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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선생님께 '우치다 다쓰루'에 대해 여쭤보러 가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4. 10. 18. 20:41
출처: 神野 壮人 씨 https://note.com/penguin_wo/n/n7235feaa4158
(지난 글)
ー학술 연구로서는 평가를 받지 못해도, 작가나 그 작품을 논하는 방법론으로서는 유효한 접근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우치다 선생님의 ‘연구자가 아닌, 팬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논하는 접근법입니다. 이것이 무라카미 문학을 해석하는 방법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은 세계적으로 대만 한 군데에서만 주목했습니다. 타이베이의 담강대학이라는 곳에 세계 유일 ‘무라카미 하루키 연구센터’가 있습니다. 거기에 초빙되어 한 차례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강연한 적이 있었어요. 그것 말고는 평가고 자시고 할 게 없네요.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을 자처하는 내 책을 읽는 독자는 많습니다. ‘문학론이 아니라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죠. 내가 낸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는 ‘팬’의 입장에서 썼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하루키를 읽으면 좀 더 재미있을까’라는 관심거리만을 염두에 두고서 쓴 것이었어요. 이 부분에는 이러이러한 문학적 장치가 있으니 참 재미있죠? 이런저런 의미나 복선도 있으니 재미있죠? 같은 식입니다. 작품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유열을 길어 올리느냐만이 목적이니까요.
작품이나 작가를 논하는 데 열중하는 바람에 작품의 독해 방식이 한정되어 버린다든가, 그 작품에 대한 흥미를 죽이게 된다면, 팬 되는 입장에서 그런 논고는 아예 ‘없는 게 낫다’는 거죠. 팬은 비평가가 작품을 ‘종결’해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니고, 작품의 실마리를 차근차근 풀어나가며, 여기도 재밌고, 저기도 재밌네…. 하는 다양한 읽기 방식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저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될 수 있는 한 많은 유열을 경험시켜 주기 위해 작품론을 씁니다. 사서의 도서 추천 같은 것이니까요. 학술 논문이 아니라요.
학술적 엄밀성이라는 건, 대상이 문학의 경우라면, 결국 어떻게든 대상을 잘라먹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 작가의 이 문학작품은 이러한 문학사적 계보 속에 자리 잡고 있고, 이러저러한 이데올로기나 편견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이러저러한 개인적인 체험이 뒷받침되고 있고…. 따라서, 나는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식으로 독해 가능성을 감축시켜 나가는 논문을 개인적으로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문학 연구 과정에서 학술 논문을 쓰는 경우에는 정반대로, 작품으로부터 유열을 끌어내는 일이 거의 금지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작품을 흥미로워하기만 하는 식으로 쓰면, 지도교수로부터 ‘이건 연구라고 할 수 없다’는 꾸중을 듣게 되니까요. 하지만 나는 ‘이건 연구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한 글을 쓰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학술적인 연구 업적으로 인정받는 일 자체를 애초부터 포기했습니다. 학술적인 흉내를 포기하는 대신, 재미를 추구할 권리를 획득했습니다.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따름이니, 학술적 평가도 받고 싶다 하면 그건 과도한 욕심이겠죠?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지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법입니다.
ー우치다 선생님은 연구자로서 첫발을 내딛으셨다가, 어느 날 전도사를 자임하게 되셨습니다. 연구자에서 전도사에 이르는 전환점, 혹은 계기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건 아이키도 사제 관계 속에 있었던 게 가장 컸습니다. 사제관계 속의 제자라는 포지션으로 거하다 보면 알 수 있는데, 제자란, 뭐가 됐든 스승의 가르침을 매일 해석하고, ‘선생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겠거니’ 여기면서 수련하고, 다음날은 ‘아, 나는 왜 이다지도 천박한 해석을 했던 것인가?’ 하고 또 다른 해석을 하고, 이에 기반해 수련을 합니다. 그걸 매일 반복하는 거니까요. 전날까지 해놓은 신체적 운용 이치의 해석을 다음 날에는 유감없이 버릴 수 없다면, 수행이란 걸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과정을 말로 설명하려고 해도 그게 논문의 형식이라면 도저히 가늠이 안 잡힙니다. 즉각 폐기될 것임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내가 다다 선생님 밑에 들어가 아이키도를 배우고, 그 사제관계 속에 계속 있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연후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를 학술적인 연구 대상으로 택했을 때, ‘논문으로 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스케일이 너무나 큰 나머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어이쿠.
그래도, 스케일이 너무나 커서 내가 손에 미처 들지도 못할 지경이어도, 거기에 딱 달라붙어 양분을 얻는 방법은 있습니다. 바로 제자가 되는 겁니다. 제자가 된다는 건 말이죠, 스승의 가르침을 놓고서요, ‘스승은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고 말했음에도 다음 날 ‘그건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하고 전언 철회해도 책잡히지 않는단 겁니다. 탓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려됩니다. 제자가 되면, ‘레비나시앙’의 입장에서 연속적으로 자기쇄신 해나가는 일이 허용됩니다. 읽을 때마다 그때그때 해석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하는 심정으로요. 제자가 되어 스승을 섬기면, 하루하루 날마다, 보다 깊은 예지를 길어 올릴 수 있습니다. 이 판국에, 괜히 학술적인 논문이라는 정해진 틀에 스승의 예지를 딱 맞아떨어지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나는요, 레비나스론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승의 살아있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 레비나스 선생님의 책을 읽고 있는 거니까요. 저는 레비나스를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지, 레비나스를 ‘연구’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 건, 레비나스를 만나기 전에 수십 년간 다다 선생님 밑에서 무도적인 사제관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제관계란 게 뭔지를 그렇게 깨우쳤기에, 이걸 레비나스에도 적용해 그 사람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이로를 따져보면, 레비나스 역시 누군가의 제자였거든요. 모데카이 슈샤니라는 탈무드 학자가 레비나스의 스승이었습니다. 슈샤니 옹은 레비나스를 2차대전이 끝난 뒤 몇 년 동안 자택에서 먹고 자게 해주었습니다. 그때 집중적으로 탈무드 해석학의 묘법을 전수해 주었어요. 레비나스는 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하이데거의 ‘자칭 제자’였지만, 하이데거가 나치당원이 된 것을 계기로 스승에게 거의 배신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연이 끊겼어요. 하이데거를 잃은 후에는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로젠츠바이크는 그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가 남긴 글을 통해 사제 관계를 맺게 된 셈입니다. 그러니까 로젠츠바이크의 ‘사후 제자’가 된 것이죠.
레비나스는 슈샤니와 로젠츠바이크, 이렇게 두 스승을 섬기는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포지션을 통해 구축된 것이 레비나스 철학입니다. 따라서 그의 텍스트는 역동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정형화할 수 없으며, 여남은 기본적 명제로 감축할 수도 없습니다. 붙잡았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마는 그런 생성적인 무언가입니다. 그러한 철학과 어찌 마주해야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진짜 그런 거라면, 레비나스 선생님이 그 스승에게 배운 바와 같이, 저는 레비나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레비나스 선생님께 배움을 이어 나가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읽을 때마다 레비나스의 말에 대한 해석이 바뀝니다. 하지만 나는 괘념치 않아요. 제자 된 몸이니까요. 제자는 매일 성장해 나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십 년 전에 썼던 논문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어지간히 다르군요’라는 말을 듣더라도, ‘네 맞아요’라고 대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당연하거든요. 이건 제자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니까요.
나는 레비나스의 책을 몇 권 번역했습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내가 가진 어휘를 가지고 반영한다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통절하게 느꼈습니다. 도리어, 레비나스 고유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가진 말보따리 그 자체를 늘려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구사하고 있던 논리 형식 그 자체를 레비나스의 로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까지 고쳐 써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레비나스 독해 방식을 레비나스로부터 배웠다’고 내가 밝혔습니다만,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레비나스 독해 방식을 레비나스로부터 배운 인간’을 ‘레비나스 연구자’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제삼자가 아니니까요. ‘레비나스의 제자’라고 부를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글을 쓴다고 함은, 제자가 스승의 철학을 전도하고 있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학술연구가 아닙니다. 따라서 학술적 업적으로 평가받기를 애초부터 단념했습니다.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을 내고 나서, 서평이 두 개 나왔습니다. 예상대로 학술 논문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평점을 받았습니다. 특히 최신 레비나스 연구 성과를 전혀 살피지 않았다는 점을 거침없이 비판받았습니다. 최신 연구를 팔로업하지 않았다고 혼이 나도, 예 안 읽었습니다, 하고 마는 거죠. 도통 재미가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물론 개중에는 재미있는 것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알랭 핀켈크라우트(Finkielkraut; 팽키엘크로 - 옮긴이)의 『사랑의 지혜』와 우아크냉이 그랬습니다. 또한, 살로몬 말카의 『레비나스 평전』과 『레비나스를 읽다』도 재미있었습니다. 핀켈크라우트와 말카는 일본어 번역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아크냉은, 아, 이 사람 랍비인데요, 일본에 안 알려져 있습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레비나스의 제자’ 된 입장에서 썼다는 점이겠네요.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술 연구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쓴 글을 읽고서 레비나스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실제 제자로 가장 가까이서 훈도를 받았던 사람들이 쓴 글이야말로 레비나스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거개의 학술논문보다 얻어갈 게 많습니다. 더 이상 뭘 해야 하나요?
ー우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로서 스승을 칭송하는, 혹은 팬으로서 작가나 그 작품을 즐기는 건 정식 학술 연구로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용기론』에서 “이 책은 『용기론』이므로, 일종의 학술논문입니다”라고도 쓰신 바 있습니다. 우치다 선생님의 목적은 집단의 예지를 활성화(원문 賦活부활 - 옮긴이)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한 어떠한 접근법도 상관없다, 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네, 맞습니다. 나한테 중요한 건 일본입니다. 나는 일본인이니까, 뭐가 어쨌든 간에 1억 2500만 명의 일본인 독자가 대상입니다. 이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지성을 활성화시키는, 그것이 내 목적입니다. 집단으로서 지적인 퍼포먼스를 향상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1억 2500만 명 모두가 지성적, 감성적으로 성숙해 가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접근법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학술연구를 통해 활성화하는 방법도 있고, 그것과는 다른 모습이더라도 집단적 지성을 활성화하는 ‘술책’[術]이 있다면, 그것을 채용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ー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인물 자체와 관련해서도 좀 여쭙고자 합니다. 레비나스를 접견한 일본인은 극히 드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령대별로 비추어 보면 그렇겠네요. 선생님은 95년이 저물 무렵에 돌아가셨으니, 올해로 29년이 됩니다. 돌아가셨던 시점부터 일찌감치 레비나스를 읽거나 번역한 사람은 현재 70세 이상입니다. 그보다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 중에, 선생님 살아생전 프랑스까지 가서 만나 뵙고 대화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 레비나스를 찾아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사람은 고우다 마사토와 니시타니 오사무 씨 정도입니다.
ー우치다 선생님이 제자로서 직접 만나 뵌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겁나게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친절한, 정말로 호스피털리티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환대의 철학’을 설하는 분이 자칫 굉장히 쌀쌀맞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절로 웃음보가 터질 지경이네요. 뵙게 된 건 1987년 여름이었습니다. 레비나스의 책을 그때까지 여남은 권이나마 옮기고 나서 파리로 우송해 드리곤 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을 철학의 스승으로 삼자고 일단 마음을 굳히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글 쓴 것만 보면 퍽 심원함에도, 만나 보았더니만 인물이 적잖이 알량한…. 그런 경우가 왕왕 있거든요.
다다 선생님을 놓고 보면 초두부터 살아 숨 쉬는 다다 선생님과 만난 이래 계속 경해에 접하며* 그 훈도를 받아왔으니만큼, ‘이 사람을 평생 따르리라’는 결심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레비나스 선생님의 경우, 서지적인 지식밖에 없었던 거예요. 텍스트와 저자는 별개입니다. 인간은 진짜 별로인데 글 쓴 것만은 대단하다 싶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게 서책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훼손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서책이 아니라 당자에게 용무가 있단 말입니다. 내 입장에선 스승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짱 헛물켜는 겁니다. 평생 사사해도 좋은 사람인지의 여부는, 역시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만나러 간 겁니다.
현관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리고, 거기에 레비나스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두 팔 벌려 저를 맞아주셨습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은 진짜다’ 싶었습니다. 아, 당신이 책으로 쓰신 그대로를 체현한 분이었어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레비나스와 직접 만나서 가장 좋았던 게 뭐냐면, ‘안심이 되었다’라는 점이에요. 이 사람을 따라가도 되겠구나. 이 사람을 믿어도 되겠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었어요. 이 기분 말로 표현 못 합니다.
(* 윗사람을 공경하여 그의 기침 소리나 말씀을 이르는 말. 출전은 장자 제무귀 – 옮긴이)
ー사적인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년쯤 전에 우치다 선생님 앞으로 ‘선생님 저작물의 총색인을 작성하고 싶습니다. 이 게시물을 공개해도 되겠습니까?’라는 취지의 전자우편을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길로 우치다 선생님께서 “대환영입니다. 부담 갖지 말고 공개하십시오”라고 답장을 주셨습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을 따르겠노라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제자를 참칭하게 해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자칭 제자’, 대환영입니다. 사제관계란 개방적인 것이니까요. 누구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요것 저것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제자로 삼지 않겠다, 그런 건 사제관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되고 싶어요’라는 말 한마디만으로 제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제자가 되는 데 조건이 없는 것과 같이, 스승이 되기 위한 조건 역시 특별할 게 없습니다. 제자가 ‘이 사람은 대단하다. 이 사람을 따라가자’ 하면 그길로 오케이입니다. 사제관계란 무릇 ‘결과적으로 제자가 성장’하기만 하면, 어떠한 형식이어도 상관없습니다.
ー저는, 스승 곁에서 배운다는 것 자체에 공포와 혐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치다 선생님께서, 도무지 어떤 인물인지 영문도 모를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신 덕분에, 다시금 배움이란 행위가 가능케 되었습니다. 배움이라는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기분이 정말 좋네요. 잘된 일입니다. 누군가의 지적인 탐구심이 활성화된다는 건, 참으로 보람 있는 일입니다. 내가 일생 애써 친절하게 처신한 보답이, 오늘 진노 씨 덕분에 이제서야 나타난 거나 마찬가지인걸요? 하하하.
ー우치다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누구에게나 오픈 마인드로 대우해 주십니다. 그 이유는 우치다 선생님 당신께서도, 다다 선생님이나 레비나스 선생님으로부터 그렇게 대접받은 경험이 있으셨기 때문일까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랬기 때문일 겁니다. 다다 선생님도 제게,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나는 정말로 못났었습니다. 변변찮은 햇병아리였던 겁니다. ‘이런 무례한 놈. 파문해도 시원찮을 놈’ 소리까지 들을 각오했습니다. 그런 풋내기를 선생님은 정말로 따뜻하게 받아주셨습니다. ‘아무 말 말고 나를 따라오너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레비나스 선생님도 진정 그러하셨습니다. 머나먼 아시아에서 온, 족보도 불분명한 젊은 연구자를 집으로 불러들여 3시간 4시간씩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정말로 친절한 분이셨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친절하다’라는 말, 만화에도 나오는 명대사거든요? 근데 한참 전부터 각인되어 있던 거예요, 알고 보니.
ー화제를 바꾸어, 사회 문제에 대해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우치다 선생님께서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저는, 일본의 현 상황에 도무지 희망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일본이 괴멸적인 상황에 부닥치리란 상상만큼은 곧잘 듭니다. 이럴 만치 일본을 재건시킬 미래상이 그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그런 탓에 바뀌지도 않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변함없는 자기 자신’이란 모습이 사회 전반적으로 권장되고 있는 듯 보이더군요. 성숙을 거부한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아낼 수 있는 날이 과연 올는지요?
싸우십시오. 그 방법밖엔 없습니다. 쓰레기 같은 체제에 대해서는 ‘쓰레기 같다’라고 확실히 말하세요. 올바르지 않은 일에 관해서는, ‘올바르지 않다’고 말하십시오. ‘원래 다 그런 거’라는 말을 들으면, ‘원래 그렇지 않다’고 말하십시오. 이 세상은 원래, 지금보다 더 합리적이고 도의적이어야만 합니다. 내 생각이 그래요. 오늘날의 일본은 말 그대로 합리적이지 않으며, 굉장히 효율이 안 좋습니다. 나는 뼛속까지 합리주의자예요. 그래서 이런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힙니다.
지난 30년 동안, 일본 사회는 한결같이 비효율과 비합리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각기 한 사람씩 가지고 있는 윤택한 가능성이나 잠재적인 능력을 끌어내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구조가 전적으로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날 기회를 부수고 짓밟았어요. 아이들을 규격화하고, 동질화하며, 개성과 능력 그 어느 것도 발휘할 수 없게끔 하는 게임을 필사적으로 프로그래밍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규격화하면 명백히 관리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건 창조의 싹을 뽑아버리는 짓입니다. ‘창조’와 ‘관리’는 맞물릴 수 없습니다. 관리에 초점을 두면, 창조력이 고갈됩니다. 창조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관리를 단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각오가 없으면 일본은 가라앉게 될 뿐입니다.
가라앉는 이유는 제도 설계가 그릇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인구가 1억 2500만 명입니다. 그 가운데 재능 있는 사람이 수백만 명은 있을 건데, 그 재능을 펼 수가 없어요. 나는 이 사실에 분노를 느낍니다. 반복해 말씀드리는데, 집단적으로 지적 퍼포먼스를 활성화해 나가겠다는 것이, 내 혁명 투쟁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투쟁 목적에 공명해 주는 사람들과 공모해 특정한 무언가를 ‘타도하자’고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일본인을 억압하고 있는 관리라는 뚜껑을 날려버리라는 뜻이죠. 그 분투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자기 현장에서 해주기를 바랄 수밖에요. 싸워 주기를 바랍니다. 젊음을 썩힐 바에야 싸워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내가 『용기론』에서 쓴 것도 그런 내용입니다. 고립을 두려워하지 말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싸우라, 그런 책이에요. 기껏 싸웠는데 쓰러진 나머지 객사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젊은이를 부추기지 말라’는 질타를 혹 받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역시 싸워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멀리서 힘내라고 손을 흔들어 주는 것뿐이지만요.
ー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탈각하기 위한 방도 중 하나로써, 최근 들어 우치다 선생님께서는 ‘이해와 공감’의 성격을 띤 집단에서 벗어나, ‘사회계약’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로의 이행을 제창하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이해와 공감’을 기반으로 한 사회밖에 속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수파가 되는 것, 그 자리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 이단을 색출해 내 배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됩니다. 그런 것들에만 지적 자원이 할애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계약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가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하면 그러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혹여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근대 시민 사회라는 게 애초부터 그런 모습이었기는 합니다. 사회 계약 기반 공동체는 만들어질 수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프랑스 혁명이 가져다준 가장 큰 공헌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때까지는 같은 인종, 같은 종교, 같은 언어, 같은 생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모여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동질성 기반 집단이란 것은 일정 크기 이상으로 늘지는 않는 법이지요. 집단이란 원래 결국 커지기 마련인데, 동질성 기반의 집단은 사이즈가 늘어나면 제대로 기능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집단으로서는 ‘이물이 침투해 집단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있기 때문에 우린 망했다’라는 설명을 채택합니다. 동질성 기반 집단은, 위기 상황에 부닥치면 반드시 ‘이물 배제’ 폭력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이에 대치되는 것이 사회계약 기반의 공동체입니다. 어느 정도 이상의 사이즈를 가진, 어느 정도 이상 기능이 분화된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질성 기반으로부터 계약 기반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근대 시민 사회론의 등장은 획기적이었습니다.
분명히 이 근대 시민 사회의 이상은, 상당 부분 현실화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동질성 기반 집단과 사회 계약 기반 집단 중 어느 집단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한 논의가 프랑스 혁명 이후 줄곧 이어져 온 것입니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항 대립도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우익이 공감 기반 공동체를 지향하고, 좌익이 사회 계약 기반 공동체를 지향하는 식인데, 이는 집단의 기본 틀에 관련된 본질적인 대립인 셈입니다. 구체적인 정책상의 대립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관되게, 근대가 시작된 이래 역사적으로 사회 계약 기반 공동체를 지향하는 운동가들은 입지가 불리했습니다. 물론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일본인은 사회 계약 기반 공동체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근대 시민 사회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시민 혁명을 경험하지 않았으니까요. 일본인은 사회 계약 기반 공동체를 목도한 적이 없습니다. 본 적이 없으니, 참조할 과거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사회계약 기반의 공동체를 ‘창조’해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토 고헤이 씨가 ‘게노센샤프트(Genossenschaft)’라고 부른 것이 바로 거기에 부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은 구성원의 자유 의지에 기반한 계약 공동체를 이릅니다. 직인 조합이나 협동조합이 이에 해당됩니다.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라고도 불립니다. 나는 이를 좀 더 확대해석하는데, 교육 공동체나 이곳 가이후칸과 같은 도장 공동체 역시 ‘게노센샤프트’로 봅니다. 멤버의 출신은 불문에 부칩니다. 인종, 언어, 종교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한 공동체가 내부적으로 정해놓은 규범에 따르기를 서약한다면, 별다른 조건 없이 공동체의 정규 멤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이러이러한 사회 계약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것을 지키는 겁니다. 딱 그거면 됩니다.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질이 있다면 그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 정도입니다. 더 바라는 것 없습니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집니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면 인종이 어떻든, 종교가 어떻든 그건 둘째 문제인 겁니다. 정치적 이념이 어떻든지 간에 상관없다 이거예요. 이것이 게노센샤프트가 채용하는 인간관입니다. 나도 그런 사고방식에 따릅니다.
가이후칸은 규칙만 지켜 준다면, 어떤 사람이든 환영합니다. 규칙이란 게 뭔고 하니 ‘도장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룰은 그거 딱 하나뿐입니다. ‘도장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란 무엇이냐, 그건 누구든지 생각만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도복(운동복)은 청결을 유지할 것, 도장 안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을 것, 도장에 들어갈 때는 절을 할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전부 ‘도장에 대한 경의를 표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룰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조목조목 써 붙일 내용은 아니예요.
오늘 진노 씨를 이렇게 가이후칸에 모시고 있습니다. 내가 평소에도 누군가를 가이후칸에 들일 수 있는 건, 그 사람에게 공감하고 있다든가, 이해가 되는 사람만 선택적으로 가이후칸에 받아들이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장에 경의를 표하는 것’ 한 가지 사항만을 지켜준다면 ‘오케이’입니다. 약속한 시각에 맞춰 도착하고, 평범하고 청결한 복장을 갖추며,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 삼지 않겠다는 헐한 조건입니다.
이런 룰들을 나는 현재로서는 더듬더듬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사회 계약에 기반한 공동체를 어떻게 직접 만들 것인가를 연구하는 실천 과정입니다. 진노 씨 자신도 진노 씨 주위에 나름의 계약 공동체를 만들고, 그러한 공동체를 넓혀나가는 그런 사람이라면, 달리 어떤 사람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계약에 기반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가장 자유롭게 해준다는 게 내 필생의 지론이 아닌가 해요. 이번 기회로 보다 명확해졌어요.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더군요. 공감으로 묶인 공동체에 속해 있기만 하면 만사 ‘이심전심’이니까, 뭘 해도 자유라고 생각하는가 본데, 그건 명백히 틀린 겁니다. 정반대예요. 공감 기반 공동체에서는 ‘공감을 서로 확인하는 의례’가 최우선시됩니다. 그런 식의 의례가 줄줄이 이어지는 거예요. 어찌 됐든 ‘서로 공감하고만 있으면 그담엔 무슨 짓을 해도 된다’가 되고 보면, ‘애정 확인’, 그것만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업무가 됩니다. 계약 공동체면 지켜야 할 계약은 명문화되어 있으므로, ‘그것만 지켜 준다면 OK’입니다. 하지만 공감 공동체의 경우 ‘공감 가능 여부’를 체크하는 데에는 ‘이제 그만’이란 게 없습니다. 무진장 뭔가가 늘어납니다. 주야장천 ‘우리 깐부제?’ 하고 맨날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 짓을 하는 사이에 누가 멤버냐 하는 확정 작업에 대부분의 자원을 소진하고 맙니다. 결국 집단으로서 애초에 무엇을 하기 위해 모였는지는 아무도 언급을 안 하게 됩니다. 어떤 집단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니글렉트하게* 됩니다. 본질을 잊고서 오로지 ‘누가 정회원이냐?’ ‘누가 회원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한 『이물』이냐?’ 하는 식으로 멤버십을 점검하는 데 골몰하게 됩니다. 그 외의 할 일에 대해서는 흥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기둥뿌리 썩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거예요. ‘이물이 배제된 순수한 집단이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게 그들에게는 자명한 명제니까요.
(* 내팽개치게. 일본어에서 아동학대의 맥락 가운데 쓰이는 외래어임 – 옮긴이)
따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공감 공동체야말로 비효율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집단인 셈입니다. 계약 공동체는 기본적인 계약만 지켜주면 ‘이거 좀 부탁드립니다’ 하고 말로 통합니다. 하지만 공감 공동체가 되어 놓고 보면 ‘해 달라고 하는 네놈은 누구냐?’ 하고 우선 신원 조회를 합니다. 여기서 정회원 자격이 확인되지 않는 한, ‘부탁드려요’가 통하지 않습니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비효율적이지요. 게다가 도대체 ‘너는 정회원이고. 넌 회원이 아냐’라는 식의 멤버십 판정을 내릴 권리는 누가 갖고 있는 겁니까. 그러한 판정권은 누구한테도 없지 않나요? 동질성과 공감 척도라니요. 이걸 판정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대신 가능한 게 ‘이물의 검출과 배제’ 뿐입니다.
나는 자유로이 살고 싶습니다. 자유란 것을 가장 소중히 여깁니다. 따라서, 공감 공동체에는 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계약 공동체라야 됩니다. 귀 따갑게 ‘네놈의 정체가 뭐냐’ 같은 질문 따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무도가가 정진하는 바는 ‘자재’*를 얻기 위함입니다. 무언가에 갇혀 있거나, 무언가에 진득하니 있는 상태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학자로서 살아가는 이유와도 동일합니다. 자유롭고 싶은 겁니다. 이데올로기나 억견(doxa)의 포로 상태가 되고 싶지 않아요. 지적으로 ‘자재’하는 것이 내 노력 목표인 셈입니다. 생물로서도 당연한 처사가 아닌가 해요. 가동 영역을 최대로 하고자 합니다. 선택지를 최대로 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생물로서 삶을 영위하는데 당연한 일이니까요.
(* 불교 용어: 보살이 바라는 바대로 제행을 행하는 것. 그 힘을 자재自在력이라 하고, 보살을 자재인이라 함. - 옮긴이)
따라서 나는 게노센샤프트에 속하고자 하는 겁니다. 게노센샤프트란 말을 바꿔서 표현하면 ‘코뮌’이겠지요. 합리적이고, 도의적인 공동체에 나는 속하고 싶습니다. 즉, 나는 그런 의미에서 ‘코뮌 주의자(communist)’입니다.
ー우치다 선생님께서 가이후칸을 통해 문인 분들과 매일 실천하고 계신 것이, 사회계약 기반 공동체의 프로토타입(첫걸음을 내디딘 작은 실천 - 옮긴이)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까?
맞습니다. 실제로 직접 만들어서 기능하고 있다는 모범을 보이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이런 계약 공동체도 있소이다 하는 표방이지요. 내 진력의 소산입니다. 권위자가 모델을 제시해 놓고 ‘이러한 공동체를 만들라’고 강제하는 데 나는 반대합니다. 그럴 게 아니라, 모두가, 자발적인 의도를 발판 삼아 게노센샤프트를 직접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것을 일본 전국 어디에나 펼쳐나가자는 거예요. 규모나 기능은 달라도 다양한 계약 공동체를 만들자는 겁니다. 그렇게 저마다 색다른 맛이 나는 공동체가 많이 만들어지고, 그것들끼리 느슨한 네트워크로 묶이면 참 좋겠다 싶은 거예요. 여하튼 과도기에는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ー다시금 화제를 전환하고자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젊은이들의 자기긍정감이 굉장히 낮아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긍정감을 높일 수 있을까요?
자기 긍정감을 드높이는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면 될 일입니다. 정직도 있고, 친절이라든지, 용감도 있구요. 그런 덕목들은 자기 긍정감을 단번에 높여줍니다. 남한테 아무리 못되게 굴더라도, 상대가 크나큰 굴욕감에 치를 떠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할지라도, 자기 긍정감은 높아지지 않습니다. 어떤 상쾌감이나 전능감 같은 건 느낄지 모르겠지요. 하지만 그걸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확실하게 자기 긍정감은 높아집니다. 정직하게 말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지금까지 모호하게 얼버무렸다든지 말을 꾸며냈더라도, 정직하게 말하면 자기긍정감이 높아져요. ‘그래, 내는 억수로 정직하다’는 마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용감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무언가 부조리한 일이 행해질 시, ‘그건 부조리하다’고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바가 받아들여지든, 안 받아들여지든, 할 말을 똑바로 하고 나서, 허리를 곧게 펴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결과가 닥친다 해도, 마치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흠씬 두들겨 맞는다 해도, 자기 자신을 딱 그만큼은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 긍정감을 높이고 싶다, 그건 간단하다면 간단합니다. 정직, 친절, 그 다음엔 용기예요. 이것들로 자신을 다스린다면, 자연스레 자기 긍정감이 높아질 따름입니다.
자기 긍정감이라는 말만 놓고 보면 적이 형식적이기는 합니다만, ‘난 장난 없는 나이스 가이야’라고 여기는 거나 결국 다름없다는 겁니다. 돈이 있다든가 권력이 있다든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돈이 있어도, 권력이 있어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나요? 나는 자기 긍정감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거든요? 오늘 진노 씨가 봐도 딱 그렇잖아요? 이런 식으로 뻗대고 다니며 뭇사람들을 골탕 먹이곤 했습니다. 오래전 시바타 모토유키 교수와 대담 이벤트를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청중석에서 ‘우치다 선생의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라는 질문이 나왔어요. 순간 일동 웃음바다가 되었지요. 하지만 정말 그분 말씀대로 아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맞습니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집안 모두에게 귀염받으며 자란 경험이 불러일으킨 게 거의 분명하다고 여깁니다.
나는 어렸을 때 한번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여섯 살 때 의사가 오진했어요. 감기인 줄 알고 내버려뒀는데, 급성 감염증이었던 겁니다. 그길로 대학 병원에 데려갔더니 그때 이미 ‘1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구해온 신약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부모님 입장을 좀 생각해 보세요. 주치의로 모시던 의사의 오진을 믿고서 아무 치료도 하지 않은 채 한 달 가까이 방치한 결과 애를 거의 잡을 뻔한 게 굉장히 후회되었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죽을 줄만 알았던 자식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심장 판막증이라는 후유증이 남았습니다. 평범한 생활은 불가능하다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났으니만큼, 우리 작은아들이 ‘그저 튼튼하게만 자라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 이른 게 아닐까 해요. 살아만 있어 준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고,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만사 OK라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고 나서도 심장 발작이 때때로 일어났습니다. 11살까지 거의 한 해 걸러 매년 장기간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여하간 몸이 약하고, 까딱 죽을지도 모르니만큼, 부모님으로서는 살아있는 것 이상 자식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이게 아이 입장에서는 굉장히 신나는 거거든요. 부모님의 기대가 아주 낮았던 것이 내 자기긍정감을 높여주게 되었음을 회고합니다. 보세요, 뭘 해도 전부 허락받는 거나 마찬가지인걸요. 아침에 일어나서 강아지 산책시키고, 밥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다쓰루가 안즉 살아 있구나. 아이고, 다행이다 다행이야’ 하는 식이었습니다.
과연 그게 ‘애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형은 부모님께 혼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맏이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눈으로 봐도 딱 알겠더라고요. 부모님의 농밀한 애정이 형을 괴롭혔습니다. 형이 자기 긍정감을 가질 새가 없을 정도로 뭘 가로막은 꼴이었어요.
그러니까 내 근거 없는 자신감의 실체는요, ‘온 가족에게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되고, ‘온 가족의 기대치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되겠어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자녀 입장에서, 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겁니다.
부모가 자식한테 해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란, 자녀의 자기긍정감을 높여주는 일이 아니겠어요? 자식 스스로,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 존재 이유에 대해 한 점 의심 갖지 않으며 자라도록 하는 일이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바라며, 또한 그것을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음을 안다는 것. 이는 자녀 입장에서 굉장히 고마운 일일 겁니다. ‘이런 조건 저런 조건을 완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 애로 안 알아줄 거야’라든가, ‘이런 아이가 된다면 애정을 주도록 하겠어’와 같이, 자녀로서 승인받을 수 있는 조건을 내걸어놓고서는 그걸로 자식을 능수능란하게 조종하려는 부모 축이 있잖아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녀는 매우 괴롭습니다. 부모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자란다는 것은 바로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니까요. 부모가 제시하는 조건을 완수하지 못한 나머지, 그래서 부모의 승인을 제대로 획득하지 못한 자녀는 성장 과정이 지난 이후에도 자기긍정감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럴 게 아니라, ‘살아 있기만 해주면 된다’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자녀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놓으면, 자식의 자기긍정감은 높아집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 크고 나서도, 이래저래 세상사 불합리를 겪을 적에 ‘이건 부조리야’라고 자연스럽게 발언하게 됩니다. 상대가 백 명이 있는데 그 백 명이 모두 잘못하고 있는 경우라도, ‘너희들이야말로 잘못’이라고 자연스레 말하는 것이죠. 이러한 홀로서기를 견딜 수 있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한테 인정을 못 받아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흔들림 없는 승인을 얻었기에 그런 것이지요. 그런 자녀는 자라서도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ー우치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이력을 어떤 식으로 요약하시렵니까. 또한, 향후 거취에 대해서 어떠한 구상을 하고 계시는지요.
난감하네요. 내 나이가 일흔넷입니다. 살 만큼 살았습니다. 당면 과제라 할 만한 것은 손수 일궈낸 가이후칸을 재단법인으로 전환하여, 이 계약 공동체가 길이 남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앞으로 써야 할 특별한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카뮈론』을 현재 쓰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카뮈는 완성하고 가야지 싶거든요. 필생의 노작 『레비나스 3부작』도 다 마쳤고요. 곤도 세이쿄 연구까지 썼으니까요.
내가 왜 곤도 세이쿄론을 썼느냐고요. 일본에서 태동한 극우 사상과 한번 붙어 보자는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결국 내 필생의 연구나 다름없어요. 나는 농본 파시즘이란 것에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 이유를 좀 알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은 파리코뮌에 가 있어야 할 사람인데 극우 사상에 끌리는 무언가가 있어 놓으니까, 그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이거, 언젠가는 진지하게 생각 안 하면 일 나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책 한 권 써 보니까 머릿속이 거의 정리되었습니다.
그다음은 카뮈. 카뮈에 관해 쓸 것은 거의 다 썼으니까, 특별하게 덧붙일 내용은 없긴 하네요. 카뮈 헌걸차잖아, 뭐 그런 얘기입니다. 잔말 말고 카뮈를 읽으시라, 하는 겁니다. 나는 알베르 카뮈 연구자가 아니에요. 팬이자 전도사지. 그러니까 살아생전 한 사람이라도 카뮈 독자를 늘리는 데만 집중하는 겁니다.
ー부끄러운 일이지만 우치다 선생님께서 ‘곤도 세이쿄’ 책을 쓰시기 전까지는 이 인물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곤도 세이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보통은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어떤 인물이냐는 말씀이죠? 5・15 사건의 사상적인 흑막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상가입니다.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쇼와 유신’이라는 정치적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존재하던 두 명의 사상가가 바로 기타 잇키와 곤도 세이쿄입니다. 이 둘은 완전히 대조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당대 직면한 나라의 앞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0년대에 이미 일본이란 나라의 앞날과 그 방향성이 거의 결정되었습니다. 제국주의적으로 충만하여*, 군부가 폭주하고, 그 결과 패전하게 된 바로 그 흐름을 만든 원인 중 하나가 곤도 세이쿄 사상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곤도 세이쿄가 지향한 ‘일본형 코뮌’과 비슷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군부 혼자서 날뛴 결과입니다. 곤도 세이쿄 자신은 그렇게 호전적이지 않은 인물이었어요. 그는 적이 뭉근하고 낭창한 공동체를 구상했을 따름인걸요.
(* 원문 純化: ① 잡됨 없이 순수하게 함 ② 복잡한 것을 간단히 만듦 – 옮긴이)
근데 보세요. 그가 제창한 공동체론에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습니다. 그게 ‘공감 기반’ 공동체였거든요. 곤도의 코뮌 주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 시스템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아나키즘에 가깝습니다. 곤도는 권력자에게 매니지먼트 당하는 걸 몹시 싫어한 겁니다. 따라서 그는 자치형 공동체를 구상했습니다. 스스로 자, 다스릴 치요. 상위 권력구조의 입김을 배제합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관리를 받지 않는 자치체란 무엇일까요? 곤도는 그것을 ‘사직’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직이야말로 공감 기반이자, 동질성 높은 농경 공동체입니다. 순수한 공감 공동체인 셈이지요. 이렇게 되고 보면 ‘타자와의 공생’이라는 점을 전혀 생각치 않게 됩니다. 여기에서 계약공동체론자인 나와 곤도 세이쿄는 행동 노선을 달리합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지배를 뿌리치고서 자치적 공동체의 완만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국가의 형태를 구상한다는 점까지는 동일합니다. 농본파시즘은 일본의 고유한 정치사상입니다. 서구에서 차용한 것이 아닌, 토착 정치 사상입니다. 따라서 신토불이입니다. 책이 조만간 나올 텐데 이런 내용을 꼭 염두에 두십시오.
(** 원문 袂を分かつ – 옮긴이)
ー『월간일본』지 출판부에서 간행하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곤도 세이쿄의 『군민 공치론』을 재간하려는 참인데 내게 그 해설을 써달라는 의뢰를 해왔어요. 장장 2년여간 10만 자 정도 쓴 원고를 보냈지요. 그 뒤로 함흥차사입니다. 혹시 또 모르지요. 『월간일본』 편집부에서 ‘출간 불가’라는 결론이 내부적으로 나왔는지도요. 애초에 해설이라고 의뢰해 두었으니만큼, 아무리 길어도 고작 200자 원고지 100장 정도 분량일 거로 생각했겠죠. 근데 그걸 갖다가 몇 배나 불어난 원고를 받아놓았으니 얼마나 난처하겠어요? 본문보다 해설이 긴 책을 어떻게 출간하겠냐며 머리를 싸쥐고 있을지 모릅니다.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곤도 세이쿄 사상을 비교적 정확히 논평했다고 자부합니다. 내용에 하자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리라 봅니다.
ー이제 시간이 부족한 감이 있지만 감히 더 여쭙고자 합니다. 예전에 우치다 선생님께서는 젊은이를 상대로 ‘비평적이면서 예의 바른 문체’를 몸에 익혀 두라고 주문하셨습니다. 또한 이렇게 ‘비평적이면서, 예의 바른 문체’의 본보기로 아나톨 프랑스가 쓴 『에피쿠로스의 정원』과 함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천거하셨습니다. 상기 2권과 같은 문장을 ‘찾아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될만한 것과, 그러한 ‘말하기 방식’을 몸에 익히는 법을 아무쪼록 전수해 주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끄응, 고민되네요. 『에피쿠로스의 정원』과 『슬픈 열대』를 어찌 된 영문인지 직감적으로 골랐냐, 하냐면은 그때 무슨 생각이었느냐, 두 저자 모두 굉장히 복잡한 구문을 구사해서 그랬었습니다. 이거는요, 몹시 언짢은 말을 할 때도,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구문으로 써 놓으니까,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당자가 읽어도 눈치를 못 채는 일이 있습니다. 너무나 잘 드는 일본도로 베인 나머지, 머리가 날아가도 모를 정도였다는 얘기가 라쿠고에 있기도 하는데, 뭔 말인지 아시겠어요?
일본으로 치면 나루시마 류호쿠(1837-1884)에 가깝겠습니다. 끝을 모를 정도로 해박한 학식의 소유자인데 그 학식을 ‘옜다’ 하고 핵심만 짚어 떼어줍니다. 거기에 인용된 고전의 일절을 독자가 아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독해의 심도가 변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독자가 읽어도 의미가 이해되고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학식과 교양을 두루 갖춘 독자가 읽으면, 의미가 좀 더 깊은 층에 달하게 됩니다. 독자에게, ‘이 텍스트로부터 쾌락을 끌어내고 싶거들랑, 학문을 하시오’라는 수행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겁니다. 독자에게 지적으로 성장하라고 설득합니다. 이 점에서 데리다라든가 푸코, 라캉 등이 보여주는 ‘난해함’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그 사람들이 쓴 것은 독자가 자기 머리의 내용물을 재조합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들이 들이미는 ‘상식’을 자신 소유의 ‘상식’으로 기본 장착하지 않는 이상 더는 읽지 못합니다. 라캉 유파로 입문하지 않으면 라캉을 이해할 수 없고, 푸코같이 쓰지 않으면 푸코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나톨 프랑스의 ‘난해함’은 그런 종류의 ‘난해함’이 아닙니다. 구태여 아나톨 프랑스가 하는 말을 전부 받아들여 ‘프랑스 파’로 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몹시 논리적인 글이 쓰여 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 논리의 구조가 복잡합니다. 이중 삼중 장치가 되어있기 때문에, 지적인 폐활량을 요합니다. 한 문장을 읽는 도중에 ‘빨리 결론을 내라구!’ 소리가 나옵니다만 어지간해선 얘기가 안 끝납니다.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충분한 지적 폐활량으로 긴 시간 동안 ‘엉거주춤함’을 견딜 수 있는 지적 인내력이 없는 한 다 읽어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읽어 가는 새 독자 그 자신의 폐활량이 늘어나고, 근육도 커집니다. 그렇게 독자를 성장시키는 텍스트라는 말씀입니다.
(* 원문 宗旨替え: ➂ 주의・주장・기호・취미를 바꾸다. - 옮긴이)
지적인 폐활량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야기를 간단히 하지 않는 거요. 곧장 기지(旣知)의 결론이라는 골대로 뛰어들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계속 숨을 참고서, 귀를 열고서, 마지막 마침표까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겁니다. 폐활량은 기술적으로 말해서 횡격막 근육의 힘입니다. 근력운동이라구요, 말 그대로. 따라서, ‘어디로 가는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입 닥치고 읽는’ 과정에서 횡격막의 근량이 늘고, 폐활량이 커지게 됩니다.
독하디 독하고 공격적인 문장은 대체로 단문입니다. ‘뒈져라’나 ‘등신’ 같이 보통 두세 글자로 표현됩니다. 지적인 폐활량이 부족한 사람의 언어 활동은 그런 식으로밖에 될 수 없습니다. 으레 타인을 비판할 때는 복잡한 구문을 놀리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야무지게 상대의 언동을 비판하려면, 반드시 논리적으로 말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지적 폐활량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예의 바름’을 들 수 있겠네요. 아나톨 프랑스와 레비스트로스 모두 실로 예의 바르게 문장을 썼습니다. 이를테면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 첫 머리깨에서 프랑스 식민지 정책에 강한 비판을 가합니다. 이게 굉장히 예의 바르고 또한 논리적이라서, 도저히 욕이라는 생각이 안 드실 거예요. 문장을 진짜 잘 쓰거든요.
중간에 보면 마투그로수에 상륙했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살해당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해당할 만한 짓을 했다는 게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분노를 직접적으로 언어화하고 있지 않아요. 굉장히 논리적이고, 묘사적인 문장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분노, 그들의 식민지주의적인 권력성, 그리고 눈곱만치도 찾아보기 힘든 종교성에 대한 경멸의 염이 행간에서 전해집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부탁하건대 이렇듯 정밀한 문장을 숙독 완미했으면 참 좋겠다 싶거든요.
ー이렇게 직접 여쭈기에 참으로 민망합니다만, 우치다 선생님에 대해 연구할 때 어떤 접근법이 효과적일지 궁금합니다. 혹은 어디를 실마리로 삼아서 우치다 선생님을 논해야 마땅할지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이것 참…. 제가 단서를 알 턱이 없잖아요. 그저 뭐라도 해보는 수밖에요. 여기서부터 쓰면 되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해서 잘 안 써진다 싶으면, 원점으로 되돌아갑니다. 등산과 똑같습니다. 이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되겠다 싶어서 갔는데, 가다가 난코스에 걸렸다 싶으면 그 경우에는 ‘다시 되돌아갈 용기’가 필요합니다. 홀가분하게 지금까지의 등산로를 단념하고, 다른 길로 다시 오르는 것이지요.
한 루트로 나아가다가, 약간 숨이 찬다든지, 붓이 나가지 않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지요. 쓰는 새 점점 무언가 쓰고 싶어지는 것이 떠올라서, 점점 붓이 나가게 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글짓기 스타일입니다. 근데 이거는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등반 루트와 마찬가지로, 한번 오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도 역시 레비나스론을 쓸 적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써보았습니다. 쓰는 와중에 ‘이대로는 앞으로 못 가겠다’는 점을 깨닫고, 그때까지 썼던 것을 전부 갈아엎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요. 이 접근법으로 가다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이 이상 흠뻑 담글 수 없다, 그런 경우는 쓰게 되며 알게 됩니다. 따라서 어느 날부터는 ‘제자적 접근법’을 채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스승의 위대한 예지를 그저 찬미하기만 하는 불량 제자’라는 포지션을 택하니, 갑자기 붓이 휙휙 나가는 겁니다. ‘연구자’라는 포지션에 있는 한 절대 쓸 수 없는 글쓰기 방식이 탄생한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위대한 예지를 앞에 두고서는, 자투리 깨밖에, 정말 손톱만큼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더욱 알고 싶습니다. 따라서, 주춤주춤 기어가듯 갑니다. 그러한 ‘현재진행형’ 글쓰기 방식이 제자에게는 용서됩니다. 하지만 연구자에게는 그렇게 쓰도록 해주지 않습니다.
연구자는 ‘서론’에서 논문의 전체 구조를 부감한 뒤에는, 거기에 제시된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하여, ‘결론’에 이르는 쓰기 방식만이 허용됩니다. 하지만 제자는, ‘서론’을 쓰게 되는 시점에서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쓰게 될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이제부터 등산을 시작합니다’라고 쓸 때는, 어떠한 등반 루트를 타서, 어디까지 다다를 것인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제자입니다. 초입에서부터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좌절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꽤 많이 왔다 싶은 지점에서 그 정신력을 모두 소진해 버리는 그런 경우마저…, 있지요. 하지만,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탓할 것은 못 됩니다. 정상을 목표로 했다는 것 자체가 제자 된 입장에서는 중요한 일이니까요.
따라서, ‘제자 입장 되는 위치(포지션)’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굉장히 여유로운 일입니다. 어떠한 신출내기 연구자라도 예외 없이 적어도 ‘서론’에서만큼은 ‘상공에서 이 논건을 부감하겠다’는 식으로 쓰라는 강요를 받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레비나스 철학은 … 한 것인데’라는 식으로 시작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그게 학계의 규칙입니다. 하지만 제자는 그런 식으로 쓸 수 없으며, 쓰지 않아도 됩니다. ‘스승의 예지는 너무나 위대해서 필자는 그 단편조차 보고 베낄 수 없다’고 첫머리를 잡아도 시작이 가능합니다.
ー저는 우치다 선생님의 유연한 지성을 접할 적에, 무척이나 설렙니다. 이를테면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계실 때조차도,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이 극히 창조적이기까지 합니다. 그 이로를 따라가기만 해도, 우치다 선생님이 쓰신 것이 어떤 내용인지 일목요연하게 다가옵니다. 말하자면 질문의 제기 방식이나 논증의 전개 그 자체에 우치다 선생님의 독자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치다 선생님께 여쭙습니다. 우치다 선생님은 어떻게 사고를 하시고, 그것을 표현하고 계시는지요?
그건 당사자인 본인도 모를 일이기는 한데요. 제가 하는 말입니다만 스스로 쓴 글을 나중에 다시 읽어도 참 재미나겠다 싶은 글을 쓰고자 할 따름입니다. 현재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다룬다 치면, 전에 한번 썼던 것을 다시금 복제해 약간만 바꿔도 술술 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읽어도 재미가 없기 마련이겠지요?
두고두고 읽어도 재밌는 글은 쓸 당시 그 자리에서 비로소 처음 떠올린 생각이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한테 재밌어야 하거든요. 독자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독자는 내 문장이 생면부지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이 ‘비로소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인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 독자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나중에 자기가 읽어도 재밌는 글을 쓸 수 있는지입니다. 난 그런 문장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오늘 진노 씨 만나기 직전에 2024 파리올림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미 한 말을 되풀이하거나, 내가 예전에 쓴 걸 되풀이해도 그건 재미가 없을 테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떠올린 것들을 썼습니다. 올림픽과는 전혀 상관없을 내용이기는 하지만, 뭔가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는 듯한 걸 올림픽과 연관 짓습니다. ‘《요거》는 딱 《저거》네!’ 하는 식으로요. ‘오호라. 이건 아직 아무도 쓰지 않은 올림픽 비평이구먼’ 싶으면, 그걸 써냅니다.
대체로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사히의 『민심천심』 한 번쯤 베껴보셨죠? 거기서는 우선 계절이나 지난 일로 허두를 뗍니다. 그러던 게 도중부터 시사 현안으로 엮어가는 게 상투적이지요.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당면 사건에서부터 먼저 시작합니다. 게서 전혀 다른 시공간 속 주제로 엮는 것이죠. 그렇게 당면 현안의 ‘의외상(相; aspect, 양태나 특질 - 옮긴이)’을 부각시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나는 내가 썼던 책들 이따금씩 즐겨 읽어요. 무도 수련과 집필을 마치고 나서 매일 오후 6시쯤 되면 저녁 차리거든요. 준비 다 해놓고 데우기만 하면 되는 그때, 와인잔을 한 손에 들고서, 내가 예전에 썼던 책을 꺼내와서 읽습니다.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기가 막히네’ 이러면서요. 근데 다음 내용이 어떻게 될지 대중이 안 잡혀요. 자기가 써 놓고서. 그때 딱 떠오른 걸 써놓고, 썼는데도 다 까먹어버려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지지고 볶았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얼씨구. 기술도 좋구먼’ 하고 감탄합니다. 어제는 『망설임의 윤리학』을 읽었어요. ‘야 이거 진짜 재밌네’ 하고 스스로 좋아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인도에 표류해도 아마 괜찮을 겁니다. 책이 없으면 직접 쓸 테니까요. 쓰고 제본하고. 그렇게 몇 권 써서 시렁에 늘어놓고 저녁이 되면 와인잔을 들고 그 앞에 서서 ‘오늘은 뭐로 할까?’ 고민한 뒤에 ‘이걸로 하자. … 아 재밌어 재밌어!’ 이러는 겁니다.
『레비나스 시간론』 같이 호흡이 긴 책은 아무래도 쓴 뒤에는 손이 가지 않지만, 그것도 아마 막상 읽어보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를 거예요. 그거 6년 동안 집필했습니다. 그러니만큼 그때 떠올린 생각 같은 거 다 잊어버렸지요.
어째서 자기가 쓴 책이 재밌냐 하면은 ‘정직하게 썼기 때문’입니다. 아무 데도 ‘얼버무림’이 없습니다. 모르는 건 ‘잘 모르겠다’고 정직하게 씁니다. 제자가 스승에 대해 쓴 책이니만큼, ‘아는 체’는 절대 못 합니다. 모르는데도 아는 체 하는 부분이 있으면 어딘가 걸립니다. 찜찜한 느낌이 듭니다. 자기가 쓴 것이니 얼버무렸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리고 ‘클리셰’ 말이에요, 이것도 진짜 문제입니다. 어디서 들은 정형구를 빌어서 몇 줄 써놓은 경우,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조차, 외면하게 됩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요. 흔해빠진 클리셰는 촉촉하지가 않아요. 자기가 정직한 마음으로 쓴 곳을 훑다 보면 특유의 ‘촉촉함’이 있습니다. 클리셰는 무미건조합니다. 퍽퍽하니까 오히려 뭔가 휘두르는 맛은 있겠지만, 나는 사양입니다. 보습이 중요하니까요. 자기가 그 당시에 막 떠올린 생각은 탱글탱글합니다. 20년 전에 쓴 글인데도 수분이 있어요. 여지껏 척척해요. 재미납니다. 적잖이 설렐 정도입니다.
ー쓰셨던 글을 다시금 읽기도 하시는군요.
곧잘 읽습니다. 하루 종일 머리를 쓰거든요. 정신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자기 책만큼 제격이 없습니다.
ー우치다 선생님께서는 혹 소설을 쓰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안 쓰신다면 그 이유가 살짝 궁금합니다.
나는 나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얼마 전에도 도쿄에 갔을 때 히라카와 가쓰미가 나한테 그러데요. ‘너나 나나 문필가로서 지긋한데 이제 보니 넌 생전 시나 소설 하나 안 쓴다’ 라고. 그 말을 듣고 잘 생각해 봤는데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운반 용기입니다. 그릇이자 통이며 흐르는 것의 매개체입니다. 어묵 먹을 때 보면, 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그거 같은 거예요. 어묵 만들 때 그 소재가 뭔지, 어떻게 가공해서 어떤 형상으로 만들었는지 한 번쯤은 써 붙여 놔도 되지 않겠어요. 근데도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냥 어묵이니까요.
나는 비밀이란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주변 사람 모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어요. 이것만큼은 절대적으로 숨겨야만 한다,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무덤까지 들고 가야 하는 그런 비밀은 나한테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래요. 그런 ‘비밀’을 품은 사람이라야만 시나 소설을 쓸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은 들어요. 뭐 잘은 모르겠지만서도. 문학적 허구가 필요하단 건 그 사람 안에 어떤 트라우마적인 핵이 있는 겁니다. 자기 치유를 위해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뭔갈 써야 하는 그런 경우가 있겠지요. 하지만 역시 트라우마이니만큼 직접적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필연적으로 트라우마적인 핵을 우회하면서 씁니다. 그러한 프로세스가 문학적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나한테는 그런 ‘트라우마적인 핵’이라고 할만한 게 없습니다. 속이 텅 빈 인간이에요. 속이 텅 빈 인간은 시나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ー마지막으로 질문드릴까 합니다. 가토 노리히로 및 세키가와 나쓰오에 따르면 우치다 선생님이 쓰신 글의 특이성에, ‘공’과 ‘사’가 뒤섞여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우치다 선생님께 있어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이며, 또한 ‘공사’의 구분을 어디에 두고 계시는지요.
나는 어디 가서 못 볼, 겁나게 퍼블릭한 인간일 거예요. 퍼블릭 존과 프라이빗 존을 뚝 떼놓고서, ‘프라이빗 공간에는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는 인간이 상당히 많습니다만, 난 아닙니다. 프라이빗, 그런 거 없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 산 적이 없어요. 항상 누군가와 지냈습니다. 어릴 때는 당연히 가족과 함께 살았지요. 고등학생 때 가출해서 연립주택을 빌렸는데, 그건 ‘나 혼자 산다’ 찍으려고 그랬던 게 아니에요. 친구들 아무나 자고 가라는 이유에서 방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왜 집으로 친구들 놀러 오잖아요. 밤새워 떠들고 마작도 치고. 독립하면 매일 친구들을 부를 수 있습니다. 대학 때도 대부분 누군가와 룸셰어링을 했고, 결혼했으며, 이혼한 뒤에도 자식과 함께 살고, 나중에 재혼했으니까. 혼자서 살았던 게 아마 평생 3년도 채 못 되지 않았나 한데. 난 항상 누군가와 같이 살았어요. 이 방면으로 편력도 대단했고. 룸메이트는 누가 되었든 상관없어요. 그래서 남한테 ‘반드시 숨겨야 할 무언가’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참 예전에 친한 사람하고 술 마시다가 드잡이한 적이 있었거든요? “우치다 씨 당신 말이야. 본성을 슬슬 드러내지 그래. 어째서 맨날 입바른 소리만 하는 거야. 당신도 비열하거나 더러운 구석이 있을 거잖아. 뭘 숨기려고 들어. 샅샅이 밝히라고!” 이러면서 목덜미를 낚아채더라고요. 말문이 턱 막히던데요. ‘비열하거나 더러운 구석을 남김 없이 밝히라는 요구’를 해도 나로서는 될 수 있는 한 그런 게 없는 인간이 되기 위해 자기 도야에 힘쓰고 있는 거니까, 내놓으라고 해도 내놓을 게 없어요. ‘넌 위선자에 불과해’라고요? ‘난 『위선자』가 아니야. 왜냐하면 배알이 없거들랑.’ 이러니 다들 두 손 드는 거죠.
정직이란 게 굉장히 중요함을 말씀드립니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할 비밀’ 같은 게 있어 놓으면 나 같은 경우에는 글을 쓰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에요. 적어도 내 입장에선 정직해지는 게 훨씬 생산적입니다. 내가 만약 남에게 말 못 할 비밀을 품은 인간이었더라면, 책을 이렇게까지 많이 쓰지 못했을 거예요. 아직도 나한테는 정직함이 부족하다 싶으니까 이렇게 줄창 써대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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