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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적 사고」에 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 20. 19:36
박동섭 선생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도서출판 유유’에서 낼 책에 실을 질의응답 가운데 하나다.
ー 우치다 선생님이 쓰셨던 『무도적 사고(지쿠마 문고)』 『무도론: 이제부터 갖춰나갈 심신의 자세(가와데 쇼보)』 『내 신체는 머리가 좋다(문춘문고)』 같은 책들을 참말로 흥미롭게, 삼가 읽었사옵니다.
이렇게나 기막힌 논고를 저 혼자만 읽기가 아까운 나머지,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무도적 사고의 참모습’을 한국 독자들에게도 꼭 선보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출판사에 번역 출간 제안을 해봤습니다. 근데 상대측은 ‘「무도적 사고」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라며 단번에 거절해 버리더군요. 아무래도 한국인들한테는 ‘무도적 사고’라는 개념이 익숙지 않아서 그랬을 겁니다.
이 일화를 기화(奇貨)*로 삼아 한국 독자에게 ‘무도적 사고의 진수’에 관해 부디 가르쳐 주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나아가, ‘무도적 사고’가 선생님 삶의 태도에 미쳤던 영향에 대해서도 들려주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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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奇貨; ① 진기한 보배. ②(일본어) 써먹기만 하면 엄청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는 기회나 사물 ③(한국어) 《‘-을 / 를 기화로’의 꼴로 쓰이어 》 나쁘게 이용하는 어떠한 기회. - 옮긴이)
어이쿠, 그러셨습니까? 한국에선 ‘무도적 사고’란 말이 일상 어휘로 등록되어 있지 않단 말이죠? 옳다거니. 과연 그렇겠습니다. 일본의 무도는 종교적인 것과 관계가 깊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우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판국이 되어놨으니만큼, 이 기회에 일본식 무도가 가지고 있다 하는 그 ‘정신성’에 관해 적이 해설해 드릴까 합니다.
일본 무도가 띠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무도적 술책[術]과 솜씨[技]*를 향상하는 것, 그리고 종교적으로 성숙하는 일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가설을 채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지 않나 합니다. 다시 말해, 무도 기량이 향상되어 가면, 종교적인 깊이를 획득합니다. 역으로, 종교적인 수행을 쌓으면, 무도의 솜씨가 향상됩니다. 이 두 사태가 한 인간적 성장을 두 갈래로 나타낸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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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술기術技라는 말은, 한국어 사전에 없고, 다만 이유 불명으로 의료계 등지에서 제한적으로 쓰이는 말. 일본어에서도 역시 사전에 없는 말이며, 말하자면 ‘術’자와 ‘技’자를 합하여 부르는 개념에 가까움. – 옮긴이)
스포츠일 경우에는 이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수준 높은 기량을 달성하는 운동선수는 일반적으로 자제력이 강하고, 감정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그다지 없으며, 정치 이념이 되었든 신앙이 되었든, 거기에 그다지 빠져들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말인즉슨,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대인관계의 불상사’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남들과 다툰다든지, 비판한다든지 비판을 받는다든지, 원한을 품는다든지 원한을 산다든지 할 위험성을 적절히 피해 갈 수 있는 운동선수는 쉬이 감정적으로 남한테 소리를 지른다든지, 정치 이념이나 사교(邪敎)를 선포한다든지 하는 운동선수보다는 높은 기량을 발휘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곧바로 전언(前言) 철회(撤回)해 버리는 것도 면목 없지만, 그런 ‘시민적인 억제’가 신체적 기량 발휘에 가점 요소가 된다는 식의 얘기가 스포츠 세계에서 반드시 상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천재적인 운동선수 중에서는 시민적인 상식을 사뿐히 무시하는 ‘파격적’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자기는 예외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평범하지 않다’라는 점을 과시하는 행위는 운동선수만이 아니고 배우나 음악가들 가운데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 그저 그런 인간 아냐’라는 식의 인상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그저 그렇지 않은 자기’를 조형해 나갑니다.
데뷔 직후의 비틀스나, 소니 리스턴과의 매치전을 앞둔 캐시어스 클레이*의 인터뷰 영상을 보다 보면 그들이 ‘우리는 세상의 상식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점을 표명하려고 필사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먹힐 것이라고 직감하니 그러는 것입니다. ‘터무니없이 제멋대로인 태도’를 취했는데, 정작 실패해버리면 정신없이 쥐어 터질 게 분명합니다. 따라서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내몰아서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달성합니다. 이런 심리는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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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하마드 알리 – 옮긴이)
따라서 스포츠에서는 모든 운동선수에게 ‘신사로 처신해야 한다*’, ‘시민적으로 성숙하여라’, ‘종교적 깊이를 추구하라’는 건 사실 안 해도 될 말입니다. 물론 운동선수 가운데에서도 품위 있는 사람, ‘성숙한 어른’, 독실한 신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었으니 운동선수로서 대성했다’라는 식의 상관관계를 찾는 일은 보통은 안 합니다. 그저 ‘반려견을 아낀다’ ‘요리를 잘한다’와 같은 개인적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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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야구단을 1934년에 창단하고 또한 구단주를 지냈던 쇼리키 마쓰다로가 선수들에게 항상 타의 모범이 되라는 뜻에서 남긴 어록. “巨人軍は常に紳士たれ”. - 옮긴이)
무도는 그 점이 다릅니다. 무도에서는 솜씨의 향상과 종교적 성숙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솜씨가 익어가면 무도가는 반드시 종교적인 깊이를 획득합니다. 종교 수업을 쌓으면 무예 솜씨가 몰라볼 정도로 진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완전한 상관관계가 상정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일본 무도에서만 볼 수 있는 ‘민족지(民族誌; ethnography - 옮긴이)적 치우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경향이 이슬람 신비 교파인 수피주의에서도 관찰된다는 점을, 일본인 이슬람 연구자 야마모토 나오키 씨가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과 터키의 경우에만 그런 거라면 ‘세계 표준’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일본의 무도가치고 숙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다쿠앙 선사(禪師)의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병법자는 승부를 다투지 아니하고 강약에 매달리지 아니하며 일보(一步) 진(振)하지 않고 일보 퇴하지 않으며 적은 아(我)를 아니 보고 아는 적(敵)을 아니 볼 새, 천지 미분 음양 부도(不到)의 단에 처해 곧바로 공을 이뤄야 마땅하도다.”
현대어로 옮기면 이런 뜻이 됩니다. “무도가는 승부를 다투지 않는다. 강약을 겨루지 않는다. 한 발짝 나아가지도 않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적은 나를 보지 않으며, 나도 적을 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천지가 아직 나뉘지 아니하고, 음양 또한 갈리지 아니한 연고로 하여, 즉각 그곳에서 이룰 일을 이룬다”.
다쿠앙 선사(禪師)는 에도 시대 초기에 활동했던 선종 승려입니다. 『부동지신묘론[不動智神妙論]』을 남겼으며 야규 신카게류 계승자, 야규 무네노리*에게 무도의 요체를 설한 인물입니다. 위의 글은 다쿠앙 선사의 『태아기[太阿記]』에 등장하는데, 이 또한 검객을 상대로 무도의 진수를 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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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1~1646.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종군했다. 무네노리는 2대 쇼군에게 검술을 지도했다. - 옮긴이)
다쿠앙 자신은 무도가가 아닙니다. 선승입니다. 그럼에도 선종의 묘법(원문 오의奧義 - 옮긴이)은 검도의 묘법과 상통한다는 점을 두고서, 당대의 종교가와 무도가 사이에는 완전한 합의가 있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집* 제거하기’를 주안점으로 둔다는 것입니다. “승패를 다투”고, “강약을 겨루”며, “교졸(巧拙)을 논” 한다는 것 모두,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상대적인 우열을 비교하는 셈인데, 일본의 종교와 무도는 이러한 ‘상대적인 우열을 비교하는 마인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점을 수행상의 목표로 표방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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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집 ② [불교] 심신(心身) 중에 사물을 주재하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집착. / 소아小我 ② [불교] 진실도 없고 자재(自在)도 없이, 개인적인 욕망과 망집에 사로잡힌 나. - 옮긴이)
이상한 이야기이기는 하되, ‘이기고자 하면 패배한다’ ‘세지고자 하면 약해진다’ ‘잘하고자 하면 실수한다’라는 역설을, 어지간한 수행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걸림돌은 ‘자아’, ‘주체’, ‘아이덴티티’ 같은 것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타(他)와 비교하여 ‘승자’라느니 ‘강자’라느니 ‘고수’라느니를 잰다고 함이 곧 ‘아집’이며, 이게 있는 한 수행도를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모두를 내던져 버려야 마땅합니다.
앞서 ‘논파’를 주제로 한 글에서 밝혔기에 다시금 돌이키게 되는바, ‘이긴다’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기면 그게 ‘성공 체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공 체험에 ‘눌러앉습니다’. ‘성공했던 패턴’을 반복하려 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겼다는 사실에 희희낙락하는 인간은, 그 이긴 시점의 자신과 헤어지는 데에 엄청난 심리적 저항을 느끼게 됩니다.
모진 논쟁을 벌이며 논적을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논파하게 되고 났는데, 자신의 이론에 잘못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면, 매우 난처해집니다. 논쟁에서의 승리가 화려했으면 화려했을수록 ‘죄송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사과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더는 주워 담을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논쟁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의 이론에 결함이 있었음을 자각할 기회’를 무의식간에 회피하게 됩니다. 무의식간에 그러는 것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알아채서 그것을 즉각 정정하는 이외에, 학술적 지성이 진보할 기회는 없습니다. ‘논파하는 사람’은 그 찬스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무도 수행은, 학술에서 말하는 ‘가설 고쳐쓰기’와 구조적으로 같습니다. 연속적인 자기쇄신입니다. 어제까지의 자기와는 다른 자신이 되는 것, 어제까지와는 다른 마음과 몸 사용방법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하지만 시합에서 이긴다든지 남보다 세지려고 의식하면, 그 자기쇄신이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일보(一步) 진(振)하지 않고 일보 퇴하지 않으며 적은 아(我)를 아니 보고 아는 적(敵)을 아니 보”는 경지에 이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우열에 개의치 않는 것이죠. 그리고서 “천지 미분, 음양 부도(不到)의 단”에 처합니다. 말은 어려워도 “아직 기호적으로 분절되지 않은 세계, 아직 어떤 가치 시스템에 의해 질서 지어지지 않은, amorphous(무정형 – 옮긴이) 한, 성운 상태의 마음 상태”에 선다는 뜻입니다. 그곳에서 이룰 것을 이룹니다.
“곧바로 공을 이뤄야 마땅하리라”에서 ‘공을 이룬다’라는 건 곧 ‘훌륭한 성과를 거둔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곳은 “곧바로[直ちに]”라는 부사입니다. ‘곧바로’라는 말은 ‘거의 동시에’를 뜻합니다.
‘무엇이 옳은가,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가’ 따위의 젠체를 모조리 물리치고서, 무심히 대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무심의 경지’를 무도는 신중하게 받아들입니다. 무도적 상황에서는 보통 상대가 자신을 향해 공격을 가해온다고 설정되어 있습니다. 멍하니 있다가는 살상당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때 ‘적(敵)을 보고’ 그 공격에 예측을 세워 그 ‘최적해(optimal solution - 옮긴이)’로 말미암아 대응하는 스킴(계획 - 옮긴이)으로 하면 늦습니다. 필패합니다. ‘곧바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움직여야만 합니다.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는’ 게 아니라, ‘뜻밖에 어떤 게 하고 싶어집니다’. ‘뜻밖에’라는 말이 ‘곧바로’라는 뜻입니다. 무(無) 문맥적, 이라는 겁니다.
일본에 제이아르라는 철도 회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관광포스터를 제작했는데 빼어난 광고 문안을 채용한 바 있습니다. “아 맞다, 교토에 가보자”. 하도 잘 만든 카피인지라 몇 년이 지나도록 계속 쓰이고 있는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덕분에 손님이 끊이지 않아서 그랬겠죠?
이 광고 문안에 나오는 “아 맞다”는 ‘무심’, ‘무 문맥’을 이릅니다. 이래저래 여행 갈 곳을 생각해서, 자료를 끌어모으고, 일정을 생각한 결과, ‘이렇게 된 이상 최적해인 교토에 가는 거야’가 아닙니다. 길을 걷다가, 혹은 식사를 하면서, 아니면 일손을 잠시 멈췄을 때, 문득 “아 맞다, 교토에 가보자”라는 결심이 섰습니다. 이게 무도 용어로 이른바 ‘기(機)’*라는 것하고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전단(前段)이 없습니다. 느닷없이 생기(生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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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機: 속된 말로,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타이밍을 본다는 뜻 – 옮긴이)
무도적인 ‘무심’, ‘무 문맥적’인 움직임이란 바로 이를 뜻합니다. 불시에 어떤 동작이 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공격에 대한 최적 대응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입니다. 그걸 염두에 둔 게 아닙니다. ‘어째선지 그러한 동작이 하고 싶어졌을’ 따름입니다. ‘반응한’게 아닙니다. 따라서 결코 ‘상대에 뒤처지는’ 일이 없습니다.
‘대응한다’라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後手に回る]’와도 같습니다. 공격이라는 ‘문제’를 받았으므로 ‘정답’으로 대응하려 드는 스킴(scheme)으로 말하자면, 공격해 오는 ‘적’이 문항을 만든 사람[作問者]이자 시험 출제자이고, ‘아(我)’는 수험생입니다. 출제와 채점 모두 ‘적(敵)’의 몫입니다. ‘난문(難問)에 최적해로 대응’하는 마인드로 움직이면, 생각지도 못하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스킴에 말려들고 맙니다.
따라서 ‘곤란한 상황에 던져졌으니 이를 어떻게든 벗어난다’라는 사고방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곤란한 상황’을 설정했던 자에 대해 ‘사후 약방문[後手に回る]’으로 하는 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심’해짐으로써 ‘센테[先手]; 기선 제압/고테[後手]; 수세’, ‘출제자/수험자’, ‘난문/정답’이라는 도식 그 자체를 무효로 합니다.
‘무심’에는 ‘아 맞다, 이렇게 하자’라는 식의 자발(自發)만이 있지, 달성해야 할 목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고 싶어졌는지를, 자신도 잘 모릅니다.
대기록을 세우고 난 운동선수가 인터뷰에서 곧잘 ‘이번 결과는 단지 통과점에 불과합니다’라는 발언을 하곤 하죠? 주위에서 ‘대단하세요, 대단하세요’라며 야단법석을 피워도 상관을 안하고서 ‘단지 통과점에 불과합니다’라고 냉담하게 발언하는 까닭은, 이 운동선수가 혹시나 이런 ‘성공 체험에 고착’하지나 않을까 스스로 조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달성한 걸 ‘성공했다’라고 여기고, 다른 경쟁 상대한테 ‘이겼다’라는 식으로 결론지으면, 게서 진보가 멈춰버릴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그들은 자기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록은 그저 통과점일 뿐입니다’라는 식으로 차분하게 발언할 수 있는 경우란, 최상위 운동선수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제 막, 그 스포츠를 시작한 사람이 시합에서 이기고 나서 ‘이번 결과는 그저 통과점일 뿐입니다’라고 냉정하게 발설하게 되면 코치가 나서서 ‘뚫린 입이라고 건방지게시리. 맘 놓고 기뻐해라, 이 멍청아’라는 식으로 혼쭐을 낼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무도에서는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일수록, 뭔가를 할 수 있게 될지라도, 솜씨의 수준이 주위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손 치더라도(사실 애초에 그런 것들을 아예 신경 쓰지를 말아야 하기는 합니다만), ‘이번 결과는 단지 통과점에 불과합니다’라고 절대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도’라는 것은 ‘그 전 과정이 통과점과도 같은 운동(運動)’을 의미합니다. 첫 한 발짝부터, 숨을 거두기 직전에 가까스로 내디딘 한 발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통과점’입니다. 아무 데도 ‘완성’, ‘최종 승리’, ‘종점’이 없습니다. 이게 ‘길을 간다’라는 것이며, 이게 ‘수행(修行)’이라는 겁니다.
‘무심(無心)’이란 ‘목적이 없는 것’이라고 위에서 썼습니다만, 그런 겁니다. 그저 ‘길을 걷는 것’만이 중요하지, ‘이 길의 최종 목표는 어디인가’, ‘지금 나는 전체 과정의 어디쯤까지 왔는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는 얼마만큼 이 길을 수없이 답파해 왔는가’라는 식의 질문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이 기나긴 수행의 여로 위 어떤 지점에서, 남한테 이겨도, 남한테 세져도, 남한테 잘난대도 혹은 남한테 져도, 남한테 약해져도, 남한테 못난대도, 그런 식의 상대적 우열을 논하는 데에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 승패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기에 ‘눌러앉게’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결코 고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도의 가장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결코 ‘다됐다’라든가 ‘알겠다’라고 생각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을 ‘영원한 초심자’로 두고서, 오로지 걸어 나가는 것.
이러한 정신적인 태도가 종교와 친화성이 높다는 점을 이해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종교도 또한 ‘초월’과 마주함으로써 연속적인 자기쇄신을 다 하는 ‘행(行)’입니다.
어떠한 종교든지 간에 진실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내가 신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라든가 ‘나는 모든 섭리를 이해했다’라는 식의 말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종종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단 틀림없이 사기꾼입니다). ‘신의 뜻은 형태로 나타내기 어렵다’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형태로 나타내기 어렵’기 때문에, ‘신의 뜻에 대해 생각하는 건 헛된 일이니 그만두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절대 메워지지 않는 모자람이 있기에 활발히 그 모자람을 메우려고 하는 게 종교가 가진 역설입니다.
다음에 소개해 드리는 말씀 역시 제가 곧잘 드는 비유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유월절(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exodus을 기념하는 명절 – 옮긴이) 때, 가족 식탁에 딱 한 명, 앉지 않을 사람 몫으로 자리를 마련해 둡니다. 애써 그릇과 식사 도구를 가지런히 놓아둡니다. 바로 예언자 엘리야를 위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구세주의 전조입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그 자리에 앉게 되는 때에는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세주가 도래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 자리는 과거 수천 년에 걸쳐 줄곧 빈자리 그대로였습니다. 이를 귀납법적으로 추리하면, 과거 수천 년에 걸쳐 빈자리였던 경우에는, 올해 역시 빈자리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러니만큼 ‘이제 이 자리에 식기는 그만 놓을까?’라고 할 법도 한데, 유대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를 위한 자리가 빈자리였다는 사태는, 유대인들의 구세주 신앙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구세주는 진실로 그의 부재를 통해, ‘구세주를 고대’한다는 그들 신앙의 근원점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앎으로 말미암아서는 형태 짓기 어려운 종교적 이상을 오로지 간구해 온 사람과, 한평생 도를 닦는다 하더라도 달성할 수 없는 목표(「천하무적」)를 바라보며 걸어 나가는 사람의 정신은 동형적(同型的)입니다.
자기가 비소(卑小)한 존재라는 점에 조금도 괘념치 않습니다. 자신이 미숙함을 느끼며 오히려 기꺼워합니다. 앞으로 답파해야 할 끝없는 길을 희구하며 결코 ‘아이구, 아직도 걸어 나갈 길이 이렇게나 남아있는구나. 힘들도다, 지치도다’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런 ‘끝없는 길’을 걷는 자라는 점을 자신의 광영(光榮)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수행자적 마인드입니다.
이러한 마인드는 말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시장 원리나 경쟁 원리와는 굉장히 궁합이 안 맞는다는 점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째서 그러느냐. ‘주식 시가 총액을 최대한 늘린다’라든가, ‘시장점유율에서 경쟁사를 이긴다’라든가, ‘라이벌을 걷어찬다’라든가 하는 상대적인 우열에 고착하는 행위는 모조리 ‘금기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자본주의는 이제 명맥이 다해버린 경제 체제입니다. 이제는 슬슬, ‘상대적인 우열’을 앞다투며 이긴 자에게 자원을 배타적으로 배분하고, 패배한 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버리는 이런 잔혹한 도식을, 전 지구적 차원으로 내다버려도 좋을 시점이라고 봅니다.
‘무도적 사고’는 제가 보기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이탈하여, 그와는 다른 좀 더 깊이 있고 넉넉한 ‘공간(空間)’을, 이 사회 가운데에 현실로 창출해 나가기 위한 길잡이가 되기에 족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거쳐 이해한다면 한국 독자 가운데에서도 일본식 무도에 공감을 표할 사람이 분명 나올 거라고 보거든요. 그렇지 않을까요?
(2023-12-28 12:2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일본의 「오늘」을 독해하기> <저잣거리의 미중론(美中論)>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이 길은 언젠가 왔던 길.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루가의 복음 14장 11절
생각나면 곧 실행해야 한다. 오늘이다 싶으면 그게 다름 아닌 길일이다. (思い立ったが吉日)
- 일본 격언
Keep looking. Don’t settle. - 스티브 잡스
한 젊은 청년이 뛰어난 무예가를 만나러 일본 전역을 여행했다. 그를 만나 스승이라 칭하며 물었다.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10년.” 청년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 전 매우 열의가 넘칩니다. 밤새도록 연습하겠습니다. 그럼 얼마가 걸릴까요?” 스승이 대답했다. “20년!” (Andrew Matthews)
캐딜락을 타고 콘서트를 보러 가던 텍사스 출신 청년 둘이 뉴욕의 저지 이스트사이드에서 길을 잃었다. 그들은 차를 멈추고 수염을 기른 노인에게 물었다.
“카네기 홀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연습!” (George Leon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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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見 : 일본어 아리가토ありがとう와 스미마셍すみません에는 각각 “다 갚기 어렵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라는 독특한 뜻이 있는데, 이에 관해
루스 베네딕트는 일찍이 <국화와 칼>에서 이것이 무사도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식으로 설명한 것으로 오길비는 알고 있는바, 후학의 추가 궁구가 필요하다 하겠다.(2024-02-11 추가
"근대 일본의 저술가나 평론가들은 여러 기리義理의 의무 중에서 어떤 것만을 선택하여, 서양인에게 부시도武士道, 즉 글자 그대로 사무라이의 길이라 표현했다. 이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오해를 가져올 위험성이 있다. 부시도라는 명칭은 근대에 와서 처음으로 나타난 공인된 표현이다. 부시도는 '기리에 몰려서', '단지 기리 때문에', '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표현 등이 일본에서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민족적 감정을 배후에 지니고 있지 않다. 또한 부시도는 기리의 복잡성과 다양한 뜻을 포괄하지 않는다. 그것은 평론가의 창작일 뿐이다. 이 말은 국가주의자와 군국주의자들의 슬로건이었기 때문에, 이런 지도자들이 신망을 잃자 부시도 개념 또한 불신을 당하게 되었다. 일본인은 결코 '기리를 안다'는 문장의 의미를 포기한 적이 없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서양인에게 일본인의 기리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중요했던 적은 없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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