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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느 가족>(2018) 해설 (일본 공식 팸플릿)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5. 17. 11:04
‘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만든이에게 제기하는 것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필자가 말한 게 아니고, 롤랑 바르트라는 사람이 60년 정도 전에 그렇게 선고한 것이다). 그 이유는, 만든이는 영화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가운데에는 감독이나 각본가가 ‘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을 일러줬던 것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이 반드시 여러 겹 어른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도구나 장식이기도 하고, 배우의 분장이나 의상이기도 하고,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차종이기도 하고, 생활 소음이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배역명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영화의 표층에 여봐란듯이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인가, 꼭 그래야만 했는가 하는 질문을 다시금 받는다 해도, 촬영에 관련되었던 어느 누구도 설득력 있는 대답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오즈 야스지로는 화면 가운데에 종종 빨간색 주전자를 놓았다.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예사 소도구이다. 빨간색 주전자는 컷이 바뀔 때마다 놓이는 장소가 이동하여, 항상 화면 안의 어떤 위치를 줄곧 점했다. 어째서 빨간색 주전자가 그때 거기에 있어야만 했던 것인가, 관객은 끝내 알 수 없다. 오즈 감독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신(scene)들과 관련하여, 누가 거기에 등장해, 무엇을 했던가는 잊어버려도, 빨간색 주전자만큼은 선연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영화의 표층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에는 일의적(一意的)인 연관을 갖지 않는 것 말이다. 그것은 뭔가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다. 거기에는 작가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했던 명시적인 메시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의식에 유리 조각처럼 박힌 채 오래 남는다. 이러한 영상 기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게, 그저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상 내에 산란(散亂)하는 모든 기호를 주제나 의도로 환원하려 한다든가, 일의적인 이야기로 정립하려 하는 힘에 집요하게 저항한다. 바르트의 비유를 빌리자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말 없이 남아 있는 손님과 같이’.
하지만, 그런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영상 기호’는 영화에 신비로운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본인으로서는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동작 습관, 발성, 표정 등을 통해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작품 <어느 가족>에도 그러한 영상 기호가 넘쳐흐르고 있다. 거의 모든 화면에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말 없이 남아 있는 손님’과도 같이, 묘하게 과잉한 것,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 간단히 해석 당해줄 줄 아느냐’ 하는 서늘한 저항감을 이 영화에 안겨준다.
이 영화를 말할 때, 많은 평론가는 빈곤, 의무교육 방기, 아동 학대, 기초 생활 보장, 비(非)가족적인 ‘키즈나(絆)’… 등과 같이 명시된 주제를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현재적(顯在的)인 영화적 요소의 주변부에는, 어망에 딸려 들어온 해초나 작은 물고기, 조개처럼, 무수한 ‘뭔지 잘 알 수 없는 것’이 휘감겨 붙고 있다.
그것은 ‘협소함’ 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이 화면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공간에 무언가가 과잉하게 있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압박감이다. 그들이 사는 집이 그렇다. 한 집에서 살기에는 거주자의 수가 너무 많다. 가재도구가 너무 많다. 발 디딜 곳도 없다. 할머니와 아키는 한 이부자리에서 자며, 쇼타는 일본식 벽장에서 잔다. 부엌은 노부요 한 명 앉으면 더는 다른 이를 받아들일 여지조차 없다. 욕실도 어른 한 명을 가까스로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밖에는 안 된다. 현관에도 골판지 상자가 빽빽하게 쌓여 있어서, 출입구의 쓸모를 하지 않는다. 동시에, 이 거주 공간들은 명백히 오랫동안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지극히 불결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평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관객들은 그러하다) 이 집의 마루를 맨발로 딛는다든가, 벽에 살이 닿는다든가 하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생리적 혐오감을 느낀다. 그런 탓에, 관객의 시선으로 보면 이 집의 ‘인간이 머무르는 공간’은 가일층 좁은 곳으로 감지된다.
‘가난함’을 기호적으로 표상하기 위해서였다면 ‘물건이 없는’ 영상도 선택지로서 있었을 법하다 (이를테면 상하이에서 일하는 최하층 농민공의 집 내부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이것만으로도 용케 사는구나…’ 하는 경탄이 나올 정도로 물건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다르다. 여기서 가난함은 그 반대로 ‘물건의 과잉에 따라 가동역(可動域)이 비정상적으로 좁고, 동선이 제약된 상태’로서 제시된다. 쇼타가 틀어박히는 버려진 자동차 시트가, 아키가 일하는 이미지 클럽의 ‘룸’이 그렇다. 그들의 ‘가난함’은 물건을 과하게 쑤셔박은 탓에, 생활공간이 한층 협소화하고, 자유도가 체감(遞減)해 가는 모습을 취한다.
아마도, 그것은 좀도둑질이라는 생업의 논리적 귀결인 것이다. 좀도둑질은 남의 눈이 닿지 않는 때에, 눈 앞에 있는 상품을 취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언제, 무엇을 훔칠 것인가를 사전에 완전히는 계획할 수 없다. 그것이 상품 구입과의 차이다. 좀도둑질을 함으로써, 확실히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상품을 무상으로 손에 넣었지만, 그것은 (쇼타가 좀도둑질해 와서 가산에 더해진 낚싯대나 샴푸처럼) 지금 당장은 그들의 거주 공간을 오로지 좁아지게 하는 데밖에는 보탬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이 이러한 대가족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은, 오사무와 노부요가 어린 아이들을 남의 집에서 ‘좀도둑질’ 해 와서, 가족에 더하고 만 탓이다. 그 행위에 따라 그들은 특별히 사용 가치가 있는 것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니다. 그저 수사 당국의 추궁에 떨게 될 뿐이다.
지나친 소유에 따른 공간의 협소화와 자유의 상실, 그것이 그들의 ‘가난함’의 본질인 것이다. 허나, 그것은 그들의 역설적인 ‘풍요로움’의 원천으로서도 그려지고 있다.
지나치게 좁은 공간에 쑤셔 넣어진 덕분에, 이 가족에게는 ‘사적 공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영역은 (쇼타의 일본식 벽장이나 아키의 침상과 같이) 공공적인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가까스로 허용되었을 뿐이다. 좀도둑 행위의 주범인 부부는, 그 행위의 벌로서, 사적 공간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불요불급한 것을 차례차례 계속 좀도둑질하는 사이에, 그들은 ‘무사(無私)’의 사람이 되는 이외에는 새로운 재(財)를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든 상품이든, 새로운 재(財)를 수용함으로써, 일가의 가동역(可動域)은 좁아지고, 프라이버시는 제한받으며, 시민적 입장은 거듭 위기적인 것이 되어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사(無私)’ 화(化)한다. 그에 따라 그들을 떨어뜨리는 거리는 줄어들고, 접촉은 보다 농밀해지며, 결국에는 morphous한 끈적이는 ‘덩어리’ 같은 것으로 화(化)해간다.
가족의 해체는 그 반대 과정을 거친다. 한 명 한 명이 제기하는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인가?’ 라는, 아이덴티티에 관련된 질문이 전경화했던 때에, 즉 ‘개인적인 것’이 출현했던 때에, ‘좀도둑질로 이루어진 어느 가족(万引き家族)’은 붕괴한다. 그때 명백해지는 것은, 이 가족이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코 묻지 않는다’ 라는 묵계(默契)로 묶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는 장면마다 가족이 앉는 위치가 바뀐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소반을 둘러싼 가족의 앉는 위치가 매번 바뀌는 홈 드라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키키 키린은 예전에 ‘데라우치 칸타로 일가’라는 홈 드라마에서도 할머니 역을 연기했는데, 거기서는 화면 내에서의 가족 전원의 정위치가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앉는 장소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지시했던 것이다.
허나, <어느 가족>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약조가 없다. 그들에게는 가정 내에서의 ‘입장(立場)’이 없다. 그것을 다 하지 않으면 가족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무가 없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들은 개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내놓은 대가로, 가족이 되기 위해 다해야 할 의무로부터의 해방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확실히 현대 사회에서 가장 손에 넣기 힘든 ‘재(財)’ 가운데 하나이다.
(2023-05-05 17:5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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