은 수입이 줄었을 때 '푸념' 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부정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 로까지는 승화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까 하는 경제적 사정이 상당히 절박하기 때문에 슬픔이나 분노같은 인간적 감정을 품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것만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런 감정을 가져도 좋을 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감정 낭비를 자제한다. 그런 것이 혹 농민공의 리얼리즘일 지도 모른다.
저자가 처음으로 농민공이라는 역사적 존재를 목격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광저우나 북경, 상해 같은 대도시의 터미널 역 앞 광장에 펼쳐진 풍경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언제가 되었든 광장은 거기에 앉아 있는 농민공들로 파묻혀 있었다. 그들의 태반은 어쩔 도리가 없이 그저 도시로 나왔다. 그러나 숙박비가 없다. (...) 그래서 농민공들은 일을 찾을 때까지 지붕도 없이 바람 부는, 차가운 돌이 깔린 역 앞 광장에서 헐렁한 가방을 베개 삼아 며칠 동안이나 지낸다. 그리고 광장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치 서로 미리 짠 것처럼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스포츠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재킷 차림 그대로 공사현장에서 곡괭이를 걸머멘 채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당연히 재킷은 모두 구깃구깃한 채로 더럽혀져서, 찢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251~2쪽)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책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현금 수입이 필요해 어떻게든 대도시로 나와서 일단 역전 광장에 노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면 나도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요청받은 듯이 단벌 재킷을 입고 있는 현실은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 어째서 작업용으로 쓸 '더러워져도 좋은 옷' 을 준비해두지 못했나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중국 농민 현실에 대한 나의 무지를 폭로하고 있다('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을 나는 비웃을 수 없다). 재킷을 입은 홈리스 노동자라는 모순된 외견은 '시골에서 도시로 진출하는 그들의 긴장감' 과 '그 재킷밖에 입을 게 없다' 라는 절망적인 빈곤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기억할 수도 없고, 회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는, 그것이 '농민공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정말이지 귀중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저자는 그때 본 농민공의 모습을 통해 중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재킷, 무표정, 무언, 땅바닥에 앉거나 누워 있는 모습,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 한다, 다시말해 여기서 이렇게 하는 수밖에는 우리들이 살아갈 도리가 없다라는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252쪽)
저자는 그런 '기운을 발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해에서 시작해 중국 각지에서 취재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취재' 라고 하는 것으로 읽어도 좋을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한 가지는 그것이 동일 인물에 대해 장기간에 걸친 것이기도 하고(긴 것은 10년을 넘는다), 다른 한 가지는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행한 관계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라는 관계를 넘어선 개인적인 교분이 되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쪽이든 현재 일본의 저널리즘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취재방식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대상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객관성을 잃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예외적인 '가까운 거리' 취재법을 성립시키기 위해 저자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높이 산다. 긴 시간에 걸쳐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취재 대상에 밀착한 스타일을 현대 저널리즘은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투박하지만 튼실한 스타일은 저널리즘이 반드시 사수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가 현대 중국의 시민 생활에 대해 더욱 넓은 범위로 취재를 이어나가, 중국의 실상을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2020-06-30 19:13)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6/30_1913.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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