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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발언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치다 타츠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5. 21. 15:24
나의 독자라고 하는 젊은 분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트위터에서 어떤 정치학자의 트윗을 리트윗하자니 지인으로부터 '젊은이는 정치적 발언을 하지 마라. 당파적 발언을 하면 기분이 나쁠 사람도 있으니 그런 사람을 배려하라. 정치적 발언을 하려면 좀 더 공부 한 뒤에 하라' 는 나무람을 받았다는 듯하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조언을 구했기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 말씀입니다만, 직접 답장하기에 앞서 조금 원칙적인 것부터 확인해 두고자 합니다.
나는 언론의 자유를 소중히 하고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어떤 주제에 대해서라도 누구든지 자유롭게 발언하십시오 하는 입장입니다.
내가 발언의 자유를 소중히 하는 것은 '언론이 일어나는 장소의 판단력' 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는 한 장기적으로, 집단적으로는 언론의 장소에 의해 내려진 시시비비의 판정이 대체로 적절해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때 취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될 수 있는 한 장기간에 걸쳐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readable/audible 할 수 있는 언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긴 시간에 걸쳐 읽히고, 말로 전해지는 것처럼 발언함' '입장을 뛰어 넘어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도달함' 입니다. 내용의 진위나 적부는 내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언론의 장을 다스리는 집단적 예지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그런 판정을 내리기 쉬운 형태로 자신의 가설을 제시하는 것,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뿐입니다. '내 말은 옳다' 고 질리지도 않게 큰 소리로 떠들어도 의미는 거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정을 내리는 것은 '언론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장소'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 개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도 아니고, 내가 비판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도 아니예요. 시시비비의 판정은 집단적 영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옳다/녀석은 틀리다' 라는 것을 시끄럽게 내세울 여유가 있다면 자신이 하는 발언이 될 수 있는 한 긴 시간에 걸쳐 살아남아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게 하기 위한 공부를 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 해 알기 쉽게, 확실한 논거를 표하며, 무엇보다 반증 가능한 형태로 말한다. 마지막의 '반증 가능한 형태로' 라는 것이 언론의 장에서 언어를 전개해 나갈 때의 가장 중요한 규칙입니다.
증거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접근 가능한 것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꿈에서 봤다' 라든가 '요괴가 현몽했다' 라는 것이 얼마나 '진짜 같은' 말이라고 할 지라도 증거는 아닙니다. 언론이 자유롭게 통할 수 있는 장에 대한 경의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진위의 판정을 할 수 없는 것 (다시 생각해 볼 수 없는 것) 을 논거로 사용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나는 논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의 의견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에 대해 직접 '당신은 틀렸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의견에 찬동하거나 그 의견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만 두는 편이 좋습니다' 라고 설득하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습니다. 설득이라는 것은 상대의 지성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논쟁을 선호하는 사람은 실은 reader/audience의 지성이나 판단력을 믿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눈 앞에서 게거품을 물며 승패를 결정 짓지 않으면 논쟁하는 당사자들의 어느 쪽이 옳은가 너희들은 모를 테니 너희들을 대신해 판단해 주마... 라는 것이 논쟁의 전제에 존재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은 택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논쟁에 대해 자신들의 옥신각신을 듣고 보아주는 사람들의 지성을 낮게 설정했으니, 목소리를 높이고 속임수를 쓰고 거짓말을 하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자제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바른 의견' 이 승리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 어떤 '바르지 못한 것' 을 말하며 수단은 목적의 옳음을 정당화한다고 하는 이유가 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논쟁적으로 될 수록 사람은 지적으로 불성실해진다... 라는 게 나의 경험지입니다.
자유로운 언론의 장소가 내리는 판단력을 믿는다. 그러므로, 논쟁을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가 내 발언에 있어서의 기본 규칙입니다.
이상이 원칙적인 확인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상담 안건에 대해 내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누군가를 향해 '닥쳐' 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력은 믿고 있습니다만 장소의 판단력을 믿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론의 자유가 갖고 있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닥쳐' 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성이나 판단력은 상대보다 우수하다' 라는 것을 전제로 발언하고 있습니다. 혹은 정말로 그 사람이 지식량이나 논쟁력에 대해 당신보다 뛰어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언론의 장에 대해서는 플레이어 전원이 대등하게 사물과 현상의 시비를 판단할 수 있는 지성을 최대한 갖추고 있다고 하는 전제를 채용해야만 합니다.
당신을 꾸짖은 사람은 자신의 주관으로 당신의 지적 성숙을 지원할 속셈에서 교화적 선의에 기반해 그랬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화적 관계에 대해서 써서는 안 될 태도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나는 똑같은 의도로 그런 행동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내 조언은 여기까지입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0-05-17 13:59)
원제: 若者の質問へのご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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