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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기시다 총리 암살 미수: 테러리즘에 관하여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7. 3. 13:54기시다 총리 총격 사건과 관련, '정치적 테러리즘'을 둘러싼 <월간 일본> 6월호 인터뷰에 응했다. 그것을 채록해 둔다.
- 아베 전 총리의 총격 사건에 이어, 기시다 총리 총격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치다 님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우치다 이번 사건에서는 아베 전 총리 사건만큼의 놀람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사망자나 부상자가 나오지 않은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총격범의 동기나 행동의 의미가 불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시다 총리를 노림으로써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 두 사건의 총격범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테러리즘의 요건을 충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테러리스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수단으로는 실현 곤란한 정치적 주장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테러입니다. 제3자가 등장해서 '그는 어찌하여 이런 행위에 나섰는가' 에 대해 이래저래 해석할 가능성을 테러리스트는 남기지 않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암살했던 이시카와 현 무사 시마다 이치로는 그 성명서[斬奸状]에 '관료 폭주[有司専制]의 폐해를 단속하고, 속히 민회를 일으키라'고 테러의 목적을 밝히고, 베어 마땅한 간괴[姦魁; 奸魁]로 오쿠보 외에 기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폭탄을 던졌던 현양사[玄洋社]의 구루시마 쓰네키는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상이 추진한 '굴욕 조약' 체결 반대 운동의 선봉이었으며, 현양사의 간판을 짊어지고 테러를 결행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띠는 의미에는 여타의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테러리스트는 본래 목숨 부지하기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시마다는 자수하여 참살당하고, 구루시마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을 베었습니다[自刎]. '일인 일살[一人一殺]'을 내걸었던 혈맹단[血盟団]의 테러리스트들도, 테러 뒤 그 자리에서 자재(自裁)할 작정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이상, 자신의 목숨도 내어놓습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나치 독일 점령 하의 저항 운동 가운데 쓰여진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레지스탕스의 테러를 윤리적으로 긍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를 선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습니다.
구루시마의 테러로 오쿠마 시게노부는 한 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습니다만, 구루시마가 자신의 정치적 신조에 따라 목숨을 버린 일을 높게 평가해, '적어도 외무대신인 본관에게 폭렬탄을 먹여 여론을 뒤집으려 했던 용기에는, 만용이든 뭐든 탄복한다'고 상찬하며, 구루시마의 제삿날[法要]에 매년 대리인을 보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오해의 여지 없이 밝힘으로써 행위에 임하는 정치적인 성실함,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윤리적인 긴장, 이 두 가지가 '정치적 테러리즘' 성립의 조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 있는 경우, 그것이 정치가를 표적으로 했다 해도, 범인을 '테러리스트'로 불러서는 안됩니다. 단지 '폭한(暴漢)'일 뿐입니다.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가벼이 써서는 안 됩니다.
총격범들은 둘 다 곧장 붙잡힌 탓에, 그 자리에서 자결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성명서'를 쓸 시간적 여유는 있었을 터였습니다. 왜 이 행위가 필요했는가를 세상에 호소할 수단은 있었을 터였습니다. 그것을 게을리했으므로, 성장 배경이나 가족 관계, 본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익명 트위터 등의 정황 증거를 쌓아올려서, 제3자에게 동기를 추측하게끔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이에게 자기 행동의 동기에 대한 해석을 맡긴 점이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던 이유는, 총격범들 자기 자신이 어째서 이런 행동을 취하기에 이르렀는가, 그 연유를 실은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휘두르려고 마음먹었지만, 그 의미를 자신으로서는 언어화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선 행동을 해 두고, 제3자에게 자신을 대신해 설명케 합니다. 이는 정말로 미숙하고,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폭력 충동에 몸을 맡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일련의 총격 사건은 '민주주의의 파괴 행위' '민주주의를 뒤흔드는 폭거' 등으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들은 자민당 정권을 비판할 때에 사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치다 그 비판은 원인과 결과를 착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러가 일어나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테러가 일어납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다양한 정치적 의견의 대표자가 의회에서 의논을 행하고, 합의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물질화된다... 는 정치 시스템입니다. 설령 소수파라 할지라도, 국민의 의견인 한, 정부는 그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길어올려서, 실현시켜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정부는 정권 여당에 투표했던 유권자의 이익 대표가 아니라, 반대파에 투표했던 유권자 역시 포함한 '국민 전체의 대표자'가 아니면 안 됩니다.
소수파의 의견이, 민주적 절차를 거쳐,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되는 프로세스가 제대로 기능한다면, 정부에 대한 폭력 행동이 빈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수파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지고, 음미되며, 실현되는 프로세스가 정비되어 있는 한, 반대파 사람들도 민주주의의 통치 기구를 파괴하려 들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투표행동, 합법적인 시민 활동, 노동 운동이나 학생 운동을 통해 정치에 관여하는 데 그칩니다.
하지만, 이 프로세스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면, 소수파에 속하는 국민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이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없다'는 무력감과 소외감에 붙들리게 됩니다. 그것이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투표율이 저하 일로를 맴돌고 있습니다. 기권하는 유권자는 '선거에 참여해도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반수의 국민이 자신의 한 표에는 현실 변성력(變成力)이 없다는 무력감에 갇혀 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에 있어 위기적인 징후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자민당-공명당 연합 정권은 자신들 지지층의 이해만을 대표하고, 그밖의 국민의 요망에는 거의 '무응답'으로 임하려 했습니다. 보통은 정부가 강권적, 압정적(壓政的)이 되면, 민심은 이반하기 마련입니다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독재적이 될 수록, 국민은 위축되고, 소수파는 기가 꺾였습니다. 이런 '성공 체험'이 정부의 오만함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 어째서 일본에서는 민주주의가 기능하지 않게 된 것입니까.
우치다 일본의 위정자들이 이런 '성공 체험'에 고착해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이란, 호세 이 오르테가가 갈파한 대로, '적과 함께 살고, 반대자와 함께 다스리는' 것입니다. 위정자는 자신의 반대자나 정적을 포함한 전 국민의 대표로서, '공인'으로서 처신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물론, '적과 함께 살고, 반대자와 함께 다스리는' 일은 굉장히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심기도 불편합니다. '공인'이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장면에서 '참으면서 내색 않기[痩せ我慢]'를 강요당하며, 반대파들과 무릎을 맞대고 아무리 숙의해도 얻는 것은 기껏해야 '모두가 똑같은 정도로 불만'인 정책 뿐입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상부에 전권을 위임하고, 그 아젠다에 찬성하는 자들만으로 정부를 형성하여, 반대자는 전부 배제합니다. 그렇게 상부의 결정이 지체 없이 말단까지 시달되는 시스템이 '효율성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민간에서는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주식회사가 돌아가는 방식은 그렇습니다. 주식회사라면 상부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원은 좌천되고 해고됩니다. 상부에 찬동하는 사원이 중용됩니다. 정책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서 사회에서는 의논하지 않습니다. 상부가 결정해서, 그 성공 여부는 '시장이 판단합니다'. 정책 판단이 옳다면 주가가 올라갑니다. 틀리다면 내려갑니다.
비즈니스적 측면에서라면 '그럴듯하게' 들립니다만, 현재 일본에서 행해지고 있는 정치는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은 '주식회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시장'의 정의 자체가 다릅니다.
주식회사의 경우 주가는 시장이 결정합니다. 그리고 '시장은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하는 비즈니스맨은 없습니다. 그럼, 정치에서 말하는 '시장'이란 무엇일까요. 원래대로라면 '일본의 국력 평가'가 그에 해당할 터입니다.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presence], 외교력, 경제력, 문화적 측면에서의 메시지 전달 능력[発信力] 등등. 하지만 아시다시피, 일본의 국력은 지난 10년 간 오로지 내려가기만 하고 있습니다. 경제, 인권, 언론, 교육 등... 이런저런 지표에서 일본은 선진국 최하위가 정위치입니다. 이는 원래대로라면 '경영 실패'를 의미할 터입니다만, 일본에서는 그렇게는 해석되지 않습니다. 이는 즉 현재 정부는 '시장'을 '선거'로, '주가'를 '의석 획득수'로 바꿔쳐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거에서 다수파의 위치에 자리매김했다. 민의를 얻었다. 다시말해, 이제까지의 정책은 전부 옳았다'라는 참으로 비논리적인 이유가 일본에서는 버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주식회사에서는 독재가 허용됩니다. 윗선의 경영 방침이 맘에 들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 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경우는 정부가 맘에 들지 않으니 일본인임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일본에서 생업을 영위하고, 이 땅에서 집단을 형성하며, 여기서밖에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정치에 못 견딘 나머지, 해외로 도피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줌입니다. 1억 명 이상의 사람은 일본 열도를 나와 살 수 있을 만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상황은 기업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지만, 작금의 정권 여당은 '상부의 경영 판단에 반대하는 인간은 해고'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정에서도, 소수파 국민의 의견은 길어올릴 필요가 없다는 식이 됩니다.
하지만, 소수파를 무시하는 정치가 지속되고, 소수파 국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이 실현되는 회로가 어디에도 없다' 하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민주정은 더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소수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리얼리즘입니다. J. S. 밀은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다수파가 소수파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다수파의 전제'에 경종을 울렸습니다만, 그것은 '소수파의 의견도 들어둡시다' 하는 친절심의 발로가 아니라, '소수파의 의견을 거두어들일 회로를 확보해 두지 않으면, 근자에 소수파는 테러나 쿠데타에 따른 폭력적인 방식으로 정책 결정에 관여하려 든다'는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국민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 관계가 필요합니다.
- 하지만, 현재 일본에는 그러한 공포심이나 긴장 관계가 실종되어 있습니다.
우치다 정부와 국민 사이의 대립 관계는 깊어가고 있습니다만, 정부 측에서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줄창 퍼올림으로써, 코어 지지층을 굳히고 있습니다. 정치적 자원은 유한하니, 코어 지지층에 자원을 마구 퍼주기만 하지, 그 밖의 반대파 국민, '무당파' 국민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안 쓰게 됩니다. 여기서도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권의 코어 지지층에 국부가 편재하고, 다수의 국민은 손해를 봅니다. 이렇게 되면 국민 사이의 대화와 합의 형성은 차츰 어려워집니다. '다 같은 일본인이잖은가. 일련탁생(一蓮托生)이다'라는 식으로 국민적 통합을 이루는 일이 곤란해집니다.
스가 정권 때의 일본학술회의 신규회원 임명 거부 사건이 적절한 예입니다만, 그건 '정부를 비판하는 학자에게는 공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정권의 엄포를 어필했던 것입니다. 정부에 아부하는 '어용 학자'밖에는 공적 지원을 얻을 수 없는 시스템이 되고 나면 아마 학자나 지식인은 정부 비판을 삼가게 되겠지요. 하지만, 권력에 대한 충성도로 하여금 학술적 능력 평가를 대신하게 되면, 일본의 학술에 내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이런저런 영역에서 '정권 지지자인가/반대파인가'하는 이단 심문[踏み絵]이 마련되어 있어서, '반대파'를 택한 경우에는 '자원 배분을 받을 수 없다'는 룰이 철저화되어 있습니다.
- 애초에 근대 시민 사회론에는, 저항권이나 혁명권이라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악정(悪政)이나 폭정을 행하는 위정자를 폭력적으로 쓰러트리는 일은 허용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만.
우치다 민주주의에는, 강권적인 정부에 대한 저항권·혁명권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민주주의는 왕정을 타도하고, 그것을 대신하기 위한 정치 이론이므로, '인민의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부정하는 정부를 쓰러트릴 권리가 인민 측에 있다고 간주되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에서도 미국 독립전쟁에서도 그때까지의 지배자를 시민이 쓰러트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습니다. 따라서, 미국 독립 선언에는 '인민은 정부를 개조 또는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권리가 있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1년 후에 제정된 합중국 헌법에는 더는 저항권·혁명권은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까스로, 수정 제 1조에 '인민이 평온하게 집회하고, 또한 고통의 구제를 요청하기 위해 정부에 청원할 권리'라는 희석된 표현으로 남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평온하게(peaceably)'라는 조건이 붙어있는 이상, 이를 저항권·혁명권을 보장한 조문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 일련의 총격 사건 이후, '폭력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증세로 국민의 고혈을 강탈한다든지, 헤노코(辺野古) 이전 관련 반대 주민을 배제하고 자연을 파괴한다든지 해서 국민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후텐마 비행장을 같은 오키나와의 헤노코 해변을 매립해 이전시키려 한다 - 옮긴이). 정부의 폭력에 대해, 국민이 폭력으로 대항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겠습니까.
우치다 정치 권력은 폭력 장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대항하는 일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탄압에 저항한다'는 의사표시를 위한 상징적인 행동이지, 그 자체는 정치적 폭력의 발동이 아닙니다.
정부는 국민에 대해 폭력을 휘두릅니다. 압도적 강자이므로, 시민이 정부에 폭력으로 대항해도 승산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민이 비합법적인 폭력에 호소하면, 정부의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하고 맙니다.
강자에의 대항 수단은 폭력이 아닙니다. '윤리적 우위성'입니다. 정부가 윤리에 반하는 행위를 해도, 시민은 똑같은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폭력에 휘둘리고, 모욕을 받아도, 윤리적인 우위는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시민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헤노코 이전 반대 운동이 아직까지 강한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권력의 불합리에 대해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피해자의 포지션에 인내심 강하게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반대 주민이 기동대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게 된다면, 토사 반입 사업이 당분간 정체된다 하더라도, 반(反)기지 운동은 그 시점에서 끝났었겠지요.
소수파의 최대 무기는 권력에 대한 윤리 우위성입니다. 일견 힘이 약해 보이지만, 결코 무력하지는 않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승리의 선례가 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도, 킹 목사의 비폭력적인 공민권 운동도 그렇게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우리도 그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결코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억제를 간직하며, '권력의 부조리를 용납지 않는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명하는 것입니다.
- 2차 대전 이전의 일본에서는 경제 불황에 따라 정치 불신이 확산되어, 테러나 쿠데타가 일어나 정당 정치가 붕괴했습니다. 이러한 2차 대전 이전의 역사는 현재 상황과 유사합니다. 전전(戰前)의 역사는 반복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치다 역사가 반복된다고는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차 대전 이전의 테러나 쿠데타를 주도했던 것은 몇 명 정도의 사상가였으며, 실행 주체는 군부였습니다. 오카와 슈메이, 기타 잇키, 곤도 세이쿄 등은 각자 이상으로 삼는 국가상을 제시했고, 그에 공명(共鳴)했던 청년 장교가 군대를 움직여 쿠데타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는 현재의 일본을 대체할 만한 국가상의 얼터너티브를 제시할 수 있는 스케일을 가진 사상가도 없고, 독자적 정치 판단으로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군인'도 없습니다.
자위대는 경찰예비대 창설로부터 따지면 7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만, 전쟁 이전 시기에 대한 반성도 있고 해서, 정치에의 관여를 피하고 있습니다. 자위대의 일부가 '자위대 정권'의 수립을 요구해, 조직적인 테러나 쿠데타를 일으키는 일은 우선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자위대에 사상 교육을 위해 초빙되고 있는 강사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거개가 현 정권의 지지자들입니다. 현 정권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은 조직이 정권의 전복을 기도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 가령 전쟁 이전과 똑같은 조건이 갖춰지고, 자위대가 테러나 쿠데타를 시도해도, 그것은 반드시 실패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최대의 폭력 장치는 자위대가 아니라, 주일 미군이기 때문입니다.
우치다 만에 하나, 자위대가 일본 국내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킨다고 해도, 주일 미군의 허락을 사전에 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위대 항공기가 미군 기지 상공을 무허가로 비행하는 일을 주일 미군은 허가할 리가 없으므로, 자위대가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면, 그것은 주일 미군과의 공동 행동이 되는 셈입니다. 요컨대, 백악관이 당해 시점의 일본 정부를 '폐절(廢絶)하라'고 명령했을 경우입니다. 일본의 '속국화'가 한계까지 이르러, 이제 더는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때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 전쟁 이전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면, 과연 일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치다 현재, 일본의 민주제는 붕괴 과정에 있습니다. 이대로 정부와 그 '추종자'들이 공권력을 사적 목적으로 유용하고, 공공재를 사재화하는 네포티즘 정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은 후진국으로 전락하겠지요.
- 현재 일본에서는 반체제 운동이 백안시되고, 국민은 '저항의 원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천황에 근거를 둔 '저항의 원리'가 기능해 왔습니다.
우치다 일본에서는, 천황과 국민이 중간적인 권력 기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결부되는 정체(政體)를 이상으로 삼는 '일군 만민(一君萬民)'의 사고방식이 깊이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자유 민권 운동(이로 인해 헌법 제정과 제국의회 개설에 이르렀음 - 옮긴이), 쇼와 유신 모두 목표로 했던 정체(政體)는 원리적으로 전부 같습니다. '일군 만민의 공동체[commune]'입니다. 일본에서는 '일군 만민' 이외의 이데올로기가 정치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일은 과거에는 없었습니다.
'일군 만민' 이데올로기로 정치 혁명을 기도했던 것은 미시마 유키오가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일군 만민'의 슬로건에는 정치적 환기력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미시마가 말한 대로, 이미 '단현(断弦)의 시기*' 가 지나서, 그로부터의 일본인은 전통적인 '저항의 원리' '혁명의 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을 미시마는 개인적인 테러를 통해 확인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 미시마 유키오의 <문화 방위防衛론(1968)>: "다채로운 음색이 흘러넘치지 않는 것은, 어딘가에서 단현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출전은 고대 중국 문인인 庾信 513~581. 미시마 등의 군부 쿠데타 미수는 1970년 도쿄 이치가야에서 일어남. - 옮긴이)
하지만, 천황이 사세의 정치 권력과는 연고가 없는 경지를 영위하며 윤리적 탁월성을 체현하고 있는 유일한 정치적 존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국민 사이에 정치적 허무주의가 확산되었음에도, 아직 사회가 도덕적 무질서 상태까지 무너지지 않고서 어떻게 풀리고 있는 까닭에는, 천황제의 윤리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일본의 민주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입헌 민주주의와 천황제를 공존시키는, 일본의 독자적인 정체(政體)를 일본인 스스로 구상하고, 창조해 나가야만 합니다. (4월 23일 인터뷰어·구성 杉原悠人)
(2023-06-23 19:1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말학의 변론(Apology)
일본 어문을 다루는 제(諸) 아시아 민(民)의 숙명입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 옵니다.
저는 독자 여러분의 양식을 우선 신뢰합니다. 강요드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치다 선생님이 뭔가에 대해 '그렇다'고 하면 '그렇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적어도 다카하시 겐이치로 상은 그렇게 알아두라고 했습니다. 뭔가 '수태고지'를 받은 성모와도 같은 심정입니다.) 정신과의 단골손님이었던 저는 이제 함부로 죽을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한국인 동포 여러분께 이렇게 해서까지 우치다 선생님의 천황론을 설득드리고자 하는 정을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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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1969년에 도쿄대학으로 시험을 치러 갈 예정이었지만, 1969년 1월에 '야스다강당 사건'이 일어나 도쿄대학은 입시를 중지했습니다.
1년 동안 재수하고 난 뒤 1970년에 도쿄대학 문과III류라는 문학부 진학 코스에 입학했습니다. (...) 며칠 후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에 있는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969년 5월 도쿄대학 전공투 대 미시마 유키오의 싸움이 고마바 캠퍼스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한마디는 출판 이전부터 옮겨 말하기 게임처럼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미시마는 전공투가 '천황'이라고 한 마디만 했으면 야스다강당에서 함께 농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내게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읽었습니다. '방패의 모임'같은 의사 군사 활동의 유효성에는 회의를 품었지만, <우국>이나 <영령의 소리>에는 말 그대로 압도당했습니다.
세계를 뒤흔드는 강렬한 정치적 운동을 위해서는 영적 에너지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미시마 유키오만큼 주저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정치 활동을 성공시키려고 하면 전 국민적으로 정치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지렛대'가 필요한데, 그것이 '천황'이라고 미시마 유키오는 말했지요.
나는 이 말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고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대의 측면으로 볼 때 우리는 실로 '전후 민주주의'의 한가운데서 자랐기 때문에 천황제가 어떤 정념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신체적 감각은 없어도 미시마 유키오가 '있다'고 하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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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제도에 대해 같은 잡지사에서 우치다 선생님을 근년에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https://ogdb.tistory.com/m/217유명한 ‘마코 공주’로 알려진 분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가십거리로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정말 좋지 않지만, 그래도 부디 읽어주시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천황제를 거론하는 <월간 일본>사의 신인 보증과 관련해 다음 글도 참조 부탁드립니다. https://ogdb.tistory.com/m/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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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여기까지 오니 진땀이 다 날 지경입니다.
http://gekkan-nippon.com/?p=14234
- 최근 일본에서는, 특히 보수파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한 감정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 이전의 일본에서는 현양사의 도야마 미쓰루(頭山満)을 시작으로, 우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조선반도에 '심파시-(sympathy; 동정, 공감, 공명, 심정적 동조 - 옮긴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카지마 씨는 <아시아주의>라는 책에서 그 양상을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조선반도와의 관계를 중요시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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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다케시 천황주의나 내셔널리즘은 국민주의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내거는 '일군 만민' 사상이란, 천황이라는 초월적인 일군(一君)을 둠으로써, 그 이외의 만민을 평등한 존재로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일부 꾀가 있는 듯한 계책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를 독점적으로 통치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전근대적인 봉건제도나 메이지 정부의 전제적 정치에 반대하고, 자유 민권 운동에도 참가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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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마는 김옥균에게, 지난날의 자기 모습을 비춰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과 똑같은 일을 이웃 나라에서 하려 하는 김옥균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러 옵니다. 이에 거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김옥균의 운동을 서포트하고, 더욱이 일본과 조선이 연대하여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되받아쳐주자는 사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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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世紀の一時期において,両国の間に不幸な過去が存したことは誠に遺憾であり,再び繰り返されてはならない」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김용술, 윤구. "日皇, 「不幸한過去」謝過". 경향신문, 1984년 9월 7일.
"일본의 권력구조는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적 권위로서의 천황과 세속 정치권력의 '이중 초점'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 두 권력구도 가운데, 천황은 여성젠더화됩니다. 천황이 좀 더 근원적인 권력자입니다. 따라서, 일본인은 권력관계라는 것을 '부자관계' 라기보다는 '모자관계' 에 가깝게 이해합니다." 内田樹, 「対米従属の根源は日本人の「幼児化」だ」, 『月刊日本』, 2021년 5월.
"본고는 그가 신도에 주목한 이유를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종교 개념과 함께 봄으로써,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를 비롯한 다이쇼 생명주의라는 지적 자장하에서 생명의 의미를 비교함으로써, 표현이라는 개념을 천황과 주권의 관계를 설명하는 국체 논쟁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그리고 이들 논리들의 기저가 되는 서양의 지적 영향을 함께 봄으로써 가케이의 난해한 사상을 정리하고자 했다. (…) 이처럼 신도는 고정화된 이념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맞추어, 당대의 사상과 접속하면서, 특히 이데올로그들의 필요에 따라 변화해 가는 일종의 담론체계였다." 김태진, 「근대천황제를 둘러싼 정치와 종교: 가케이 가쓰히코 신도론의 지성사적 의미」, 『일본비평』, 28호, 2023, pp 265~266.
"이런 식으로 천황제 하의 정치와 종교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때 동전 자체의 내면 혹은 심층에는 제사 양식을 통해 혼령과 상호 관계를 맺어온 오랜 전통과, 인간이 참배를 통해 위로하지 않으면 무언가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신도식 원령 신앙이 놓여 있다. 사자(死者)의 혼령을 중시하는, 달리 말해 인간을 신적 차원에서 상상하는 정서는 불교도든 신도계 종교인이든 일본인에게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122쪽)
"실제로 보통의 일본인은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무종교’로 규정하곤 하는데, 이 말 속에 오히려 일본적 종교성이 깊게 반영되어 있다. 아마 도시마로가 설득력 있게 분석하며 해설한 바 있듯이, 사실상 일본인의 생활 방식 안에는 일본인의 오랜 ‘종교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129쪽)
"오모토(大本)의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郞, 1871~1948)도 일본의 군비 확충과 전쟁을 비판했다. 덴리교는 물론 곤코교, 오모토 같은 교파신도는 국가 주도의 종교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개인의 양심을 선택함으로써 일본에서 종교적 근대성을 보여 준 사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139쪽)
이찬수, 「영혼의 정치학 : 천황제와 신종교의 접점」, 『일본비평』, 9호, 2013.
"합기도란 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 1883-1969) 선생이 체계화한 근대 무도입니다. 우에시바 선생은 젊었을 때부터 유도, 검도, 창술같은 고대 무도를 수행해 온 한편, 다케다 소가쿠(竹田惣角) 선생에게 다이토(大東)류 유도를 배웠습니다. 이 고대 무도의 기법이 합기도의 기술적인 체계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우에시바 선생은 오모토(大本)교의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 1871-1948) 사범에게 사사해, 이 종교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아 종래의 무술과는 다른 ‘사랑과 화합의 무도’를 표방하는 새로운 무도의 체계를 쌓아나간 것입니다." 内田樹, 「合気道とは」, 2014.01.28, http://gaifukan.jp/aikido/
"패전 전의 일본에서 ‘초국가주의’ 사상의 체현자거나 이와 관련 있는 인물들은 1930년대의 일본에서 혼란을 발생시킨 장본인이며,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들 우익 사상가들 중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1886-1957, 山形県),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 新潟県 佐渡島)는 친숙하며, 곤도 세이쿄(権藤成卿, 1868-1937, 福岡県)도 비교적 알려져 있고, 미노다 무네키(蓑田胸喜, 1894-1946, 熊本県)는 새로이 조명을 받고 있다." (80쪽)
"이들 평민들은 청일전쟁 당시 열렬한 국민적 자각을 보여주었고, 거국일치하여 진충보국했다. 이들의 피를 통해 일본은 처음으로 세계적인 국가로 성장했다. 그런데 일본의 평민은 각종 부담을 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지쳐있었다. 일본의 관료와 정당은 피곤에 지친 평민의 고생에 보답할 정치적・사회적 시설을 마련하지 못했다." (82쪽)
"이처럼 4명의 우익 사상가의 ‘비전’에는 간접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부정적 혹은 강한 긍정으로서의 ‘천황’이 숙명적・필연적으로 맴돌고 있다. 천황은 부정해야 할 ‘현실’의 체현자임과 동시에, 개혁 혹은 혁명 이후의 일본의 미래상이기도 하며, 부패의 상징임과 동시에 이상적인 일본을 표상한다. 즉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 표상 중 가장 자력이 센 ‘천황’이 필연적으로 의식되는 것이다." (91쪽)
"이소베 아사이치는 “일본도 러시아가 되어버렸네요”라는 쇼와천황의 말을 전해들은 후, 『옥중일기(獄中日記)』에 “천황폐하 실정(失政)하신 겁니다”라고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이 일기의 8월 1일자에는, “살해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죽을 건지, 성불할 건지. 악귀(悪鬼)가 되어 소신을 관철하는 거야.”라는 기술도 보인다. 이처럼 청년장교들이 표명한 쇼와 천황에 대한 기대와 배신감은 청년장교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기타의 ‘지양’의 대상으로서의 천황, ‘협력’의 대상으로서의 천황관을 동시에 암시한다."
"이러한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직 관념에 있어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은 백성으로,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경우 임금을 새로이 세우는 것도 가능하고, 국가는 임금보다 상위의 범주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곤도도 이러한 사직의 의의를 승인하고 있다." (95쪽)
"일본 상고의 풍속은 제정일치였다. 정치를 ‘마쓰리고토(マツリゴト)’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여기에서 발원한 것이다. 이 사상은 지나(支那)의 상고에 사직을 중시한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중략) 요컨대 토지가 없다면 사람이 살 곳이 없으며, 직(稷)이 없다면 사람이 먹을 것도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정리(政理)의 근저는, 지나도, 일본도 사직을 기초로 한다. (중략) 사직이란 각인 공존의 필요에 따라, 우선 향읍이라는 집단을 구성하며, 군이 되고, 도시가 된다." (95~96쪽)
노병호, 「天皇과 日本의 교착과 분열 - 초국가주의자 4인의 <현실> <비전> <천황>」, 『日本學硏究』, 44호, 2015.
처음에는 천황에 대한 한국인이 갖기 쉬운 일의적 해석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떠오른 것들이 있습니다만.
정통 합기도를 수행하면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오모토 교 관련. 후속 연구 필요.)
외국인이 보면, 확실히 천황이란 게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일본인이라면 천황이 뭔지 바로 알 수 있다 함은, 역시 “작법”, 그러니까 “집합적인 경험지” “신체지”(Uchida, 2023)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외국인의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일본의 일상적이면서 일견 사소한 작법 비슷한 것들: 회사나 공장에서 아침에 체조하는 것. 부부의 첫 공동 작업 의례. 등등
(일본 만화 <에반게리온>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신체적 움직임의 싱크로나이제이션 개념.)
드립커피는 내리는 사람마다 맛이 다르다는 믿음: 그러므로 작법은 신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서양 공원에서 모여 아침에 태극권하는 화교의 이미지: ?
천황은 확실히 로컬하지만, 따지고보면 인류 보편적인 사자에 대한 의례, 한자문화권의 농촌 공동체 등의 의장도 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체적 싱크로나이제션 즉 작법이 천황의 무언가와 연결되어, 이것이 세계화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의 결론: 어쩌면 팔굉일우라든가 현인신 등을 당시 일본인들이 진지하게 신봉했던 것으로 보였던 것에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근거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일본 이외 아시아 사람들이 이러한 제고를 하면 역사 문제 관련하여 (가해자 피해자 도식의)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을 지양하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미래 담론이 전개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 아시아적인 무언가가 세상을 이끌어나가게 된다면, 아직도 천황이나 무도같은 게 익숙하지 않다면, 이슬람교의 칼리프제(교권+세속권) 재흥과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루 다섯 번의 기도 같은 것 말입니다. (에구구. 너무 나갔다.)
개념어: 아날로그적 연속. 습합.'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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