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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보다 몸에 먼저 스며드는 언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4. 2. 22. 17:30
이 책을 읽자니 문득 행간 행간마다 돌아가신 스즈키 구니오 씨의 육성이 들려오는 바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스즈키 씨와 대화를 나눴고 책도 두 권 냈다. 필자가 관장 노릇을 하는 가이후칸 도장에 오셔서 아이키도 수련도 같이했었다. 스즈키 씨는 강도관 유도 삼단이다. 무도에 대한 존중심과 함께 그 넘쳐나는 호기심이 인상적이었다. 스즈키 씨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삿포로시계탑 강당까지 갔다 왔다. 서로 술잔을 기울인 적 또한 하도 많다.
스즈키 씨의 사상을 논한 사람은 많아도, 스즈키 씨의 문장에 대해 말한 사람은 많지 않다. 스즈키 씨는 독특한 '문체'를 갖고 있다.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고, '보이스'라고 해도 좋다. 이는 신체 실감이 뒷받침되고 있음이 확실한 말 이외에는 달리 말하지 않겠다는 자제를 이른다. 평화헌법 지지층이 읽는 매체에 글을 쓰게 됐을 때 스즈키 씨는 이렇게 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스스로 마음의 갈피를 종잡을 수 없다. 나 스스로가 계속 엇나간다. 과연 당신들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ー 그건 상관 말라고 <매거진 제9조> 측은 말했다. 일본에서 가장 열려 있는 장소다. 그래, 도전해 보자. 이 잡지에 글을 쓰고서 한층 강고한 개헌파가 될 것인가, 평화헌법파로 전향할 것인가. 아니면 헌법 따위 집어치우라는 '초(超) 헌파'가 될 것인가. 나 자신의 성장, 변화가 기대된다. 격려 따윈 필요 없다. 어차피 친구도 없거니와. 사랑이든 연대든 지원이든 전부 필요 없다. 비판 질타만 있으면 된다." (19쪽)
매서운 문장이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스즈키 구니오 이외에는 전무후무하다. 맨 마지막 기예(氣銳)한 통갈(恫喝)은 가히 완렴나립(頑廉懦立)*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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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악한 자로 하여금 염치있게 하고, 게으른 자는 뜻을 세우게 함[頑夫廉懦夫有立志]을 줄인 말. 《맹자(孟子)》 만장(萬章) 하.)
스즈키 씨는 소리 내어 보아 수월히 받아들일(音読に堪える) 문장을 썼다. 이는 즉, 읽는 이가 머리로 이해하기에 앞서, 신체에 스며들어, 신체에 메다꽂히는 듯한 말을 썼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가능한 한 소리를 내어 읽어보길 바란다.
우치다 다쓰루(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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