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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판 『커먼의 재생』 서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7. 18:12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커먼의 재생』 문춘문고판을 집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단행본은 2021년에 나왔습니다. 월간지 『지큐 일본어판』에 2016년 7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일종의 ‘인생 상담’*조로 쓴 글을 모은 책입니다. 그런 만큼 맨 처음 꼭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도쿄올림픽**이나 코로나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옛날얘기 지금 와서 읽어봤자 과연 재미가 있으렵니까?’라는 의문이 당연히 솟아오를 겁니다. 용솟음치는 게 당연합니다. 근데 한번 읽어보시면 재미난답니다.
어째서 시사성 하나 없는 글인데도 여태까지 읽을만한 걸까요? 여기에 관한 사적인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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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rofessor Speaks라는 제하로 실렸다. - 옮긴이)
(** 자국에서의 2021년 하계올림픽 개최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국민의 총의總意에 가깝다. - 옮긴이)
시사적인 토픽을 다룬 문장이 몇 년이 지나도록 가독성이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 글에 쓰인 미래 예측을 맞혔을 때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본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이 책에서 썼던 내용 중 크게 빗나갔던 건 ‘아베 정권은 멀지 않아 끝난다’라고 예언했는데도 5년 이상이나 정권이 지속되었다는 점 정도입니다. 다른 건 대체로 맞혔습니다.
근데 ‘예측이 맞았다’는 것만으로는 가독성을 갖추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그야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여러분은 다 알고 계시니까, 제 예측이 맞았거나 틀렸거나 ‘아 네’ 해버리면 그만입니다.
게다가 정치 경제, 외교 관계로 말할라치면 그 어떤 전문가라도 대부분의 예측이 빗나가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앎을 갖고서는 헤아릴 수 없는 예상 밖의 사건’이 자주 일어나니만큼, 어쩔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2019년 초에 ‘머잖아 신종 바이러스가 야기하는 팬데믹이 일어난다’를 예측했던 사람도, 2022년 초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던 사람도, 2023년 가을에 하마스의 테러로 촉발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과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가 시작될 것으로 예측했던 사람도, 아마 거의 없었을 겁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일이 터지고 난 뒤에야 ‘확실히 이런 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우리들은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옳거니.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였어’라는 식으로요.
그럴 거면 차라리 ‘일어날 법한 일’에 관해 최대한 장대(長大)하게 목록을 작성해 놓는 게, ‘앞으로 반드시 이리된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보다도 실효적(實效的)이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시나요? 저는 어느 시기부터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도(武道)를 닦는 사람입니다. 무도에서는 ‘허를 찔리는*’ 사태를 경계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깜짝 놀란 나머지 오금을 못 쓰게 되는 사태**를 피하고자 합니다. 아니 무도가 뿐만이 아니고, 누구나 그러고 싶겠습니다만. 허를 찔리면 생물은 급거 생명력이 감쇄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죽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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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不意を衝かれる – 옮긴이)
(** 腰を抜かす - ➀ 허리에 힘이 안 들어가 서 있을 수가 없음 ② 어지간히 놀란 나머지 다리와 허리에 힘줘서 서 있을 수가 없음. – 옮긴이)
따라서 저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최악의 사태’에 관해 될 수 있는 한 폭넓은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전에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는 ‘밤중에 게슈타포가 나타나 체포될지도 모르는데 이 꼴로 괜찮겠나?’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게슈타포 같은 건 일본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버려 몇 시간 동안 갇히게 될 경우’에 대비해, 미리미리 화장실에 다녀옵니다. 그런 식으로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생각합니다.
상상력을 이런 식으로 구사하는 사람은 일본 사회에 거의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을 상상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만 하면 경제적 파급 효과가 수 조 엔’, ‘전 세계가 열광하는 『J-스고이』’ 같은 좀 ‘대책 없는(おめでたい)’ 서사를 선호합니다. 옛날에 대일본제국 전쟁 지휘부가 그랬습니다. 육군 참모는 대본영(大本營)에 ‘모든 작전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황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라는 식의 낙관적인 전황 예측을 상신하곤 했습니다. 이런 유형의 보고가 아니고서는 채용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태도 때문에 결국 치명적인 패배를 맛보았다는 사실에 일본인은, 내심 못마땅해합니다. 반성을 안 합니다. 저한테는 그렇게 보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도쿄 올림픽, 오사카 엑스포, 내국인 카지노, 초전도 신칸센, 원자력 발전소*처럼 ‘일발 역전’ 유형의 이야기에 모두가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강구하는 게 좋을까’라는 의문을 누구도 던지지 않습니다. 프로젝트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실패했을 경우의 피해 최소화’라는 이야기를 시작한 구성원이 있다고 칩시다.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증오에 가득 찬 눈총을 보내며 ‘불길한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고 일갈하며 입을 다물게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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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도쿄전력의 「KK 원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원자력발전소인데, 2024년 현재 재가동 가능성이 커졌다. - 옮긴이)
하지만 그 결과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최악의 사태’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단호한 어조로 말씀드릴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리스크 헤지’, ‘페일세이프’, ‘레질리언스’ 모두 일본어 어휘 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외래어를 한자 두 글자 숙어로 만들어 일본어 어휘로(정확히 말해 일본인의 의식 속에) 들여왔습니다. 예를 들면 ‘개인’, ‘사회’, ‘과학’, ‘철학’ 모두 메이지 시대를 살았던 옛사람들이 역어를 만들어 일본어로 끌어안은 어휘입니다. 그런데 ‘리스크 헤지(risk hedge)’란 말에는 일본어 역어가 없지요? 이게 원래는 ‘위험이 발생할 확률이나 내용을 예측해 그것을 회피하고 피해를 최소한으로 그치게 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 대비’해 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나 중요한 개념이니만큼, 한자 두 글자로 역어를 만들어둘 법 하지 않나요?
‘피위(避危)’라든가 ‘억난(抑難)’이란 말로는 그 의미가 충분치 않을지 모릅니다. 그럼 맨날 해왔던 것처럼 가타카나 네 글자로 단축하는 방도가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디지 카메(デジカメ)’, ‘워드 프로(ワープロ; 문서 작성기 – 옮긴이)’, ‘프로그레(プログレ; 도요타 승용차이기도 하였다 – 옮긴이)’, ‘폴리 코레(ポリコレ; 정치적 올바름 – 옮긴이), ‘세크 하라(セクハラ)’와 같이, 우리 일본인들은 외래 개념을 가타카나 네 글자로 축약함으로써 일본어 어휘에 등록해 오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리스 헤지’라는 말은 꺼내지 않군요.
‘페일세이프(fail-safe)’도 마찬가지입니다. 철길 건널목의 차단봉은 정전에 대비해 ‘전원이 나가면 무조건 아래로 내려가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자동차는 엔진이 망가지면 반드시 ‘회전수가 내려가게’끔 설계되어 있습니다. 공작기계를 수출하려면 세계 표준인 ‘페일 세이프’를 준수해야 하니 유수의 일본 업체들도 적용하고 있을 게 분명한데, 이를 사회적 현실에 전용(轉用)하려고는 들지들을 않습니다.
‘레질리언스(resilience)’는 본디 공학 용어입니다. 찌그러트린다든지 구부린다든지 했던 소재가 원형으로 돌아가는 힘을 이릅니다. 이게 넓은 의미에서 심리학적으로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평소대로의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절한 일본어 역어가 없습니다. ‘복원력’, ‘내구력’, ‘재기력’도 썩 괜찮아 보입니다. 어감이 전달되지 않는다 하면 ‘레지리에(レジリエ)’나 ‘레지에은(レジエン)’ 같은 식으로 줄일 수도 있겠는데 저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역어가 없고, 약어도 없다는 건 일본인이 무의식중에 ‘그런 개념은 토착화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 가설에 불과하고 어떠한 ‘에비던스’도 없지만요. (그러고 보니 ‘에비던스’ 역시 역어와 약어가 없는 개념이네요.)
다시 말해, 일본 사회에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에 대해 상상하고, 그것이 가져다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을 준비해 두는 지적 습관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수단으로 그러한 지적 습관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당히 특이한 심리 기제가 일본 사회의 취약성을 높이고 있다는 염려가 제게는 듭니다.
저는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우리나라가 오래오래 빛나기를 바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겁게 살게 되면 참 좋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정도로, 일본이 갑자기 허를 찔려 ‘돌연사’하게 되는 지경과 마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제 충심이 있으니만큼, 될 수 있는 한 망라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에 관해 상상하게 됩니다. 저는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동티날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든가 ‘너 같은 패배주의자가 도리어 패배를 불러들이기 마련이다’라고 비판하시겠거든, 달게 받겠습니다.
너무 길어졌으므로 슬슬 ‘서문’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시사성을 띤 글이 오랫동안 가독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가에 관한 물음을 두고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 가설은 이렇습니다. ‘미래를 앞에 두고서,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대해 상상을 많이 해보고, 어떻게 하면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를 사량(思量)하는 태도’는 틀림없이 가독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입니다. 조지 오웰의 『1984』,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스티븐 스필버그의 『조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모두 그런 식으로 보면 ‘그런 작품들’이죠?
마지막으로 편집의 노고를 다해 주신 문예춘추사의 이케노베 도모코 씨의 성의와 함께, 부록에 인터뷰를 실을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 주신 사이토 고헤이 씨께 감사드립니다.
(2024-01-17 14:4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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