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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2인데, 고베에서 이상한 교수님을 봤습니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0. 19. 12:27간사이 지방으로 수학여행 온 고등학교 2학년 학생 200명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요청받았다. 일본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다. 오래 살아 본 인간인 필자로서는 할 얘기가 정말 많다. 기꺼이 수락했다.
하지만 고등학생들 입장에서는 기껏 재미난 수학여행이 한창인 와중에 (게다가 저녁밥 먹기 직전에) 낯선 남자가 하는 설교 따위는 안중에 없을 것이다. 상대방은 '들을 의사가 없다'. 나로서는 '옷깃을 붙잡고 싶을 정도로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 합의 형성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도 얕보면 곤란하다. 필자는 교단에 반 세기 가까이 서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 절대로 조는 일 없이 끝까지 얘기를 다 듣게 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별로 거창한 술책은 아니다. 사전에 준비를 해 갖고 가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석에서 생각해 낸 것이기에, 말이 유창하게 안 나온다. 때때로 말문이 막힌다. 하지만 이 침묵이야말로 청중을 끌어들이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거다.
결혼식에서 어떤 내빈이 축사를 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준비해 간 대사를 잊어버려서 머릿속이 새하얘진 나머지 우두커니 서 있게 되면, 식장에는 '징-' 하고 정적이 흐르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집중한다. 강연도 원리는 이와 같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 끊어진 사람이 단상에서 마이크를 쥐고 있노라면, 세상 말 안 듣는 고등학생일지언정 눈을 끔벅거리게 될 것이다.
필자가 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다. 고립을 두려워하지 말라. 따라 뛰지 말라. 속지 말고 자신의 직감을 따르라. 인간관계는 애초에 사랑과 공감 위에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 만사를 근원적으로 생각하라 등등. 하지만 필자가 했던 얘기 중에 학생들이 가장 분명한 반응을 보여줬던 건, '도와줘' 라는 시그널을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도와줘' 라는 조난 신호를 보낸 사람이 있다. 그대는 그것을 알아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눈치를 못 챈 성싶다. 시치미를 떼고서 지나간다. 하지만 자네에게는 '도와줘'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말은 즉, 자네가 '선택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라.
'도와줘' 에는 다양한 리믹스(원문 変奏 - 옮긴이)가 있다. 가장 캐주얼한 것에는 '이것 좀 해 주지 않을래?' 라는 문형이 있다. '이것 좀 해 주지 않을래?' 라는 말 역시 너무나 평범해서 많은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네만큼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를테면 '미안한데 문 좀 열어 줄래?' 라든가 '종이 끝부분 좀 잡고 있어 줄래?' 등의 극히 간단한 작업의 모양새를 띤다. 하지만, '네 그럴게요' 하고 나서부터야 '무언가'가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도와줘' 를 자네는 알아먹었으므로 이는 자네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기회였던 것이다.
'천직'과 만난다는 건 대개 이런 식으로 '이것 좀 해 주지 않을래?' 라는 말에 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할아버지가 살 만큼 살아보니 정말 그랬다.
자네들은 앞으로 세상을 살면서 무수한 '도와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도와줘' 라는 말이 어떤 식으로 찾아오게 될지는 여러분이 제각기 다르다. 그야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만 들어주기를 바라는 구조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 흘려버리지 마시라.
이렇게 얘기하고서 강연을 마쳤다. 고등학생들은 다들 눈이 뚱그래져가지고 필자를 쳐다보았다. 한 여학생이 대표로 필자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환한 표정으로 "앞으로 '도와달라'는 말을 놓치지 않을게요"라는 말을 건넸다.
(2023-10-14 17:5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조삼모사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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