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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2023) 일본 공식 팸플릿 해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6. 7. 13:26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얼마 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는데, 각본을 쓴 사카모토 유지 씨가 같은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운 좋게도, 필자는 이 영화의 공식 팸플릿에 해설을 기고하게 됐다. 축의(祝意)를 담아 블로그에 게재한다.
     
     
    괴물을 제어하는 주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한 마리 ‘괴물’을 기르고 있다.
     
    필자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반 세기 정도 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의 와중에서였다. 당시 캠퍼스는 종종 ‘무(無) 경찰 상태’가 되었다. 어떠한 막심한 짓을 해도 형사벌(刑事罰)을 받을 리스크가 없는 상황이 되면, 폭력성을 자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적지 않게 있다는 점을 필자는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보통 때는 ‘평범한 사람’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학생의 형상이 돌변하여, 무시무시한 폭력을 휘둘렀다. 시간이 좀 지나고 캠퍼스에서 스쳐 지나갔던 때에는, 종래의 딴사람처럼 ‘평범한 얼굴’을 하고서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그 시절, 수많은 학생이 똑같은 신분인 학생에게 살해당했으며,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경우,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따라서, 젊었을 때 사람을 죽였다든지, 평생 남을 정도의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나중에 취직을 하고, 샐러리맨이 되었으며, 지금쯤은 이제 연금 생활자가 되어있다고 본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아무도 그 과거를 알지 못한다.
     
    2차 대전 때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평소 같았으면 평온한 아저씨나 수줍은 청년이었던 사람들이, 어떠한 일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상황에 던져졌을 때에 ‘딴사람 같은 형상’으로 바뀌어, 약탈하고, 방화하고, 강간하며, 살해한 적이 있었다는 점을 필자는 믿는다. 그들은 소집이 해제되고 나서, 다시 원래대로의 평온한 아저씨나 수줍은 청년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개인적인 가설이지만 그들이 풀어놓았던 ‘괴물’은, 아마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이형적(異形的)이라고 치부했어야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심리적 부담을 덜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즉, 자기 성격의 연장상이라고 보게 되면, 예를 들어, 폭력적이라든가, 질투심 깊다든가, 거짓말쟁이라든가 하는 ‘흔한 악덕’이 과격화한 모습이 자신의 ‘괴물’이었다면, 아마 우리는 그 폭주를 저지하려 들 것이다. 그 ‘괴물’은 숨길 것 없이 ‘자기 자신’에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된 이상, 자신에게 ‘생산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물’이 자기 자신과는 전혀 닮지 않은 것이었다면 어떨까. 마치 누군가와 뒤바뀐 것처럼 딴사람이었다면 어떨까. 그 경우는, ‘평소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에, ‘괴물’이었던 자신이 했던 짓을 악몽의 단편과도 같이 애매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꿈 속의 자신이 범한 잔학무도이니만큼, 찝찝한 꿈에서 깨어나고 나서는, ‘나’의 양심이 심하게 찔리지는 않게 하기 위해서.
     
    필자가 한때 대학에서 보았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총총 발걸음을 옮기던’ 학생들은, 아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저기 먼 악몽의 단편 정도로 축감(縮減)시켜서, 마음을 찌를 정도의 리얼리티는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을 기르고 있다. 그 ‘괴물’이 본인 성격 특성의 연장인 경우 (호리의 연인이 갖고 있는 에고이즘이나 교감의 보신주의, 요리의 아버지의 폭력같은 ‘흔한 악덕’이라면), 그들이 풀어놓은 ‘괴물’은 그렇게까지 상상을 초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소에 온화하고 자상한 사람이 내면에 기르고 있던 ‘괴물’이 해발(解發)되었을 때, ‘괴물’은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완전한 이형(異形)의 것이 된다. 그러한 ‘괴물’은 아무도 제어할 수 없다. 괴물에게 ‘생산자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평범한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아직 확실한 자기상을 형성하고 있지 않다. 사소하게 장면이 바뀌고, 인물 배치가 바뀌기만 해도, 아이는 정말 딴사람처럼 된다. 그 가소성이야말로 ‘아이다움’의 본질이지만, 그 탓에 아이들은 ‘괴물’을 풀어놓았을 때에도 자신이 그 기원이라는 자각을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풀어놓는 ‘괴물’은 무섭다.
     
     
    (2023-06-02 13:0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영화는 죽었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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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한국의 메가플렉스 영화관 CGV사에서 <괴물2023> 개봉 기념으로 일본어 원어 팜플렛을 판매하였을 적에, 기간 한정으로 그 번역본을 인터넷상의 PDF파일로 제공한 것을, 블로그 운영자가 무단 전재한 것이다.)

     

    P.34-P.35
    Column
    괴물을 제어하는 주체
    우치다 타츠루(사상가・무도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한 마리의 ‘괴물’을 키우고 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반세기 정도 전 학생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였다. 당시 캠퍼스는 자주 ‘무(無)경찰 상태’가 되었다. 어떤 부도덕한 행동을 해도 형사죄를 받을 리스크가 없는 상태가 되면 폭력성을 자제할 수 없게 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을 나는그전까지는 몰랐었다.
    평소에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던 학생의 얼굴이 급변하면서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얼마 뒤 캠퍼스에서 스쳐 지나갈 때는 또 다른 사람처럼 ‘평범한 얼굴’을 하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 시절, 많은 학생이 같은 학생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심한 부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경우,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젊었을 때 사람을 죽였거나 평생 남을 정도의 부상을 입혔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후 취업 활동을 하고 월급쟁이가 되어 지금쯤 이미 연금생활자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이전의 전쟁 당시에도 똑같았을 것이다. 평소에는 온화해 보이는 아저씨나 내향적인 청년이었던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 상황에 내던져졌을 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되어 약탈하고, 방화를 저지르고, 겁탈하고 살해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들은 복원(復員. 군대나 군인을 전시 동원 체제에서 평시 체제로 되돌림-역자)된 후, 다시 원래의 온화한 아저씨나 내향적인 청년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가설이지만, 그들이 불러낸 ‘괴물’이 평소 그 사람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이형적인 모습이어야 본인에게 심리적 부담이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즉, 자신의 성격의 연장선상에서 예를 들어, 폭력적이라던가, 질투심이 강하다던가, 거짓말을 잘한다던가 ‘흔히있는 악덕’이 과격화된 형태가 그 ’괴물’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그 폭주를 멈추려 할 것이다. 그 ’괴물’은 틀림없이 ‘나 자신’에서 기원한 것이며, 그렇다면 본인에게 ‘제조자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물’이 자기 자신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면 어떨까. 마치 누군가와 뒤바뀐 것처럼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런 경우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 ’괴물’이었던 자신이 했던 짓은 악몽의 단편처럼 애매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기분 나쁜 꿈에서 깼을 때 꿈속의 자신이 저지른 비도덕적이거나 잔학했던 모습에 ’나’의 양심이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과거에 내가 대학에서 봤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던’ 학생들은 아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던 것이리라. 기억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먼 악몽의 단편 정도로 축소되어 마음에 박힐 정도의 현실감을 잃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형태의 ‘괴물’을 키우고 있다. 그 ’괴물’이 본인의 성격특성의 연장선상(호리 여자친구의 에고이즘이나 교감의 처세, 요리 아버지의 폭력과 같은 ‘흔히 있는 악덕’)에 있는 경우, 그들이 불러낸 ’괴물’은 상상을 초월할 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 내면에 키우고 있던 ‘괴물’을 불러냈을 때, 그 ‘괴물’은 누구도 보지 못한, 완전히 다른 형태의 것이 된다. 그런 ’괴물’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 괴물에 ‘제조자의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평소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아직 확실한 자아상을 형성하고 있지 않다. 아주 약간 장면이 바뀌고 인물 배치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그 가소성(可塑性. 외부의 힘을 받아 형태가 바뀐 뒤 그 힘이 없어져도 본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는 성질-역자)이야말로 ‘아이다움’의 본질이지만 그로 인해 아이들은 ‘괴물’을 불러냈을 때도 자신이 그 기원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불러내는 ’괴물’이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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