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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 봉건제의 등장: 전 세계 중산층을 향한 경고』 서평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1. 21. 19:40

    by Joel Kotkin May 12, 2020

     

    조엘 코트킨 지음, 데라시타 다키로 옮김, 동양경제신보사 펴냄

     

    제목과 같은 신간의 서평을 동양경제온라인 측에서 의뢰하였으므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책 제목으로부터 두 가지 사항을 유추해낼 수 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봉건제’가 임박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부류가 중산층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필자가 얼마 전에 동양경제 지면상에서 소개한 바 있는 서적 『의식 깨인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기만한다』 와 문제의식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부가 극소수 부유층으로 집중되고, 테크자이언트가 국가의 위상을 차지하고, 좌와 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이 흥왕하며, 중산층이 몰락하고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등, 이 모든 의제들은 최근 미국에서 출판되는 서적이나 논문에 자주 등장하는 문자열이다. 그럼에도 설마 하니 ‘봉건제’까지 거론하는 용례는 처음 접한다. 과연 ‘신 봉건제’란 무엇인가?

     

    “신 봉건제는 오늘날 미국과 그 밖의 나라들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귀족 제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종래의 굴뚝 산업에서 벗어나는 흐름에 따라 세계의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계층화가 진행되면서 대중이 사회적 상승을 이룰 기회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 사회적 상승의 길이 좁아지고 있는 가운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liberal capitalism) 모델은 전 세계에서 매력을 잃고 있으며, 이에 새로운 교의가 여럿 등장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새로운 봉건제(neo-feudalism)라고 불러도 좋을 사상을 지지하는 교의이다.” (36)

     

    지금 전 세계의 부를 점유하다시피 하고 있는 이들은 테크자이언트 CEO들을 필두로 하는 ‘과두 지배자(oligarchs)’이다.

     

    “세계 인구의 상위 0.1%가 보유하고 있는 전 세계 부의 비중은 1978년에는 7%였는데, 2012년에는 22%까지 증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 2030년에는 상위 1% 부유층이 전 세계 부의 3분의 2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37)

     

    그리고 이 과두 지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맡고 있는 이들이 ‘식자층(clerisy)’ 이다. 중세 봉건제 시절 성직자가 맡았던 역할을 현대에는 학자, 언론에 등장하는 평론가 패널, 종교 지도자들이 수행하고 있다. 에마뉘엘 시에예스(1748~1836 - 옮긴이)의 구분을 빌리자면, 그들이 제1신분과 제2신분에 해당한다. 그리고 일찍이 프랑스 혁명의 주체였던 제3신분 즉 ‘평민들’이 현대에는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으로 양분된다. 이 책은 이 ‘평민들’에게 ‘모두 들고 일어나 과두 지배에 투쟁하라’고 호소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런데 갑자기 서평의 결론을 밝히게 되어 면목이 없지만서도, 분명히 이 책에는 과두 지배란 것의 현상에 관해서는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평민들’이 어떻게 운동을 조직하여, 어떠한 강령 아래 연대하여 투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제언을 하지 않는다. 물론 ‘혁명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알아보려 경제경영서를 손에 드는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그것이 이 책의 흠이라고는 할 수 없다. 대신에 저자는 앞으로 어떤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지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풍부한 상상력을 우리를 위해 구사하여 주고 있다.

     

     

    영미권 작가들 중에는 디스토피아를 상세히 묘사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이 종종 나타난다.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1984>)이 그 대표격이다. 기술의 폭주적 진화에 의해 세상이 쑥대밭이 되고 인류가 미개 상태로 퇴화하는 ‘디스토피아 SF’ 장르는 미국인의 독무대이다. 필자가 보건대 ‘디스토피아가 된 미국’을 그린 SF영화가 100개는 넘는다.

     

    어찌하여 미국인은 디스토피아 서사를 이리도 선호하는 걸까? 이에 대해 필자가 세우고 있는 가설이 하나 있다. ‘디스토피아를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바로 그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저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미국인은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국에 핵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망하는 서사를 지난 80년 간 수백 번이나 반복해왔는데, 실제로 핵전쟁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의 저자 조엘 코트킨 역시 오랜 기간동안 영미권에서 지속된 특유한 믿음을 교육받고 자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니만큼 ‘디스토피아의 실상’을 묘사하는 데에는 대단히 열정적이면서도 ‘어떻게 혁명을 시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만한 지적 자원을 할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다.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는 것’ 자체가 ‘디스토피아 저지 투쟁’ 차원에서 지극히 효과적인 형식이라는 것을 미국인들이 널리 믿고 있으니만큼 이런 서술 방식이 채택된 것이리라.

     

    따라서 이 책은 현대 자본주의의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집요하게 (그리고 비체계적으로) 그리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담론이 심화된다든가, 앞문단의 서술을 바탕으로 나중에 생각지도 못한 가설이 전개되는 일은 이 책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대체로 비슷하게 쓰여져 있다. 그 대신에, 이 책은 임의의 순서로 읽어도 상관 없다. 팔락팔락 아무 쪽이나 펼쳤는데 거기에 놀랄 만한 내용이 쓰여져 있다면 거기에 빨간줄을 긋고서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 아마도 독자가 그렇게 읽어 주기를 저자 자신이 바라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는 사항이 세 가지 있다. 하나는 양극화의 심화, 하나는 민주주의의 위기, 마지막으로 ‘브라만 좌파’에 의한 여론 지배이다. 이에 코트킨의 주장을 차례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양극화의 심화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2018년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기술 업계 4개 회사(애플, 아마존, 알파벳[구글], 페이스북)의 순자산 총계는 (...) 프랑스의 국내총생산[GDP]에 필적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자산 가치가 높은 기업 10개 가운데 7개 회사가 기술 업계에 속해 있다. 테크자이언트라고도 불리는 거대 기술 기업은 어마어마한 개인 자산을 낳게 되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20명 가운데 8명은 기술 업계에서 재산을 쌓게 된 사람들이다. 40세 이하 부자 13명 가운데 9명이 기술 업계 인간일 뿐만 아니라, 그 아홉 명 모두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75)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한 명도 빠짐 없이 캘리포니아 사람일 줄이야. 그리고, 이러한 승자 독식은 고용 축소를 불러일으킨다.

     

    “기술 주도 사회에서는 과학이나 공학에 뛰어난 『선민』과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10억 불 규모의 기업을 일으키고자 염두에 둔다면 그 인적 구성 요소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자, 고도 금융 전문가, 마케팅 ‘천재’ 등으로 이루어진 극히 소수의 집단으로 충분하며, 육체 노동자나 중간관리자는 크게 필요치 않다.” (68~9)

     

    디지털 기업의 창업자를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많은 창업자들은 『무서우리만치 재능이 뛰어난 몇 사람 내지는 독창적인 인재가 점점 더 경제적 부의 많은 비중을 창출해내는 경향이 있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단기적이고 임시적인 계약을 떠맡는 “긱[Gig] 워크”로 수입을 얻는 한편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85)

     

    ‘분리수거물’이 된 노동자들은 당연히 가난해진다.

     

    “캘리포니아 주의 특징은 이제 더 이상 옛날같은 유동성(사회적 상승)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계층화가 되었다. (…)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주의 빈곤율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다. (…) 캘리포니아 가정의 3분의 1가량은 가까스레 청구서를 지불하는 상태임이 밝혀졌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민 가운데 800만 명(아동 200만 명 포함)이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98)

     

    캘리포니아 대중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실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구글 같은 기업에서 근무하는 하류 계급이나 중류 계급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캠핑 카를 주차장에 세워 놓고 생활하고 있으며, 차 안에서 묵는 자도 있다. 실리콘밸리에는 미국 최대 규모의 뜨내기 전용 야영지가 있다.” (102)

     

    “미국의 플랫폼 노동자 가운데 30대 후반부터 40(가정을 이루는 데 적령기에 든 인구집단)에 해당하는 이들 중 3분의 2가 생활비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 플랫폼 노동자의 태반이 빈곤선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200)

     

    그런데, 이러한 양극화의 심화를 ‘과두 지배자들’은 좌시하지 않고 있다. 과도한 경제적 궁핍화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쇠사슬 말고는 더는 잃을 게 없도다’ 하는 자포자기에 이르게 하는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할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술 업계에 속하는 거물들 중 상당수는 과거의 실업계 실력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복지 국가의 확충을 기본적으로 지지한다” (85)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오늘날의 테크자이언트들은 ‘도금 시대’ 부호들처럼 잔인한 수전노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의 생활을 보살피고, 기후변화나 인권, 젠더에 관해서도 ‘전향적’임을 나타낸다. 주주에게 더 많이 배당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국민의 의식이나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것”(169)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은 이전날의 계몽 전제 군주와도 같이 ‘문명적’인 것이다.

     

     

    “현대판 비즈니스 리더들의 이러한 경향은 그들 과두 지배층으로 하여금 문화계 엘리트(변호사, 학자, 언론인 등)와의 야합을 이끌어낸다.” (170)

     

    이리하여 ‘예술가와 과학자’ 사이의 협력이 성립된다. 테크 올리가르히와 식자층에 의한 세계 지배 곧 ‘신 봉건제’가 대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모델의 이름은 과두제 사회주의(oligarchical socialism)라고 부르는 게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교의 아래에서 이루어질 자원의 분배는 노동자 계급 그리고 쇠퇴하고 있는 중산층의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켜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델에서 사회적 상승의 유인 동기가 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과두 세력의 지배를 위협하는 요소 또한 없을 것이다.” (86)

     

    과두 지배자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책을 현행 국민국가 정부보다도 효율적으로 실행시킬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개인 자산 규모가 버젓한 국민 국가의 GDP를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 로즈(Carl Rhodes)가 쓴 『의식 깨인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기만한다』 역시 동일한 지적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반 시민이 합법적으로 자신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정책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라야 한다. 정당이나 노동조합, 시민 운동을 조직한다. 의회에 대표를 보낸다. 법률을 제정한다. 이윽고 정부로 하여금 그들의 요구사항을 이행케 한다. 수고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문명적인’ 과두 지배자에게 간원하여 그들이 윤허해 주면 정책은 곧장 실현된다. 그때가 와도 민주주의 원칙과 같은 성가신 것들이 과연 필요할까?

     

    현명한 독재자가 평민의 요구를 실현시켜준다면 민주주의는 필요치 않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등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때마침 테크자이언트들은 ‘비교적 현명한 독재자’처럼 보인다. 천하태평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명백히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은 이제 미국에서는 드물지 않다. 필자는 얼마 전에 「세상은 AI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라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빅테크 기업은 그들이 창조해낸 디지털 영역에서만큼은 사실상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주체로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이 논문의 저자는 받아들이고 있다. (Foreign Affairs Report, No.10, 2023, p.47)

     

    기업만이 자신들이 개발해 낸 기술이 어떤 물건이며 무엇에 쓰이는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들의 기술이 군사 용도로 바뀌어 지정학적 관계를 단숨에 바꿔버릴 수도 있다. 완벽한 국민 감시 기술을 구축할 수도 있다. 대규모 고용 축소를 초래할 위협이 상존하는 한, 테크자이언트는 ‘기존의 주권 개념을 초월한’ 존재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만약 향후에 AI를 규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정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각국 정부 대표와 함께 각 기업의 CEO들을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런 날이 오면 테크자이언트는 이제 어엿하게 국민 국가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 정치외교적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민주주의는 기술의 진화로 인하여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무력화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축이 지적 엘리트들이다. 그들은 이제 ‘세계 통제관(World Controllers)’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개념) 역할을 맡게 된다. “교사, 컨설턴트, 변호사, 정부 관계자, 의료계 종사자 등 물질적 생산 이외의 직역에 종사하는 근로자”(111)가 여론의 형성에 깊이 관여한다. 말하자면 중세 시절 가톨릭 성직자들과도 같이 그들은 과두 지배 체제에 있어서 ‘정당성 부여자’로서의 소임을 맡는 것이다.

     

    저자 조엘 코트킨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브라만 좌파’라고 이름 붙인 이러한 ‘식자층’들은 특히 대학을 중심으로 작당하고 있으며 아닌 게 아니라 젊은이들을 세뇌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에 ‘리버럴’ 또는 ‘극좌’라고 스스로 인정한 교수의 비율은 전체의 42%였다. 2014년에 이르면 이 비율은 60%대까지 치솟는다. 몇 년 뒤에 상위 대학 51개 학교를 조사해 보니 교수들 중 리버럴과 보수의 비율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81, 상황에 따라서는 701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컬럼비아, UCB 등 국가의 동량지재를 다수 배출해내는 명문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진 가운데 보수파를 자청하는 이들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129~130)

     

    놀라 까무러칠 만한 수치이다. 만약 이 자료들이 참이라면 미국 학계는 ‘특정 이념의 주입을 위한 재교육 캠프나 진배없는 장소’이며, “대학은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지식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닌, 미친 듯이 복음을 전파하는, 가짜 설교자로서의 활동가를 재생산해내고 있다” (131) 는 저자의 지적은 타당할 것이다.

     

    코트킨에 따르면 그 결과 대학생들은 이제 더 이상 고전을 읽지 않고,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며, 비판 정신을 잃고, 집권 세력을 추종하고, 언론 자유의 제약조차 받아들이는 경향이 커졌다고 한다. (134)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를 꺼려하면서 압제적인 정치 체제에 다가서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확실히 지금 필자처럼 서평을 하는 입장에 있어서도, 현대 정치 문화를 드러내는 어떤 하나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일본도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본다. “소수자에게 불쾌함을 줄 가능성이 있는 미디어를 규제하는 데에 밀레니얼 세대의 약 40%가 찬성” (134) 한다는 것이 그 일례다.

     

    특히 ‘환경 보호주의’ 를 제창하는 젊은이들은 반론에 굉장히 비관용적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과두 지배자들은 이러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친화적인 자세를 보인다. 말하자면 환경 보호주의를 놓고 보면 현세 지배자와 지적 엘리트 예비군에 속하는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격한 환경 보호주의가 점차로 대세가 되어감에 따라 감정적, 경제적 여타 지출을 감내할 것이 특히 저소득층에게 강요되고 있다. ‘환경을 파괴하는 라이프 스타일’ (이를테면 내연기관차를 이동수단으로 하는 등) 을 취할 수밖에 없는 중산층이나 노동자 계급이 그러하다.

     

    현대 지적 엘리트들은 이제 ‘못 배운’ 노동자들과 연대하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와 동반 지식인*들 사이에 구축되어 왔던 ‘150년 이상에 걸친 연대가 막을 내렸다’. 즉 계급 투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급 투쟁을 통한 자원의 분배보다도 효율적이면서도 공정한 분배 방법을 과두 지배자와 식자층이 설계하여 주는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 동반자 작가: 공산주의 운동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에 동조적인 경향의 작품을 쓰는 작가. 1921년경 소비에트 문학이 발생한 때로부터 27년 신경제 정책이 끝나기까지의 사이에 소련 문단의 주류(主流)를 이룬 당원(黨員)이 아닌 인텔리겐치아의 문학.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에 공명하나 직접 참가하지는 않고 그에 동조하던 작가들의 문학임. 우리나라에서는 카프(KAPF)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에 동조한 작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며, 유진오·이효석·채만식 등이 이에 속함. - 옮긴이)

     

    테크 올리가르히와 브라만 좌파가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있는 미래 사회는 아마 “많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미래” (262)가 될 것으로 코트킨은 예측한다. 경제적 영역에서의 승자 독식, 도시 집중화, 가족의 존재 의미 약화, 사회적 유동성 상실 등이 일어나며, 정책 입안과 관련해서는 엘리트들이 이를 독점하면서 종래의 민의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쉽게 설명하자면 예컨대 기후 변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시민 생활에 ‘전시 체제’를 방불케 하는 마른 수건 쥐어짜기 식으로 생활상의 불이익과 제약을 요구하게 될 터인데, 이러한 이례적인 일들이 실현되려면 정치 체제가 권위적이여야만 한다. 코트킨에 따르면, “문제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민중의 의견을 무시해버리는 엘리트 주도의 해결책이 필요하게 된다” 는 “과두제의 철칙”은 이제 통치의 기본이 된다. (280)

     

     

    민주주의의 앞날에 참으로 절망적인 이야기들로만 가득하다. 과연 현대의 제3신분은 혁명의 기회를 쟁취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한 실용적인 지식은 이 책에서 아무것도 전달받을 수 없다.

     

    “오늘날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가게 되는 즉 제3신분의 향상심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주안점을 삼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284) 라고 코트킨은 밝힌다. 하지만 이건 “병이 났으면 최대한 건강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래서 결국 어찌하란 말인가?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가운데 마지막 쪽까지 이르렀는데 별안간 코트킨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필자를 아연실색케 했다.

     

    “일본은 설령 경제 성장이 둔화한다 하더라도 대신에 정신적인 면이나 생활의 질적 문제에 초점을 두는 고소득 국가의 전형이 될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일본이 앞으로 세계를 정복할 기미는 없어 보이지만*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일종의 아시아 속 스위스와 같은 존재가 될 법도 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 또한 있다.” (290)

    (*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군사적 측면보다는, 1970년대처럼 공업화와 엔화 약세 등을 바탕으로 서구 무역을 석권한다는 식의 맥락에서 언급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 – 옮긴이)

     

    못 할 말이 없다. 일본이 ‘신 봉건제’의 도래를 저지하는 교두보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데 대체 그 맥락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가.

     

    그래, 분명히 지금도 이미 세계 각국의 부유층들이 일본의 ‘정신적인 면’이나 안정된 치안, 미식 온천 스키를 즐기고자 일본을 찾고 있다. “여기는 완전히 극동의 스위스구먼” 하면서 그들은 만면에 화색을 띠고는 한다. 그런데 우리 일본인의 미래가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리조트 직원’ 으로서 ‘아시아의 스위스’의 위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건 상당히 불쾌하므로 사양하겠다.

     

    (2023-11-16 08:5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조삼모사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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