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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거니까요 "학교 도서관" 질문 세션 (3/3)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0. 17. 14:52
(책과 미디어 등 자료 전반에 대한 질문입니다.
모든 자료가 신성성을 띠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판타지 문학을 읽는다 하더라도 지혜로워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과거의 지식과 ‘연결’되겠다는 의미에서는 논픽션・비문학 등 사실적인 텍스트가 쓰여진 도서를 읽는 게 아무래도 깊이 있는 독서 활동이 되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질문입니다.
또한 현재 학교 도서관은 학과의 탐구 학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 과정에서 도서관에서의 조사 활동이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조사를 목적으로 한 독서가 있는 반면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자 하는 독서도 학교 도서관에서는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종이 독서 센터와 영화 등 미디어 센터 사이의 균형이라고나 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절충해야 좋을지도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부쩍 늘고 있는 디지털 자료와의 안배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기꺼이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책만 앞에 두었다 하면 숨이 턱 막히는 친구도 학교 도서관 실무에서는 곧잘 있으므로, 이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지 등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판타지냐 논픽션이냐 하는 장르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책이든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좁고 자그마한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고서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겁니다. 어린이들은 상당히 고집이 셉니다. 자신의 연령이 되었든 성별이 되었든 자신이 귀속해 있는 집단의 문화가 되었든, 그런 종류의 ‘감옥’ 안에서 빠져나오기가 꽤 어렵습니다. 이를 해제시켜 ‘감옥’ 바깥으로 구출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머나먼 나라의, 머나먼 시대의, 연령도, 성별도, 종교도, 생활 문화도 완전히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신체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구속[呪縛]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으로는 그게 가장 잘 듣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소설, 판타지 물론 비문학도 좋습니다. 논픽션을 예로 들면, 실제로 리얼한 인물이 등장해서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이므로, 그 리얼한 타자 속에 상상적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몸이 되어 세상을 경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제 개인적인 독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0세 무렵의 일입니다. 그때까지는 만화밖에 안 읽는 아이였지요. 저희 아버지는 교양을 중시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소년소녀 세계문학 전집』 을 집에 들이게 되었고, 그걸 읽혔습니다. 매월 한 권씩 집에 책이 도착합니다. 처음에는 책을 읽는 습관이 들지 않아서 속도가 느렸습니다. 상당히 지루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부모님이 읽으라고 명령하시기에 꾸역꾸역 읽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이 꼬박 지나도 한 권을 채 읽을 수조차 없습니다. 미처 다 못 읽었는데도 다음 책이 도착하니까 못 읽은 책이 점점 쌓여갑니다. 그럼에도 고새 책 읽는 게 익숙해지고 속도도 빨라져서 책을 읽는다는 게 점점 즐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이라는 책이 도착했습니다. 읽었는데, 난생 처음으로 1860년대의 뉴잉글랜드에 사는 4인 자매 가족에 속한 여자아이 안에 상상적으로 스며들어가서 여자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을 한 겁니다. 조에게 감정이입하여, 소녀가 되어 세상을 보는 경험을 했을 때, 제 내면에서 무언가 전구가 켜졌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키다리 아저씨> <빨간머리 앤> <사랑의 요정> <알프스 소녀 하이디> <소공녀> 등을 읽고는 소녀의 몸이 되어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이 너무나 재미나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소녀들이 읽는 순정만화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순정만화를 아예 못 읽겠다는 사람들이 어지간히 있습니다. 소년만화는 환히 꿰면서 엄청스레 읽어대는데도, 순정만화는 안 읽습니다. 칸 분할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고, 대사도 너무 복잡해서 못 읽겠다는 겁니다. 저는 보기 드문 ‘순정만화 읽는 남자’ 입니다. 정말 소수에 해당됩니다. 스즈키 쇼(1952~. 무용평론가. 무용사가. 번역가 - 옮긴이) 씨와 예전에 “순정만화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어린이 시절에 소녀 소설을 읽고서 여자아이가 되어 본 경험의 여부 차이가 크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스즈키 씨도 저와 마찬가지로 소녀의 몸이 될 수 있는 사람인 겁니다.
올해 여름 <다 빈치> 지(誌)에 야마기시 료코 특집(2023년 9월)이 실렸습니다. 저한테 야마기시 료코 선생의 만화가 어째서 이렇게 무서운가를 써달라는 청탁을 해 오더군요. 그러고 난 뒤 문춘에서도 문고화를 맞아 제게 해설을 써달라고도 했습니다. 남자면서도 소녀들이 읽는 만화책에 해설문을 써서 싣는 사람은 적습니다. 저는 그럴 수 있는 소수파 사람입니다.
제가 기고했던 에세이 바로 윗칸의 저자는 이와이 시마코 씨였는데, 이와이 씨가 야마기시 선생의 가장 무서운 작품으로 꼽은 게 공교롭게도 저랑 똑같았습니다.* 제가 하나 덧붙이기는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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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人唐草』 『汐の声』
** 『わたしの人形は良い人形』
소녀용 만화를 읽을 수 있게 됐단 건 내놓고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건 어린이 시절에 소녀 소설을 조기교육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여자아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굉장히 즐거운 일이라는 각인이 애초에 되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여성이 쓴 작품을 수월히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저는 훗날 문학이 아닌 철학을 전문분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근데 철학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역시 철학자 속에 상상적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런 개념을 필사적으로 풀어 쓰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건데요. 그러는 사이에 ‘아 그렇구나. 이런 말을 하려고 했구나’ 하고 웬일인지 알게 됩니다. 자신의 선입관을 내려놓고, 타인 속에 들어가보지 않으면, 철학서는 그냥 어렵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철학은 문학서를 읽는 것처럼 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말투는 비교적 딱딱하지만, 실제로는 철학자 역시 ‘이것만큼은 내가 꼭 말해야만 눈 감을 수 있겠다’ 라는, 억누를 수 없는 정념이 있기 때문에 철학서를 쓰는 것입니다. 그 감정은 소설가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르는 상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머나먼 나라의, 머나먼 시대의, 현재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 속에 틈입해보는 경험은 매우 중요하기도 하거니와, 굉장히 유쾌하고 근사한 일이라는 점을, 부디 우리 아이들에게 힘주어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덜미를 붙잡고서 “야 됐고, 책 읽어!” 하는 겁니다(웃음).
출처: http://blog.tatsuru.com/2023/09/09_0927.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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