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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인용 2024. 2. 15. 14:10
그래도 아직 잔학(殘虐)을 부린 것이 부족하여, 이에 부드러운 털을 쪽 빨아서 아교에 붙여 붓이라는 뾰족한 물건을 만들어 냈으니, 그 모양은 대추씨 같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오징어의 시커먼 물에 적셔서 종횡으로 치고 찔러 대는데, 구불텅한 것은 세모창 같고, 예리한 것은 칼날 같고, 두 갈래 길이 진 것은 가시창 같고, 곧은 것은 화살 같고, 팽팽한 것은 활 같아서, 이 병기(兵器)를 한번 휘두르면 온갖 귀신이 밤에 곡(哭)을 한다. - 박연암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라 하여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가 칼로 이루어진 범죄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 합니다. 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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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1984」: Revisited인용 2024. 2. 15. 13:36
성교는 관장을 하는 것처럼 약간은 혐오스럽고도 시시한 작업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각 당원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강조되어 왔다. 그 때문에 완전한 독신 생활을 고취시키기 위해 청소년 반성동맹(Junior Anti-sex League) 같은 조직이 있었다. 어린애는 전부 인공수정에 의해 낳고[신어로 '인수(人受)'라고 함] 공공시설에서 양육한다는 것이 기본방침이었다. 윈스턴은 이것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의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와는 어느 정도 부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은 성본능을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것을 왜곡시키거나 더러운 것으로 규정지으려고 했다. 그는 당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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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인용 2024. 2. 11. 13:10
명보 자신은 소유물에 크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도 종종 제 옷가지나 책 따위를 가난한 친구들과 하인의 아이들에게 아무렇게나 줘버려 꾸중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엔 남들에게 아무리 많이 퍼 주어도 늘 자신에겐 쓸 것이 차고 넘치도록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는 심지어 자신의 희생으로 인해 발생하는 역경을 깊이 음미하며 즐기기까지 했다.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요구하는 의로운 일을 할 때마다 솟아오르는 양심의 만족이 그의 영혼에 밝은 빛을 비추었다. 한편 이런 행복감에 상충하여 균형을 맞춰준 것이 있었다. 명보는 자기 주변의 수많은 타인들에게 이러한 양심의 자각이 부재할 뿐 아니라, 그런 감정을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혐오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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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제트기와 전자 두뇌의 시대입니다.”인용 2024. 2. 9. 23:11
회색 도당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모모의 친구인 어린이들을 자기네 계획대로 조종하는 일이었다. 모모가 실종된 뒤에도 어린이들은 틈만 나면 원형 극장 옛터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환상적인 세계 여행을 떠나거나, 성곽과 궁전을 짓기 위해 그들에겐 몇 개 낡은 상자와 궤짝만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열심히 생각을 짜내 계획을 세우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요컨대, 아이들은 마치 모모가 여전히 자기네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실제로 모모가 여전히 거기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인적자원입니다. 미래는 제트기와 전자 두뇌의 시대입니다. 이 모든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수많은 전문가와 숙련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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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허겁인용 2024. 2. 9. 21:08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겠다는 군민을 설득해 2014년 개장한 국립생태원은 개장 첫해부터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가 퇴임하기까지 3년 내내 목표 관람객 수는 300퍼센트를 초과했다. 죽어 가던 지역 경제가 살아났다. 최재천은 그 모든 것이 군림(君臨)의 경영(經營)이 아니라 군림(群臨)의 공영(共營)이 이룬 결과였다고 한다. 혼자 다스리지 않고 함께 일하면 망하기가 더 어려운 일이라고. 여왕개미가, 침팬지가, 꽃과 곤충이 그에게 속삭이더라고. 생태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SNS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키 작은 꼬마에게 상장을 주기 위해 무릎을 꿇은 사진이 공개되었던 것이다. 그 사진을 보니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하모니처럼 떠올랐다. “서로 상대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일명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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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바보니까요.”인용 2024. 2. 8. 21:22
실제로 학문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자칫 선망의 마음을 넘어서 남을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한 감정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질투는 무언가를 창조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지 않은 감정이라고 단언해 두고 싶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여기서 체념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상대가 안 돼서 단념했어요. 그래도 그리워 못 잊을 그 사람. 이것은 전쟁 전에 유행한 ‘비에 피는 꽃’이라는 노래의 가사인데, 유학생활 동안 나는 가끔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세상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하버드 대학 시절의 멈퍼드와 아틴이 그랬다. 그런 우수한 사람들을 일일이 질투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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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번 트랜스레이션은 확실히 우수한 회사였습니다.”인용 2024. 2. 8. 20:51
어번 트랜스레이션은 확실히 우수한 회사였습니다. 이 말은 번역을 잘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번역 회사는 도쿄에 600개나 있었는데, 실제로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는 전부 프리랜서였고, 거의 같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일하는’ 상태였기에 번역의 질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라면 일거리를 받아 납품하는 ‘창구’, 즉 번역 회사뿐입니다. 그렇다면 경단의 맛이 아니라 ‘이 떡집이 싸다’, ‘납품이 빠르다’, ‘포장지가 예쁘다’ 등 실로 사소한 차이로 경쟁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것입니다. 어번 트랜스레이션은 중간 착취를 최소한으로 억제했습니다. 학생 아르바이트를 연장하는 기분으로 회사를 경영했기 때문에 우리 월급도 낮게 책정했고, 월세도 놀랄 만큼 싼 곳을 빌렸기 때문에 경비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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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판 『커먼의 재생』 서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7. 18:12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커먼의 재생』 문춘문고판을 집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단행본은 2021년에 나왔습니다. 월간지 『지큐 일본어판』에 2016년 7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일종의 ‘인생 상담’*조로 쓴 글을 모은 책입니다. 그런 만큼 맨 처음 꼭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도쿄올림픽**이나 코로나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옛날얘기 지금 와서 읽어봤자 과연 재미가 있으렵니까?’라는 의문이 당연히 솟아오를 겁니다. 용솟음치는 게 당연합니다. 근데 한번 읽어보시면 재미난답니다. 어째서 시사성 하나 없는 글인데도 여태까지 읽을만한 걸까요? 여기에 관한 사적인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ー (* The Professor Speaks라는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