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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
    인용 2024. 2. 11. 13:10

    명보 자신은 소유물에 크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도 종종 제 옷가지나 책 따위를 가난한 친구들과 하인의 아이들에게 아무렇게나 줘버려 꾸중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엔 남들에게 아무리 많이 퍼 주어도 늘 자신에겐 쓸 것이 차고 넘치도록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는 심지어 자신의 희생으로 인해 발생하는 역경을 깊이 음미하며 즐기기까지 했다.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요구하는 의로운 일을 할 때마다 솟아오르는 양심의 만족이 그의 영혼에 밝은 빛을 비추었다.

     

    한편 이런 행복감에 상충하여 균형을 맞춰준 것이 있었다. 명보는 자기 주변의 수많은 타인들에게 이러한 양심의 자각이 부재할 뿐 아니라, 그런 감정을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혐오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저한 공포감을 느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과 전혀 다른 자질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명보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자질의 다름이란 단지 차가움에서 따뜻함으로 간단히 변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마치 목재와 금속 사이처럼 보다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차이였다. 종말이 눈앞에 닥쳐온 듯한 지금 같은 시대에ー그의 민족은 일본의 총검 아래 죽어가고, 세계 전역에 유혈 사태와 폭력이 번져가며, 유럽에서의 대전쟁이 이제 겨우 막을 내린 지금ー사람들이 여전히 대학에 갈 생각을 하거나, 돈벌이가 되는 직위에 오르고자 기를 쓰거나, 자신의 토지에서 더 많은 소득을 짜내기 위해 혈안이 되거나, 어떻게 해서든 재산을 불리는 일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게 명보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들을 둘러싼 이 세계 자체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 말이다. 굶주리는 소작농들이야 나라의 독립에 관심이 없을 수 있고, 가족을 먹여 살릴 곡식 얼마간을 얻을 수만 있다면야 토지의 주인이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괘념치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땅히 작금의 사태를 직관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 이 시대에 주어진 각자의 의무를 기꺼이 이행해야 할, 교육받은 식자층마저도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무관심과 적대감으로 일관하는 것은 명보의 가장 깊은 가슴속까지 찢어내는 행태였다. 심지어 그의 아내조차, 명보가 한국에 머무르며 적절한 공적 직책을 갖는 쪽이나 아니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을 때까지 조용히 재야에 파묻혀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쪽을 더 원할 터였다. 물론 아내가 직접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명보는 그의 내심을 알고 있었다. 결혼 생활 내내, 명보는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그 지점을 아내에게는 결코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에 깊은 실망을 느꼈다.

     

    그가 단이에게 그처럼 매력을 느끼고 이끌렸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주변에 다른 모든 이들과 달리, 단이는 대의에 대한 예리한 인식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공감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었다. 손에 든 모자를 저도 모르게 빙글빙글 돌리면서, 명보는 단이의 총명한 눈빛과 유려하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한 입술을 떠올리고 있었다. 단이의 매력적인 얼굴에서 사람들이 찾아내는 장점이 오직 관능뿐이라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명보가 바라보던 단이의 얼굴은 깊은 지성과 순수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더하여 단이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감동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건 강하고 높은 자긍심이 포함된, 동시에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개방적인 활력이었다.

     

     

    사랑이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가 결국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말하는 셈이다. 이는 인생의 마지막 기차에 오를 때 과연 누구와 손을 잡고 있고 싶은지를 고르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 명보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사랑하는 내 아들 현우에게." 그는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지냈니? 어머니도 잘 계시고? 두 사람 모두 겨우내 따뜻하고 건강하게 지냈길 바란다. 이곳은 무척 춥지만, 너와 네 어머니를 생각하면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구나.

    너도 이제 네 살이 되었으니 전보다 많이 자랐겠구나. 네가 자라는 모습을 나도 지켜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네가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 우리 세 식구가 매일 밤 함께 자던 날들을 종종 생각해 본단다.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때 우리는 참 행복했어. 현우야, 어머니 말씀 잘 들어라. 그리고 네가 더 나이가 들면, 강한 자 앞에서 용기 있고 약한 자 앞에서 관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게 내가 네게 바라는 전부야.

    어머니와 네가 매우 보고 싶구나. 나는 언제 어디서나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으마.

    너의 아버지가

    상해는 여러 정파에 속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는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었다.

     

    그들 모두 같은 대의와 목적에 목숨을 걸고 있었지만, 명보는 곧 자신이 많은 동료 운동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옥살이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러한 내적 경멸은 주로 돈이나 지위를 탐내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성수는 분명 이 집단으로 분류되었을 테지만, 유학 시절 초기에 그와 나눈 순수한 우정을 기억하고 있던 명보는 그렇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구석까지 가본다면 은밀히 그런 감정이 발견될지 몰라도 말이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동안 명보는 어떤 이들에겐 돈이나 지위보다도 권력의 쟁취 그 자체가 더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명보는 늘 첫인상이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믿었고,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평범한 정호의 얼굴에서 매우 희귀한 것을 보았다고 느꼈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서 가장 간절히 찾고자 하는 자질, 다름 아닌 정직함이었다.

     

    거의 예외 없이, 다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제 스스로를 정직한 인물로 여긴다는 점은 오랫동안 명보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필요가 있을 때면 깜짝 놀랄 만큼 영리하고 교활해졌으며, 너무도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느라 심지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정호는 뭔가 달랐다. 이 야수 같은 젊은이가 숨 한번 돌릴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 능숙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의 내면에는 견제와 균형, 이해득실에 따라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게 바로 정호가 이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과 달라 보이는 주된 이유였다.

     

     

    혁명가입네 떠들어대는 이 작자들 모두 계급 폐지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다녔지만, 정작 여기 있는 정호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존중심을 보이는 자는 단 한 사람, 바로 명보였다.

     

    지금까지 내가 정호 동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동지의 발전을 오히려 방해했던 셈이죠. 동지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부터 제일 먼저 가르쳐줬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앞으로 정호 동지의 이름을 걸고 쓰는 모든 글은 정직하고 선한 믿음으로 쓰여야만 합니다. 그게 바로 좋은 이름을 갖는다는 의미니까요. 가문이 어떤지,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유명한지가 아니라요.

    【인용자 한마디】 "한국 문학", 여기까지 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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