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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어있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망친다> 서평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5. 20. 12:56

    <‘깨어있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망친다> (칼 로드 저, 니와타 요코 역, 동양경제신보사, 2023년)의 서평을 동양경제온라인에 기고했다.
     
     
    ‘워크 자본주의(woke capitalism)’는 익숙지 않은 단어이다. 본서는 이 ‘익숙지 않은 단어’의 의미를 자세히 가르쳐준다. 하지만, 설명을 들어도 ‘아 <그런 것>이로군’ 하고 무릎을 탁 치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라고 본다. woke capitalism은 일본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woke는 wake(일으키다, 눈뜨게 하다)라는 타동사의 과거분사이다. ‘각성되었다’는 의미인데, 이게 60년대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종적・사회적 차별이나 불공평에 대해 높은 참여 의식을 가짐’ 이라는 독특한 함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의미로 반세기 정도 쓰여진 뒤, 의미가 역전되었다.
     
    의미를 역전시킨 것은 ‘정치적으로 반동적인 신념을 품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차별이나 불공평에 대해 ‘의식이 트여 있다’는 양(陽)의 의미를 반전시켜 “그릇되고, 표면적인, PC적인 도덕성"(19쪽)을 내세우며 잘난 체하는 ‘재수없는 녀석들’이라는 네거티브한 함의를 이 단어에 투영했다(woke에 ‘속물들의 젠체(意識高い系)’라는 번역어를 매치시킨 일문판 번역자의 센스는 놀랍다). 확실히, ‘깨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셀럽들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들 수 있겠다) 기후변화 서밋에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들의 정치적 신념이라는 것의 신빙성, 적어도 그 일관성에 대해서 시니컬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해가 간다. (19~20쪽)
     
     
    아마존의 전 CEO 제프 베조스는 ‘기후변화가 우리의 거주지인 이 혹성에 초래하는 파멸적인 영향과 싸우기 위해’ 관련 기금에 100억 달러를 기부했다. 정치적으로는 참으로 올바른 행위이다. 한편으로는, 아마존은 온갖 별의별 수단을 강구해 납세를 회피하고 있다. “2010년부터 2019년 까지의 기간동안, 아마존은 9605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268억 달러의 영업이익을 축적했지만, 납부한 세금은 34억 달러였다. (...) 2018년에 아마존은 110억 달러의 영업이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법인세를 거의 내지 않았다. 2019년의 영업이익은 130억 달러였지만, 실효 세율은 불과 1.2%였다.” (165쪽)
     
    아마존이 페이스북, 구글, 넷플릭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법인세 포탈의 불한당들” 가운데서도 “최대 악당”이라고 불려도 “그리 놀랍지 않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166쪽)
     

     
    NFL의 스타 선수 콜린 캐퍼닉은 2016년 시합 개시 전에 거행되는 국가 제창을 거부하고, 대신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를 떳떳이 주장하는 불굴의 정치적 액티비즘” (202쪽)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흑인과 유색인종을 억압하는 나라의 국기에 자랑스러움을 표하고자 기립해 있을 의사는 없습니다’ 라고 그 행위를 설명했다. 그는 시즌 내내 국가 제창 때마다 무릎을 꿇었고, 이는 미국 전역에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지자들은 ‘새로운 공민권 운동의 아이콘’이라고 칭했고, 도널드 트럼프는 ‘이 빌어먹을 자식을 지금 당장 필드에서 내쫓으라’고 NFL 오너들을 부추겼다.
     
    그 결과, NFL은 캐퍼닉의 행동을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다음 시즌에 그와 계약하는 팀은 하나도 없었고, 캐퍼닉은 조기 은퇴를 맞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2018년 9월 NFL 개막 직전에, 캐퍼닉은 ‘무엇인가를 믿어라, 설령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Just do it’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Just do it은 나이키의 슬로건이다. 그리고, 나이키는 ‘드림 크레이지(꿈에 끝장을 보라)’ 라는 대규모 광고 캠페인을 전개했다. TV CF의 나레이션을 담당한 것은 캐퍼닉. 그는 “어떠한 걸림돌이 있더라도, 자신의 꿈을 쫓아가자”고 호소했다. (201쪽)
     
    트럼프는 격노하여, 이 캠페인 탓에 나이키는 ‘분노와 보이콧으로 숨통이 끊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동시에 트럼프는, 캐퍼닉의 ‘비애국’적 행위로 인해, 미국인들은 TV로 미식축구 시합을 보지 않게 되고, 그것이 NFL에 막대한 손해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때 트럼프는 의도치 않게 미국 우파가 갖고 있는 세 가지 전통적 입장을 밝혀냈다. 하나는 ‘전통적인 애국자는 국기와 국가(國歌)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하나는 ‘자본가는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를 지배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종류의 정치적 주장은 경제적 리스크를 수반한다’이다. 애국심, 노사 관계, 정치적 주장과 상업적 이익의 관계, 세 가지 거대한 담론을 트럼프는 캐퍼닉 사건 하나로 전경화(前景化)해 보였다(적은 말로 문제의 본질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도널드 트럼프는 일종의 천재이다).
     
    이에 대해 나이키는 “정반대의 상업적・정치적 논리”(209쪽)를 내건 트럼프와 전면전에 돌입하기를 선택했다.
     
    ‘애국적이라는 것은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가’, ‘노동자는 자본가 앞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야 하는가’. 이 두 가지는 말하자면 ‘근대적인’ 질문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지견을 읊어 왔다. 하지만, 세 번째 질문은 다르다. 이는 근대 들어 아마 한 번도(마르크스나 베버에 의해서조차) 제기된 적 없는 질문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은 경제적인 이익을 보는가?’이다. 그리고, 2018년에 나이키는 이 질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면 돈을 번다’는 답을 내보였다.
     
    나이키의 ‘드림 크레이지’ 캠페인은 최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대기업이 캐퍼닉의 활동가로서의 대의를 지원하는 것에 감명을 받은 좌파 사람들도 있었다. (...) 흔들림 없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과 관련됨으로써 짊어졌던 리스크는 충분히 보상받았”던 것이다. (212쪽) 이 캠페인 뒤, 나이키의 주가는 5% 상승하고, 시가총액은 60억 달러 증가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를 woke capitalism의 압도적 승리로 간주해도 좋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몇 가지 유보를 둔다.
     
    하나는 아마존과 관련한 탈세와 유사한 맥락에서, 나이키는 ‘스웻 숍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Sweat shop이란 ‘착취 공장’, 즉 저임금 노동자가 위법적인 노동 조건 아래 혹사당하는 공장을 의미한다. 90년대에 나이키 제조공장의 비인도적인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공개되었을 때, 세계적인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나이키는 노동 조건의 개선을 약속했지만, 아직 충분히 실현되지는 않고 있다.
     
    또 한 가지의 유보는, 캐퍼닉이 나이키의 대변인으로 뽑혀도 “미국 흑인의 불안정한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는 점이다. (220쪽)
     
    다만, 이 지적은 ‘흠잡기’ 비슷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사회 운동가는 나이키로부터 다소간의 경제적 이익을 얻었음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모두는 똑같은 은혜를 입지 않으니, 이런 운동에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지나친 말이다. 진보라는 것은 제일적(齊一的)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랜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이키의 승리에 대한 유보 사항이 있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것은 나이키가 캐퍼닉의 액티비즘과 발걸음을 맞춘 것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상업적 이익을 노렸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나이키에게는 상업적 이익이나 브랜드 이미지 개선을 얻을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으므로, 캐퍼닉의 정치적 주장을 이용했다. “기업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제삼자가 만들어 낸 유행에 올라탈 뿐인게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이유는 충분하다.” (221쪽)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까다로워진다. woke capitalism은 ‘각성된 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느냐, ‘자본주의’에 중점을 두고 있느냐의 여부 말이다.
     
    NFL은 2020년 시즌 개막전에서 국가 제창 전에 Lift every voice and sing을 연주하기로 결정했다. Lift every voice and sing은 19세기부터 이어져 온 노예제의 기억과 자유를 위한 투쟁을 노래한 ‘흑인의 국가(國歌)’이다. 이 노래를 개막전에 내보낸 것과 관련, NFL은 “인종차별과 흑인에 대한 조직적 억압을 비난하고, 전날 NFL 선수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점이 자신들의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226쪽) 2017년에 있었던 사실상의 캐퍼닉 추방으로부터 불과 3년 사이에 NFL은 180도 방향 전환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조지 플로이드 폭행 살인사건(2020년 5월) 뒤 전 세계에 확산되었던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직접 반응한 것이다. 여론의 압도적인 흐름에 직면해 NFL은 표변(豹變)했던 것이다.
     
    “NFL은 비즈니스이며, 비즈니스인 이상, 고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 여론이 블랙 라이브즈 매터를 지지한다면, NFL도 그렇게 하는 것이 상업적으로는 당연하다.” (230쪽)
     
    이러한 NFL의 변절을 저자는 엄하게 힐난한다. NFL이 BLM 운동에 지지를 표명했던 것은, 단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고객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NFL 뿐만이 아니다. “각계 분야의 기업이 재빨리 이 흐름에 올라타,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고 지지를 표명했다. 실제로, 반(反) 인종주의를 향한 지지가 주류인 정치적 환경을 맞아, 전 세계의 기업이 정치적으로 각성한 척을 했다.” (231쪽)
     
    저자는 이를 ‘기업이 자신들의 브랜드를 정치적 대의와 일치되게끔 행동하는 <브랜드 액티비즘>’으로 간주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명백한 국민 감정에의 영합’이며, ‘허울 좋은 <매명(買名)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닌, 기업의 부와 이익을 증대시기기 위해 흑인의 저항을 이용하는, 가공할 만한 인종적 자본주의의 확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워크 자본주의는, 흑인이나 노동자 계급 사람들을 착취하는 또 하나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착취는 그들의 신체 노동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투쟁, 정치, 사상, 정신에까지 그 마수가 펼쳐져 있다.” (245쪽)
     
     
    워크 자본주의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는 점은 이 책의 지적대로다. 다음으로 살펴볼 문제는, 이 책의 제목에 써 있는 것처럼, 그것이 ‘민주주의를 파멸시킨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세 가지 섹터로 나뉜다. 제 1섹터는 정부, 경찰, 사법기관, 공립학교, 병원 등의 공적 섹터다. 제 2섹터는 영리기업. 제 3섹터가 비(非)정부 공공기관으로 교회, 스포츠 클럽, 자선단체 등이 있다. 워크 자본주의의 특징은, 제 2섹터인 영리기업이 다른 두 섹터의 업무를 대행해버린다는 점에 있다. 즉, 국가의 전 영역이 사기업의 ‘그것은 돈이 되는가?’ 라는 로직에 종속된다는 점이다.
     
     
    워크 자본주의는 원리적으로 비민주적이다. 이는 당연하다. 아마존의 경우에도, 나이키의 경우에도 기업이 정치적 이슈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CEO나 마케팅 부서, 홍보 스태프 등 한 줌의 인간이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면, 얼마나 벌 수 있겠는가’에 대해 사량(思量)하고, 결단을 내린다. 그다지 돈벌이가 안 된다는 예측이 서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할 인센티브가 사라진다. 한 줌의 인간이 정부의 영역까지 젖히고 들어가, 공공의 이익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용납될 수 있을까. 가령 그들이 선의를 가진 사람이며, 그 행위가 공공의 이익과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 절차가 민주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We no longer live in a world of nations and ideologies, Mr. Beale. The world is a college of corporations, inexorably determined by the immutable bylaws of business. - Network(1976)

     
    2010년에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은 대규모 사회 공헌 캠페인을 벌였다.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등 대부호들의 지지를 얻으며, “사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부의 절반 이상을 제공하기를 서약”했다. (289쪽) 그들이 출연한 수천 억 달러의 자금은 “<기후변화, 교육, 빈곤 완화, 의학 연구, 의료 서비스, 경제 개발, 사회 정의>와 관련된 프로젝트에 쓰여지게 된다.” (290쪽)
     
    시초의 동기는 선량했지만, 그만큼이나 되는 규모의 자선 사업을 감당할 수 있는 국가가 등장하지 않는 경우, 그들은 국가의 대리를 수행하게 된다.
     
    “워크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회적 불공정이나 빈곤 해결을 국가에 맡기는 일은 더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사회는 주인님의 식탁으로부터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라는 자선에 기대게 된다.” (291쪽)
     
    자본주의는 전적으로 빈부 격차를 확대시키고 있다. 현재, 세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초부유층이 세계 전체 부의 거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0명이 가진 부의 합계는 7460억 달러다. 이는 스위스, 스웨덴, 타이, 아르헨티나 개별 국가의 GDP보다도 많다.” (106쪽)
     
    전 세계는 분명히 초부유층과 그 이외로 양분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슈퍼 리치한 자본가들이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결정내리는 자로서 자신들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110쪽). 즉, 그들 자본주의 기업의 소유자들은 ‘공공의 복리란 무엇이며,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권을 국가로부터 빼앗아버렸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선거로 대표를 뽑는 것과 같은 번거로운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정책 실현을 청원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민주주의적 절차를 경유하는 것보다 훨씬 신속하고 정확하게 ‘공공의 복리’가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조건이 있다. ‘그들에게 절대로 손해를 입히지 말 것’이라는 조건이다. 그들이 계속 슈퍼 리치일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 그 자체에는 결코 손을 대지 않는다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그들은 기세 좋게 돈을 뿌려준다(그럴 것이다).
     
    “요컨대 억만장자의 증여는, 애초에 그들을 억만장자로 만들어 준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결과와 맞바꾼 것이다.” (292쪽)
     
     
    2019년 홍콩의 민주화 투쟁 당시, NBA의 휴스턴 로켓츠 소속 단장인 대릴 모리는 항의 집회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트윗을 게시했다. ‘자유를 위해 싸워라. 홍콩과 함께 서라’ 라고 올렸다. 이 트윗을 불쾌하게 여긴 중국 농구 협회는 이 ‘부적절한 발언’에 강하게 반발하여, 팀과의 교류와 협력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고, CCTV는 로켓츠의 방송을 금지했다. NBA는 40억 달러라고 일컬어지는 중국 비즈니스를 사수하기 위해 모리의 발언을 사과하는 길을 선택했다.
     
    “NBA와 중국이 벌인 소동에서 분명해진 것은, 여차하면, woke한 자본주의에 있어서 으뜸가는 동기는 경제이며, 정치는 그것이 경제를 지지하는 경우밖에는 그 가치가 없다는 점이었다.” (305쪽)
     
    이것이 저자 칼 로드가 워크 자본주의에 대해 내린 최종적인 평가의 말이다.
     
     
    이상, 책의 내용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조금이나마 사견을 써 두고자 한다.
     
    이 책을 읽고서 필자는 미국이 살짝 부러워졌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워크 자본주의’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이라기보다는, 앞으로도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나이키가 싸웠던 맞수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단계에 아직 머물러 있으며, 향후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는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권두 해설에서 나카노 다카시 씨는 워크 자본주의의 맹아적(萌芽的) 형태가 일본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지만, 필자는 일본에서는 ‘워크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멸망시키는’ 미래를 그렇게까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일본의 민주주의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천민’ 자본주의이며, 아마 이 사람들이 기막히게 일본의 민주주의에 종언을 고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전망이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귀중한 정보는, 일본에는 워크 자본주의가 출현할 역사적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미국의 비즈니스 서적이 이제 리더빌리티(readability)를 상실했을 정도로 세계적 트렌드로부터 뒤처졌다는 사실이다.
     
     
    (2023-05-10 09:4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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