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와 밀리시아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7. 5. 11:29
미니애폴리스에서 시작한 인종차별과 공권력 남용에 저항하는 운동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한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진원지였던 미니애폴리스에서는 결국 경찰서가 해체되어 새로운 공안조직이 재건되었다. 그 정도까지 경찰 폭력에 대한 시민의 분노와 불신은 뿌리깊다.
원래대로라면 치안 회복의 책임을 져야 할 트럼프 대통령이 소란이라는 불에 기름을 붓고 있다. 항의자들에게 대화적인 자세를 취하기는 커녕, 데모의 배후에 테러 조직이 있다는 불확실한 정보를 SNS에 발언하고, FBI로부터 '그런 사실이 없다' 고 부정당했는데도 데모대 진압을 위해 연방군 투입도 불사한다는 강경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미군의 전 수뇌들이 차례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은 대통령을 "내가 아는 한 국민을 통합시키기보다 분단하려는 최초의 대통령이다" 라고 비판했고, 파월 전 국무장관도 "대통령은 헌법을 이탈하고 있다" 라며 가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일본에서는 자위대의 전 고관이 현직 총리의 정치 스탠스나 헌법 위반을 비판하는 일이 우선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 많은 일본인은 세계 어디를 가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렇지만 지금 동맹국인 미국에서는 '일본에서는 일어날 리 없는 일' 이 일어나고 있다. 어째서 그런 것이 미국에서는 일어나는가.
그것은 미 육군이 헌법상의 규정으로는 상비군이 아닌, 시민에 의해 편제된 의용군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에 써 놓은 그 규정이 지금도 살아있다.
합중국 헌법 8조 12항은 연방 의회에 '육군을 소집(raise) 하고 유지(support) 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지만, 거기에 중대한 조건을 붙이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한 회계연도의 승인은 2년을 넘는 기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미 육군은 필요가 있을 때마다 소집되는 것으로써, 상비군이 아니라고 합중국 헌법은 정해두고 있다(해군에 대해서 기한이 없는 것은, 아마 장기간 집중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범선을 운용하기 어려웠다는 기술적인 사정이 있었으리라).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은 국왕의 명령 한 마디에 주저하지 않고 동포였던 식민지 인민에게 총구를 돌렸다. 그 통한과 아픔을 건국의 아버지들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합중국 연방군에 대해서 '결코 시민을 향해 발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제 1원리로 해 둔 것이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직업군인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시민에게 총을 향하지 않는다' 라고 선서하게 하는 것보다, '무장한 시민처럼 연방군을 편제한다' 는 편이 확실했다. 그러므로 이후 100년 이상에 걸쳐 육군은 필요하다면 그만큼 소집에 응하는 무장 시민(militia) 에 의해 편성되어 왔다.
밀리시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인상적인 예를 하나 들겠다. 남북전쟁 당시 독일에서 이민온 요제프 바이데마이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라인신문> 이후의 마르크스-엥겔스주의 동지로서, 미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아메리카노동자동맹의 창립자였다. 그는 링컨의 노예해방이라는 대의에 찬동하여 독일 이민자들을 규합해 의용군을 조직, 북군 대령으로서 세인트루이스 공방전을 지휘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정치활동으로 복귀해 런던의 제 1인터내셔널과 제휴해 미국에서의 노동운동 조직화에 힘썼다.
바이데마이어에게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자립한 시민이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싸운다' 고 하는 이상은 아마 일본인에게는 곧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밀리시아 같은 것이 일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미군은 누가 봐도 상비군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렇지만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에 맡겨 둔 윤리적인 '결의' 는 아직 살아있다. 그러므로 군인들이 자신들은 '무장한 시민' 이지 '권력자의 사병' 이 아니라는 것을 때때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2020-07-05 09:24)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7/05_0924.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스비 사코(Oussouby SACKO) 선생에 부쳐 (0) 2020.08.03 <하나레이 베이>(2018) 영화평 (0) 2020.07.11 야마다 야스시 <호구지책의 비가> 서평 (우치다 타츠루) (0) 2020.07.05 시라이 사토시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서평 (우치다 타츠루) (4) 2020.06.14 한국 재생의 길 — 이것이 한국이 가야만 하는 길 (우치다 타츠루) (0) 20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