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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문명 진단 -- 잘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다
    인용 2024. 1. 26. 15:36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족이면 돼. 미나토가 가족이라는 제일 가는 보물을 손에 넣을 때까지…” - <괴물>(2023)

     

     

     

    코사카는 조금 전의 계산대 점원처럼 여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여자를 몹시 꺼렸다. 그것은 여성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남자다움을 전면에 내세운 듯한 남자 역시 기피했다. 양쪽 다 불결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사춘기 소녀 같은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니 도리가 없었다.

     

    (...)

     

    어머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교양이 풍부하며 재치있고, 음악과 영화의 취향도 세련된 사람이었다. 코사카의 아버지와 만날 때까지 전자 오르간 강사였다고 한다. 자택에서 하는 소규모 학원이었는데 평판이 좋아서 먼 곳에서 찾아오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 같은 완벽한 여성이 어째서 아버지 같은 평범한 인간을 반려자로 선택했는지, 코사카는 이상해서 견딜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의 아버지는 변변치 못한 남자였다. 각각의 부위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얼굴은 실패한 몽타주 같았고, 벌이는 적었으며 취미도 없고, 일에 열심인 것도 아니어서 장점다운 장점을 찾을 수 없었다(다만 지금의 코사카에게 '평범하게 가정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할 만하지만).

     

    코사카의 어머니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라 아들에게도 자신과 동등한 노력을 요구했다. 코사카는 철이 들기 전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집에 있을 때는 어머니가 정한 스케줄에 따라 분 단위로 생활했다. 어릴 적의 코사카에게 어머니란 어느 집이나 모두 그런 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품지 않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랐다. 반항했다가는 맨발로 집에서 쫓겨나거나 온종일 식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코사카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의 편애라기보다 일그러진 자기애의 표출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피가 아니라 교육법을 의심하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대다수의 완벽주의자가 그렇듯이 코사카의 어머니 역시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코사카가 방을 어지르거나 지저분한 차림새로 귀가하면 어머니는 몹시 슬픈 얼굴을 했다. 코사카는 혼나거나 매를 맞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괴로웠다. 반대로 코사카가 스스로 방을 정리하거나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면 어머니는 반드시 칭찬해 주었다. 공부도, 운동도 특별히 잘하지 못했던 코사카에게 그것은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또래 아이에 비해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소년이 되었다.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범위에서.

     

    (...)

     

    그녀는 딱 한 달 동안 자상한 어머니를 연기하고, 죽었다. 차를 타고 장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법정 속도를 어기고 과속하던 자동차와 정면충돌했다.

     

    그 사건은 당연히 사고로 결론 났다. 그러나 코사카만은 알고 있었다. 그 도로는 어느 특정 시간대에 자살에 안성맞춤인 장소로 변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장례식 직후, 코사카의 안에서 뭔가가 바뀌었다. 그날 밤, 그는 몇 시간에 걸쳐 손을 씻었다. 어머니의 시신에 닿았던 오른손이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코사카가 얕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안색이 변해서 욕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에 걸쳐 샤워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더럽게 느껴졌다. 배수구의 머리카락, 벽 가장자리의 곰팡이, 창문틀에 낀 먼지. 그것들을 보기만 해도 등줄기에 오한이 퍼지며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렇게 그는 결벽증을 가지게 되었다.

     

    - 미아키 스가루 <사랑하는 기생충>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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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유동물들은 서로 코를 비비고 끌어안고 애무하고 입을 맞추고 얼싸안고 서로 쓰다듬으며 자식을 사랑하는 등의 특별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그런데 파충류에게서는 이런 행동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머릿속에서 R-영역과 변연계가 휴전 상태의 불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아직도 종종 태곳적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는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유동물의 어미와 새끼의 관계를 보자. 어미가 새끼에게 보이는 애정 표현은 포유동물의 본성을 자극하여 변연계의 활동을 도울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접촉을 통한 애정 표현이 결여된 상황에서는 파충류의 행동 양식이 권장될 것이다. 이러한 추리를 가능케 하는 증거가 있다. 해리 할로(Harry Harlow)와 마거릿 할로(Margaret Harlow) 부부가 수행한 원숭이 실험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동료 원숭이를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의 냄새와 소리도 맡고 들을 수 있지만, 피부 접촉은 금지된 우리에 가둬 키운 원숭이들은 우울하고 자폐적이며 자기 파괴적 성향을 보였으며 여러 가지 비정상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보호 시설에서 육체적 접촉 없이 자란 어린이들에게서도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성향의 행동을 볼 수 있다. 피부 접촉의 단절에서 겪게 되는 애정 결핍은 사람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 준다.

     

    신경심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콧(James W. Prescott)이 산업화 이전 단계에 있는 400여 개의 사회를 선정하여 그 문화들을 상호 비교하는 통계 분석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유아기에 피부 접촉을 통한 애정 표현이 발달된 문화일수록 폭력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피부 접촉 문화가 발달하지 않는 사회에서 자란 어린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성생활이 크게 제약받지 않는 사회에서는 이들 역시 성인이 됐을 때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레스콧의 주장에 따르면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들은 주로 육체적 쾌락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한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655~6.

    (이 글에서의 세이건의 의견은 서양 70년대 사회 분위기를 감안해야 한다. - 인용자)

     

     

     

    「누군가」밖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걸 행복이라고는 하지 않아. 「누구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걸 행복이라고 하는 거야.” - <괴물>(2023)

     

     

     

    "아이를 위해서"

     

    , 원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프롬이 지적하는 것처럼 재산, 명성, 권력을 둘러싼 허영의 투쟁에서 패배한 자에게 가정은 마지막 '안전망'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 남자든 여자든 거기서 주도권을 획득한 자는 배우자와 아이를 복종시켜 상실한 자아의 대체품을 획득한다.

     

    그러면 그 가정에서 학대받는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보다도 약한 아이를 '왕따'시키는 정도이다. 결국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 전체를 봤을 때 괴롭힘의 이익을 따지자면 아이 쪽이 큰 적자가 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아이들이 자아를 상실한 어른들이 펼치는 의존증 경쟁에서 최후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다는 의미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어른이 입은 상처를 달래기 위한 노리개가 되는 역할을 떠맡긴다. 아이들은 교육,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어른에게 신체적, 정신적 괴롭힘을 받고 상처 입는다.

     

    이 공격도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식상으로 부모는 '아이를 위한다고 생각해서' 훈육한다. 아이의 슬픔과 기쁨에 일일이 반응하다 보면 아이를 응석받이로 만들고 망가뜨려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애써 엄하게 다룬다는 '의도'.

     

    부모는 아이에게 야심을 심어 주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서 본래의 자기 자신을 버리게 한다. 그 대신 허울뿐인 '정상'적인 행위를 하는 장치를 마련해서 그것이 '자신'을 구성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해서 본래의 자신은 '내 안의 타인'이 된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자 아르노 그륀이 말하는 '자신에 대한 배신'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이를 위해서"라는 부모의 말은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무의식의 작동은 자신이 어릴 때 받지 못한 사랑을 절대 자식에게도 주지 않으려 하고, 대신 자신이 어릴 때 당한 심한 처사를 애정의 표현이라고 칭한다. 독자들은 이미 짐작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이 때 당한 일이고 그리고 내가 내 두 아이에게 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배우자에게서 괴롭힘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때까지, 나는 내 부모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아이들에게 하고 있었다. 나는 비겁하게도, 자식을 괴롭히는 배우자와 공범이 되어 내 고통을 덜고 있었다. 이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오점이다.

     

    어른이 아이의 영혼을 이렇게 짓밟고 틀을 강요함으로써 아이들 또한 자아를 상실하고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들이 어른이 되면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상실한 인간이 된다. 이렇게 해서 괴롭힘은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허영을 둘러싼 경쟁이 재생산된다. 아이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지 말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제대로 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아르노 그륀과 앨리스 밀러는 주장한다.

     

    물론 어른이 아이에게 취하는 모든 행위가 학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이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어른의 비호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비호를 도구 삼아 아이를 지배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진 생명의 역동성이 그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뒷받침해 주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할 일이다. 아이가 곤경에 처하거나 고통받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수단을 제시하고 그 습득을 도와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이다.

     

    - 야스토미 아유미 <단단한 경제학 공부> 275~276.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써 낙관하라.” - 안토니오 그람시

     

     

     

    우에노 지즈코가 꼽고 있는 원조교제 소녀와 이 학생 매춘부에 공통되는 점은, 둘 다 자신을 ‘구매한 남자’를 깔봄으로 해서, ‘상대적인’ 긍지나 우월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그녀들의 신체를 사기 위해 돈을 낸 남자들이, 그녀들 자신보다도 천하고 비열한 인간이라는 사실로부터 인격적인 ‘부력浮力’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인격의 기초로 삼기에는 퍽 취약하기도 하거니와 퇴폐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적 사례는 니체의 ‘초인’이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니체의 ‘초인’은 실체가 있다거나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옆에 있는 인간이 ‘원숭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정신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초인’은 ‘비웃음 당해도 싼 원숭이’, ‘노예’의 속성을 갖고 있는 ‘천민’을 가까이 두고서, 끊임 없는 조롱과 매도를 일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격하게 증오하면서, 그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니체는 ‘거리距離의 파토스’라고 불렀다. 이 혐오감만이 인간 ‘자기 초극의 열정’을 공여한다. 그래서, ‘초인’을 향한 의지를 북돋기 위해, 추악한 ‘원숭이’가 항상 곁에 대기해 있으면서, 혐오감을 휘몰아치게 해주는 일이 꼭 필요하다.

     

    우에노가 소개하는 ‘장한’ 원조교제 소녀와, 미야다이가 소개하는 ‘긍지 높은’ 매춘부에게 공통되는 것은, 매춘하는 남자들이 여성의 신체를 환금 가능한 ‘소유물’이나 관상용 ‘부품’으로만 바라보는 ‘원숭이’라는 사실로부터 그녀들이 이익을 얻는다는 점이다. 니체의 ‘초인’과 같이, 그녀들도 또한 남자들이 영원히 어리석고 열등한 존재로 남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가부장제 사회와 그 지배적인 성적 이데올로기의 영속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 우치다 타츠루, 「성노동자: ‘성노동’이라는 직업」, 『이와나미 응용윤리학 강의 5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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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빚지도록 하라. 그러면 그 사람은 당신이 멋지고 축복받는 삶을 길게 누리게 해 달라고 하느님에게 영원히 기도할 것이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지고 있는 빚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면서, 그 사람은 어떤 사람 앞에서도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할 것이다. 또 당신을 위해 새로운 대출자를 끊임없이 물색해줄 것이다. 그래야만 당신이 그에게 갚을 돈을 빌릴 수 있을 테니까. 말하자면, 그의 주머니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빼앗을 것으로 채우도록 한다는 말이지.

     

    -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부채, 5,000년의 역사』 228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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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사회 개혁 이론이 밟아왔던 짓궂은 운명이 페미니즘 언어론 역시 기다리고 있다. 만약, 어떤 사회가 급진적인 개혁을 필요로 할 정도로 과도하게 억압적이라고 한다면, 사회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좀처럼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모든 사회 제도가 개혁의 시도를 사사건건 방해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회 개혁이 순조롭게 성공했다면, 그 사회는 평판만큼 억압적이지 않았던 셈이 된다. 그로 인해, 사회 개혁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온갖 개혁의 시도가 차례차례 실패하는 편이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이론의 올바른 근거로서는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 개혁의 이론가들은, 그 주장이 급진적이면 급진적일수록, 온갖 개혁의 시도가 실패하기만을 오히려 간절히 바라게 된다. 19세기 이후 사회 개량 운동의 대부분은 그러한 길을 걸었다. 따라서, 1989년에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했을 때 히로마츠 와타루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실패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한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증명했다는 주장을 펼쳐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 우치다의 사상으로서의 페미니즘 비판 / 우치다 타츠루 지음 ; 김석중 옮김. 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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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의 성생활은 대부분이 뇌의 망상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매스컴이 부추기고 있지요. 당연하다고 봅니다. ‘섹스 시장’이 엄청난 규모의 거대한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파트너와 서로 껴안고 속삭이는 걸로는 ‘충분’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 수준에서 둘이 만족해버리면 경제가 무너지고 맙니다. 화장품이나 향수, 의류, 자동차, 펜트하우스, 샴페인, 약물 등 어쨌든 모든 자원과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최고의 섹스’를 추구하게 만들어야(그리고 금방 질리게 만들어야) 경제적으로 유지가 됩니다. GDP 중 ‘섹스 관련 경제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일 거라 예상합니다.

     

    경제성장을 위해 성적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방법론적으로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버블경제 시기에는 레스토랑, 호텔, 스키장, 디스코텍 등 정말 ‘그런 것’만으로도 경제를 웬만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뭔가 좀 쓸쓸하지 않나요?

     

    섹스란 원래 더욱 신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체적 친밀함. 살짝 닿으며 느끼거나 쓰다듬거나 껴안거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거나. 이런 신체적인 생리적 쾌감을 인간은 필요로 합니다. 살이 맞닿을 때의 따뜻함 같은 것이 인간에게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기호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생물적인 것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 타인과 함께 사는 그 난감함에 대하여>, 박솔바로 옮김,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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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행위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는 피부 접촉의 많고 적음이 어떻게 폭력성의 발현과 그런 상관관계를 갖게 됐는지 아직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는 둘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유아기에 피부 접촉이 빈번하고 결혼 전에 성관계가 인정되는 사회가 폭력 성향의 사회가 될 상대 빈도는 2퍼센트이다. 이러한 빈도의 발생이 우연의 소산일 확률은 1:125,000이다. 나는 아직 이와 같이 정확한 예측을 가능케 하는 표현 변수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어렸을 때에는 피부 접촉에 목말라 하고 다 자라서는 성적 접촉을 갈망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목말라 하는 피부 접촉을 누리면서 자랄 수 있다면, 그들은 공격성, 지역성, 지나친 의식(儀式) 행위, 사회 계층 간의 갈등 등에서 초래되는 인간의 야만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자라는 과정에서 앞에서 열거한 야만성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그들이 이룩하는 사회는 파충류의 두뇌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가 옳다면 핵무기와 피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어린이 학대, 성생활의 심한 억압 등은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죄악이다.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아이를 자주 껴안아 주라.

     

    - 칼 세이건, <코스모스>, 657.

     

     

    물론 어른이 아이에게 취하는 모든 행위가 학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이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어른의 비호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비호를 도구 삼아 아이를 지배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진 생명의 역동성이 그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뒷받침해 주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할 일이다. 아이가 곤경에 처하거나 고통받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수단을 제시하고 그 습득을 도와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그들도 자라는 과정에서 앞에서 열거한 야만성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그들이 이룩하는 사회는 파충류의 두뇌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가 옳다면 핵무기와 피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어린이 학대, 성생활의 심한 억압 등은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죄악이다.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아이를 자주 껴안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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