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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나게이」에 대하여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4. 7. 1. 15:59
노가쿠의 호쇼(宝生) 유파에서 내고 있는 ‘보생’이라는 잡지에 이 전통 예술과 관련한 에세이를 기고했다. 내가 쓰는 글 중에는 뭇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매체에 기고하는 게 종종 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가상 공간에 채록해 두기로 한다.
‘단나게이’라는 양식
간제 유파의 ‘우타이’와 ‘마이’ 수련을 시작한 지 십칠 년 된다. 이 년 전에 첫 노(能) 무대로 ‘쓰치구모’를 선보였고, 2014년 금년 유월에는 ‘하고로모’로 두 번째 노 무대에 선다. 그다음 있을 노 공연은 내후년인데, ‘아쓰모리’에 참여할 예정이다. 필자가 전문 기예로 삼고 있는 아이키도의 기준으로 꿰맞춰 보면, 잠정적으로 ‘三단’ 근처에 해당한다. 겨우겨우 한고비를 넘긴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사항들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기예를 배우고 있는가, 자신은 이 기예의 ‘지도’ 상 어디쯤 자리 잡고 있는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조금만 더 나아가 살펴보자면, 전통 예능의 유구한 흐름 속에서 개체적 소임으로서의 ‘역사적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제야 어렴풋이 눈이 뜨이기 시작한 참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기 인식 방식을 ‘지도화(매핑)’라 부른다.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는 풍경을 상공에서 조감적으로 내려다본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 본 뒤 알게 된 게 있다. 그것은 필자가 ‘단나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노를 언뜻 속되게 논하는 걸 마뜩잖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통 예능사의 속살을 파헤치는 작업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취미로써의 「난 치기」 따위에 열중한 나머지, 본업에 마음을 덜 쓰고 사교상 약간의 문제를 떠안게 되어 난처해진 바깥양반들’이 전통 예능의 듬직한 후원자를 자처해 왔다는 사실은 부정 못 한다.
라쿠고를 보면 ‘단나게이’를 다룬 ‘이부자리’라는 탄복할 만한 작품이 하나 있다. 기다유부시에 홀딱 빠진 주인장을 보고서 새경꾼들이 그만 두 손 다 들고 만다는 줄거리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라디오 앞에서 들은 바 있기도 한 이 라쿠고는 특히 기억에 오래 남는다. 주인장의 눈 뜨고 못 봐줄 기다유부시를 피해 다니는 주위 사람들의 요란법석보다도, 미주 가효를 마련해 두었건만 아무도 들으러 오지 않는 주인의 고독감에 오히려 친근감을 느꼈다. 이러한 폐스러운 속인들의 ‘지맥’이 있기 때문이야말로 전통 예능의 봉우리는 그 높은 경지의 획득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다른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치이기도 하다.
필자는 원래 불문학자이다(이제 와서는 이런 소개말도 섣부르겠지만). 필자가 불문에 뜻을 두게 된 건 중고등학생 시절이었다. 그때 일본의 불문학자들이(구체적으로 구와하라 다케오나 와타나베 가즈오, 스즈키 미치히코 등) ‘지맥의 확대’에 굉장히 열심이었던 까닭이다. 지적으로 발돋움하고 싶은 아이들을 향해 ‘이 세상에는 이렇게나 재미있고 자극적인 학문 영역이 있다’ 하는 것을 그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문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정치나 철학, 역사 할 것 없이 해박한 학식을 드러냈으며 또한 여러 차례 사회적인 실천에도 투신했다. ‘불문학자란 이렇게 역동적으로 사는 사람들이구나’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 모습에 끌리게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필자와 비슷한 이유로 불문에 뜻을 둔 청년들로 말미암아 당시 어느 대학을 가든 불문학 연구실은 한우충동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불문에의 인기가 급속히 식었다. 아마 여타의 역사적 이유도 혹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로 이것은 (필자를 포함해서) 전문가들이 ‘지맥을 펴나가기 위한’ 노력을 관두었기 때문이다. ‘탈구축’이라든지 ‘포스트모던’ 등, 난해한 전문용어를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며, 속인들 머리 위에서 대가들끼리만 통하는 내부 담론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불문학과에는 학생이 뚝 끊기고 말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불과 3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을 위하여 ‘프랑스 문학과 사상, 역사를 연구하는 일이 얼마나 유쾌한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다음 세대에 자신들의 작업을 계승해 주기를 간원했던 학자는 거의 없었다. 만시지탄이지만 결코 게을리해선 안 될 종류의 일이었다.
경험상 비추어 보건대, 한 사람의 ‘믿음직한 학자’를 기르기 위해서는, 비율상 오십 명 정도는 ‘될 수 있으면 학자가 되고 싶었던 어중간한 지식인’을 필요로 한다. 혹 인정머리 없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사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한 명의 ‘믿음직한 대가’를 기르기 위해서는, 그 수십 배에 해당하는 ‘반(半) 대가’가 필요하다. 이건 경쟁적 환경에 몰아넣고 나면 ‘약육강식’에서 승리한 질 높은 개체가 끝내는 살아남는다는 그런 냉혹한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결국 스스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지식이나 기예가 얼마나 습득하기에 곤란한지, 그리고 또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몸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 명의 전문가를 탄생시키고, 그 전문지를 심화 확대하여 다음 세대에 연계토록 하는 데 그것이 정말로 불가결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할 따름이다.
필자는 불문학자로서 ‘저변’을 확대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선인들이 메이지 초년부터 구슬땀을 흘려가며 쌓아 올린 어언 백 년에 못 미치는 방년 학문의 명맥을 끊고 말았다. 여기에 굉장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 현재 일본의 대학에는 전문적인 불문학자를 기르기 위한 교육 환경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 흥미로 말미암아 해외로 유학 나가 프랑스 문학을 연구해 학위를 취득할 사람은 앞으로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이미 고사해 버린 학통을 소생시키겠다는 집단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노가쿠의 경우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대가 한 명을 기르기 위해서는 그 수십 배, 수백 배의 ‘반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 연쇄가 끊길 때 전통 또한 끊긴다.
필자가 ‘난 치는 서방’들을 거명할 때의 의미는 ‘저변’으로서 전통 예능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을 이른다. 짬이 날 때 노가쿠 극장에 발걸음하고,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낮은 소리로 창을 읊조린다. 평소에도 기모노를 잘 간수해 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지인들에게 표를 나눠주며, ‘가끔은 노 보러 다니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어째, 우타이랑 시마이 익혀 보시렵니까?’ 하고 권한다. 자신의 시연회가 점차 다가올수록, ‘초장부터 대사를 잊어먹는 꿈’을 꾸고서 식은땀을 흘리는 그런 인간이 바로 ‘서방님네’들이다.
필자는 그런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런 인간이 일정 수만큼은 꼭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기예의 전승이란 집단이 영위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대가일 필요는 없으며, 모든 이가 명인일 필요도 없다. 대가의 예술을 보고서 ‘무척 대단하다’ 탄복하고, 스스로가 하고 있는 초심자 예술의 불완전성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그에 따라 숙달성과 세련미가 넘치는 기예를 향한 욕망에 불타오르는 사람들, 그들 또한 노가쿠의 번창과 전통의 계승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분수를 아는 것’이라는 덕목은 빛이 바랜 지 오래다. ‘분수를 안다’ 함은 자신이 귀속한 집단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자득하는 것을 이른다. ‘자기 분수를 아는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나 중요성에 대해, 개인으로서 이룬 달성으로 따지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이룩해낸 것을 통해 고량해낸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어른’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는 방법을 ‘단나게이’를 연찬함으로써 배울 수 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동의해 주는 사람이 적음에도, 필자는 그렇게 여기고 있다.
(2014-09-03 11:1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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