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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성숙론> 서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6. 12. 10:20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살지 말지 망설이며, 손에 들고 있는 분도 될 수 있으면 ‘들어가며’ 만큼은 읽고 가주십시오. 그리 많은 시간은 안 걸릴 겁니다.
이 책은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했던 원고의 컴필레이션 본입니다. 엄청난 수의 원고 가운데에서 문예춘추사의 야마모토 히로키 씨가 가려내어, 주제 별로 배열해 이 책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20년간 아마 200권 정도의 책을 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잘 ‘대필 작가가 있는 거야?’ 라고 놀림받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저한테 있어서의 ‘대필 작가’는 담당 편집자였지 않았을까 합니다.
딱히 그들이 저를 대신해서 써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제가 쓴 글을 소재로, 뜻밖의 작품을 창출해줍니다. 그것을 읽고서, 글을 쓴 제 자신이 ‘헤에, 내가 이런 걸 썼구나’ 하고 살짝 놀랍니다. 그리고 ‘바로 이거야,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였어’ 하고 무릎을 칩니다(자기가 썼으니 당연하지만요). 그러한 책을 좀 더 읽고 싶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청탁받으면 원고를 쓰게 되고 마는데... 따라서, 편집자라기보다는 공동 작업자겠네요. 저는 그러한 ‘공동 작업자’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인 야마모토 씨는 제가 2001년에 <망설임의 윤리학>이라는 책을 냈을 때(‘평론’적인 논집의 데뷔작이었습니다) 처음에 접촉해 왔던 편집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따라서, 공작(共作)의 역사는 이제 20년을 넘습니다. 공동 작업한 책도 10권을 넘었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함께 하다 보면, 이제는 ‘야마모토 히로키 편집’이라는 태그를 붙여도 될 정도로 개성적인 시리즈가 됩니다.
그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 되는 이 책입니다만, <길거리의 성숙론>이라는 제목은 야마모토 씨가 생각해 주었습니다. 텍스트를 고른 것도 야마모토 씨므로, 이 책의 주제는 ‘성숙’이란 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쓴 책을 두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공동 작품이므로, 군데군데 저로서도 잘 모를 부분이 있는 겁니다.
저는 요 몇 년간 줄곧 ‘성숙’의 필요성에 대해 말해왔습니다. 현재 일본 사회를 보면, 가장 부족하구나 싶은 게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숙’이 논쟁적인 언론의 주제가 된 적은 제가 아는 한, 과거 반 세기나 되도록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성숙’이 ‘정치적 올바름’과는 레벨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숙/미숙’은 ‘올바름/옳지 않음’이라는 프레임워크로는 논할 수 없습니다. 미성숙하다는 것은 딱히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어른이 되렴’ 하는 주선을 afford하는 존재를 ‘아이’라고 부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어른이 되렴’ 이라는 주선이 힘을 미치게 되면, 아이들은 어른이 됩니다. 실패하면, 사회는 아이로 가득차게 되어, 그 사람들이 권력이나 재력, 발언력을 갖게 되고 말면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일이 생깁니다.
따라서, 어른의 머릿수를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딱히 일본인 모두가 어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전체의 7% 정도가 ‘경우 바른 어른’이면, 세상은 어떻게든 돌아갑니다. 10%를 넘으면 ‘솔깃할 정도로 좋은 세상’이 되며, 어른의 비율이 15%에 달하면, ‘대단히 살기 좋은 세상’이 됩니다.
따라서 당면 목표는 7%의 어른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100명 가운데 7명 정도의 어린이에게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라’ 하고 윽박지르며 호통쳐서는 안됩니다.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냐.
저는 이런 종류의 과제에 대해서는 ‘톰 소여의 페인트칠 전략’을 채용하는 것으로 해두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톰 소여는 장난을 친 벌로 벽에 페인트칠 심부름을 하라고 폴리 이모에게 명령받습니다. 물론 톰은 싫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한 가지 꾀를 고안해냅니다. 친구가 길을 지나갈 때에 돌아보지도 않고 열심히 페인트를 칠합니다. 친구가 괴이쩍게 여겨 톰에게 ‘뭐 하고 있는 거야?’ 하고 말을 겁니다. 톰은 페인트칠에 여념이 없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을 거니 톰은 그제서야 돌아보고서는, ‘페인트칠 하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라며 페인트칠을 계속합니다. 그러자니 친구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거 재밌어?’ 하고 묻습니다. 톰은 당연하다는 듯이 ‘세상에서 이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지’ 하고 대꾸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덫에 걸려든 것이나 다름없겠네요. 친구는 ‘얘, 좀만 하게 줘봐’ 하고 바짝 다가갑니다. 톰은 물론 쌀쌀맞게 ‘안 된다구’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친구는 더욱 물고 늘어집니다. 최종적으로 톰은 ‘마지못해’ 페인트칠의 고행을 친구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훌쩍 놀러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남에게 무언가 일을 하게 하고 싶다면, 그 일이 ‘즐거워서 어쩔 수 없다’ 는 것처럼 처신합니다. 이는 경험적으로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 속의 ‘어른이 되고 싶다’는 의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어른인 것은 즐겁다’ 라는 사실을 확실히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지금 일본 아이들에게 성숙을 향한 의욕이 현저히 감퇴되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어른’을 지근거리에서 볼 기회가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줄어들었기는 하되, 지금의 일본 사회라 할지라도, 어른의 머릿수는 그럭저럭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른들을 보고서, 아이들이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고 힘껏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함은, ‘어른이기는 하되, 즐거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째서일까요. 세상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은 ‘사회정의가 실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지금 세상의 살기 팍팍함이나 부조리의 상당 부분까지는 사회적인 결함의 문제이므로, 그것을 수정해야만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말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한다’ ‘부정을 바로잡는다’는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게 되면, 사람은 금세 표정이 험해집니다. 언짢게 됩니다. 분노의 격함을 통해, 바로잡아야 할 ‘제악(諸惡)’의 스케일과 깊이를 표현하려 듭니다.
저는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올바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일관하면, ‘어른이라는 것은 언짢아하는 존재다’라는 인상을 아이들에게 각인시켜버리고 맙니다. 그 점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도 ‘빨리 자라서, 찌무룩한 인간이 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아마 지금 일본의 화내는 어른들을 보고서, ‘말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은 안 든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말하고 있는 것은 올바르지 않아 보이지만, 왠지 활기차고, 크게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서, ‘이런 사람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을 큰 소리로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을 보자면, 상당히 기교적으로 ‘유쾌함’을 연기하고 있지요. 기분이 좋은 모습은 아이들에게 어필하게 마련이라는 점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방면으로의 인간 관찰의 날카로움은 꽤 허투루 볼 수 없습니다.
똑바로 된 어른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고, 한편으로는, 그다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은 TV 화면이나 유튜브 동영상에서 껄껄 웃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간의 ‘겉치레’나 ‘표면 상의 예절’을 웃어넘기며, 그것을 대신해, 노골적인 ‘힘’(권력, 돈,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상당히 유치한 인간관을 반복해서 표명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서 성숙을 향한 의욕이 꺾이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상당히 시리어스한 문제가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묘하게 유쾌한 사람들’에게 ‘닥치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지켜져야만 하므로, 생각하는 것을 좋으실 대로 말씀하시면 그걸로 된 겁니다. 하지만, 이 ‘성숙을 향한 의욕을 꺾는 언설’에 대항하여, 우리들로서는 ‘어른이 되는 건 즐겁다’라는 점을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 아이들에게 꼭 전해야만 합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유쾌하게 말하기’란, 어렵습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곤란한 미션을 수행하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성숙하는 것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같은 정도로, 혹은 그 이상으로 미래 세계를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시민적 성숙을 지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언짢은 표정을 짓는 어른을 보고서 ‘이런 인간이 되자’ 고 마음먹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 점을 부디 이해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멘토’가 될 의사가 있는 어른들은 부디 매일 웃는 얼굴로 지내주시기를 간청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써놓기는 했지만, 이제 읽게 되실 이 책의 문장이 다 항상 웃는 얼굴로 쓰여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가 난 기세로 밀어붙여서 썼던 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통독을 해 보시면, 세상의 구조를 풀어내며,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밝히는 ‘어른의 작업’을 저는 비교적 기분 좋게 해내고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으므로,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만, 그러한 취지의 책이므로, 읽으시는 여러분도 될 수 있으면, 가끔씩이라도 좋으니, 웃으면서 읽어주십시오.
2023년 6월
우치다 타츠루
(2023-06-07 14:4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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