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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바보니까요.”
    인용 2024. 2. 8. 21:22

    실제로 학문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자칫 선망의 마음을 넘어서 남을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한 감정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질투는 무언가를 창조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지 않은 감정이라고 단언해 두고 싶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여기서 체념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상대가 안 돼서 단념했어요.

    그래도 그리워 못 잊을 그 사람.

     

    이것은 전쟁 전에 유행한 ‘비에 피는 꽃’이라는 노래의 가사인데, 유학생활 동안 나는 가끔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세상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하버드 대학 시절의 멈퍼드와 아틴이 그랬다. 그런 우수한 사람들을 일일이 질투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그러한 영재들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하거나, 그들이 나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의 재능을 보였을 때 나는 혼자 이 노래를 부르면서 체념하곤 했다. 체념한다고 해서 모두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질투심이 안 생긴다. 그리고 남을 질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기의 정신 에너지가 조금도 소모되는 일이 없고 판단력도 둔해지지 않는다. 결국 그것이 창조로 이어져 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체념하는 기술을 알아두는 것, 그것은 창조하는 데 관련되는 정신 에너지를 제어하고 증폭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소박한 마음

     

    체념한다라는 것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나의 체험담을 이야기하고 싶다.

     

    교토 대학 학생시절에는 집에서의 송금이 없었던 때라, 나는 학비를 마련하고 또 이따금 동생에게 용돈을 보내기 위하여 가정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 국민학교 남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를 가르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그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가르치면 이해 못 하는 것이 없었으며, 그 날 가르친 것 중에서 문제를 내면 쉽게 풀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전혀 복습을 하지 않아서 다음날이 되면 전날에 배운 것을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런 일이 계속 되어서 나는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지난번에는 잘 했는데 왜 지금은 못하지?”라고 물었다. 그 아이는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난 바보니까요.” 나는 할말이 없었다.

     

    만일 그 아이가 “복습을 안 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으면 아마 나는 “왜 복습을 안 했느냐?”라고 야단쳤을 것이다. “사실은 잘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으면 “왜 주의 깊게 듣지 않았느냐?”라고 꾸짖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 바보니까요.”라고 말하니까 할말이 없었다. 바보라면 잘못하는 것은 당연하니까 화를 낼 수도 없다. 그 아이의 말은 나에게 하나의 지혜를 깨우쳐 주었다.

    수학을 공부하다 보면 문제의 90퍼센트를 해결하고도 나머지 10퍼센트를 못 풀어서 막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것은 자칫하면 수학자를 신경쇠약에 걸리게 만드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10퍼센트 때문에 전체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끈기있게 승부를 걸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에 부딪칠 때마다 그 아이의 명언을 소리내어 말해 본다. “난 바보니까요.” 그러면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눈앞이 밝아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바보니까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바보다’라고 자기 자신을 바로잡음으로써 경직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자세를 바로잡아도 나머지 10퍼센트를 도저히 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바로 앉음으로써 사고의 에너지가 되살아나고 이제껏 경직되었던 발상이 새로워지면서 10퍼센트가 쉽게 풀린 경험도 있다.

     

    상대가 안 돼서 포기했어요.”하고 포기하고, “난 바보니까요.” 하고 바로 앉아 보는 자세는 학문을 떠난 일상생활 속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체념의 기술이나 바로 앉는 지혜는 큰 실수를 범한 충격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학문의 즐거움> 99~103)


    영어에 loneness(고독)loneliness(외로움)라는 단어가 있다. 이 두 단어의 뜻은 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명확히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lonelinessloneness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 말이다. loneness를 잃었기 때문에 loneliness가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loneness를 확고히 갖고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어떤 삶과 어떻게 접하더라도 loneliness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조이다.

     

    편견에서 벗어나 친구들이 가진 중요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배우기 위해서도 자기 자신의 loneness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책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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