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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자본론 편> 서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5. 25. 13:07

    들어가며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 책은 이시카와 야스히로 선생과의 공저(共著)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시리즈 최종권입니다. 마르스크의 <자본론>을 둘러싼 편지를 각자 두 통씩, 합계 네 통의 왕복 서한을 수록했습니다. 그리고, 권말에 ‘관련 문헌’으로써 이시카와 선생의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의 상황>에 대한 서한과 중국어판에 부친 두 사람의 글을 수록했습니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는 이 책을 넣으면 시리즈 전 4, 번외편으로 이케다 카요코 씨가 참여한 <마르크스의 마음을 듣는 여행>을 포함하면 전 5권이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시카와 선생과 둘이서 마르크스의 주요 저서를 차례대로 전부 읽어 나간다는 무모한 기획이 시작된 지 15. 드디어 이 책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용케 이어 왔음을 감개무량하게 여깁니다.

     

    마르크스 독해의 ‘길잡이 역할’을 맡은 이시카와 선생과, 이 유장한 기획에 인내심 깊게 함께해 주신 가모가와 출판의 마쓰타케 노부유키 씨께, 온 마음을 다해 사례의 말씀을 올립니다. 앞으로 이어질 왕복 서한 가운데에서도 두 분에 대한 감사의 말이 반복됩니다만, 그만큼 감사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독자 여러분은 양해해주십시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년’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처음에 이시카와 선생과 합의해서, 예상 독자는 ‘아직 마르크스를 읽은 적이 없는 (그렇지만, 머지않아 읽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고등학생’으로 설정했습니다. ‘머지않아 읽게 되겠지’ 라고 마음 먹고 있는 고등학생이 작정을 해서 ‘이제, 마르크스 읽을까’ 하고 실제로 첫 번째 책을 손에 드는 지점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얼마 안 되는 거리감으로 느껴집니다만, ‘언젠가 읽겠다’ 에서 ‘자 읽자’ 까지의 간격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즐겨 쓴 표현을 빌리자면)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책은 고등학생들에게 이 ‘목숨을 건 도약’을 시켜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것만을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정말로 명명백백한 집필 방침의 책입니다.

     

    예상 독자와 집필의 목적을 분명히 정해두는 것은 책을 쓰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라도 가볍게 손에 들 수 있는 책’이 초심자를 위한 입문서의 요건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누구라도’라는 식으로 예상 독자의 층을 너무 넓혀버리면, 예상 독자의 상()이 흐릿해집니다. 될 수 있으면, 예상 독자의 해상도는 높은 편이 좋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독자를 안내하는 일’입니다.

     

    마르크스와 같은 거대한 철학자・사상가가 쓴 글을, 초심자가 독력(獨力)으로 독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무척이나 난감한 작업입니다. 고등학생의 수중에 있는 지식이나, 가치판단의 프레임워크로는 마르크스와 용이하게 마주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같은 스케일의 사상가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고등학생이 품고 있는 자신의 ‘세계 관점’을 어딘가에서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일단 자신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을 ‘괄호에 넣고서’, 자신의 가치관을 ‘일시 보류’하고서, 자신이 보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광경을 이 사람은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점을 가설적으로나마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쓰면 왠지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등학생이라도 그와 비슷한 것은 해왔을 터입니다. 이를테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와 유사한 경험입니다.

     

    자기가 모르는 시대의, 아득히 먼 나라의, 연령도, 성별도, 직업도, 사물의 사고방식도, 감정도 완전히 다른 사람 속에 상상적으로 스며들어가서, 그 세상을 산다... 는 것은 소설을 읽을 때 누구나 하고 있는 일입니다.

     

    저는 10살 때쯤에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이라는 네 명의 자매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고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녀’ 안에 상상적으로 스며들어가, ‘소녀가 보는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맛본 해방감과 부유감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의 뉴잉글랜드에 사는 여자아이의 마음과 ‘동조’했을 때, 10살의 저는 뒤흔들렸고, ‘일본의 10 살짜리 초등학생다움’이 저에게 강제해온 사물의 사고방식이나 감수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어째서인지 상당히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가능한 한 먼 시대의, 먼 나라의, 자신과 전혀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의 ‘내면으로 스며들어’감으로써 독서의 유열(愉悅)을 끄집어내게 되었습니다.

     

    철학서나 사상서의 경우도, 거기서 얻는 것은, 소설을 읽는 유열이나 해방감과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들의 말씨는 소설가의 그것과 비교하면 훨씬 무뚝뚝하기도 하거니와, 난해합니다만, 그 철학자나 사상가가 살고 있는 시대의 ‘생생한 현실’이 그들을 구동(驅動)하여, 그것을 쓰게 했다는 점에서는 소설가와 다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말해두지 않으면,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하는 정도의 절박함을 가지고서 쓰여진 것만이 몇 세기나 되는 풍설(風雪)을 견디고, 고전으로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서나 사상서라고 하면, 상당히 추상적인 것을 논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는 대단히 ‘리얼’한 것입니다. 잘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글쓴이의 거친 숨결이나 고동을 어렴풋하게나마 행간으로부터 헤아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행간을 읽는다’는 작업이 어렵습니다.

     

    소설이나 만화, 영화의 경우, 작품 세계 속에 깊이 스며들기 위해서는, 딱히 전문적인 읽기 방식의 ‘길잡이’나 ‘선배[先達]’는 불요합니다. 물론, 그런 선배가 있어서, 손을 잡고 끌어주면 훨씬 깊이 있게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작품을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향수(享受)하고, 유열(愉悅)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같은 딱딱한 책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행간을 읽’기 위해서는 ‘선배’나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길을 앞서나가며, 때때로 뒤를 돌아보고서는 ‘잘 따라오고 있니?’ 하고 말을 걸어주고, 험로에서는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고, ‘여기가 요점(要点)’이다 하는 곳에 간신히 도달하면, 곡괭이로 단단한 암반을 두드리며, ‘, 이곳에 귀를 대 보렴’ 하고 가르쳐줍니다. 그러한 ‘선배’가 필요합니다. 그때에 ‘선배’에게 들은 대로 지면에 귀를 대 보면, 분명히 글쓴이의 거친 숨결이나 고동이 들려옵니다. 그러한 ‘포인트’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선배’의 일입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져 있는 거예요’ 하고 알기 쉽게 가르쳐주는 것은 ‘선배’의 일이 아닙니다. 거기까지 들여디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쓰여져 있는가, 그것을 발견해내서, 그것을 듣고 이해하고, 자기 안에 머금어가는 것은 독자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대신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같은 ‘선배’가 할 수 있는 일은, ‘, 여기에 귀를 대 보렴’ 하고 일러주고, 글쓴이의 ‘육성’을 알아듣기 쉬운 포인트를 가르쳐주는 데까지입니다. 그 이상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자제해야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과연 그러한 억제가 잘 발휘된 책을 써낼 수 있었는지의 여부는, 여러분이 판단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마르크스에 대해 쓰는 것은 이제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이제 마르크스를 읽고자 하는 용감한 젊은이들에게, 축복의 말을 선사하며 끝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철학적 미래가 번성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문장은 제가 훨씬 젊었을 적에 철학상의 스승인 에마뉘엘 레비나스 선생으로부터 증여받은 말씀입니다. 이제 여러분께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20235

     

     

    (2023-05-10 10:2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번역자 추기(追記)

     

    우치다 선생님께서 이 글에 특별히 사용하신 일본어 先達이라는 단어의 함의를 조금 소개드릴까 합니다.

    야마가타 현의 하구로 산에는, 일본의 독특한 신앙 종교 형태 중 하나가 존속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산 속에서 수행하는 분 가운데 남들에게 도를 설파할 정도의 경지에 이른 분을 先達이라고 또한 부른다고 합니다.

    '호시노 先達'이라는 분이 하구로 산에서 지금 일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이분이 우치다 선생님과 계속 교류하고 계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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