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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시ー류 철학과 사상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5. 14. 17:40
(부디 말미의 ‘번역 노트’ 주석도 꼭 읽어주십시오. 이 글과 이 글의 일본어 원문에는 상세사항을 참조하지 않으면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옮긴이)
『현대 사상』 지(誌)가 와시다 키요카즈 특집을 기획했다. 필자도 기고를 의뢰받았으므로, 와시다 씨의 철학에 관해 온 힘을 다 해 썼다.
‘와시다 씨의 철학’이라고 우선 제목을 썼으나, ‘와시다 씨’라고 부른다든가, ‘와시다 선생’이라고 부른다든가, ‘왓시ー’라고 부른다든가 하는지라 호칭이 일정하지가 않다.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한테는 ‘왓시ー’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와시다 씨를 서로 아는 공통된 친구들과 얘기할 때는 대체로 애정을 담아 ‘왓시ー’라고 부르고 있다. ‘왓시ー는 잘 지내고 있을까’ ‘왓시ー는 아직 센다이까지 다니고 있을까’ 등.
와시다 씨와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11월 30일의 일이었다. 그때 신문사가 주재(主宰)했던 대담의 테마는 ‘유아화하는 일본 사회’였다. 기획서에는 ‘현대를 대표하는 2명의 사상가가 <‘으-른’이 되는 법>을 처방한다’고 쓰여져 있었다.
기획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어른이 되기 위한 How To’와 같은 것이 패키지화된 정보로 어딘가에 있으니까 그것을 학습하기만 하면 ‘어른이 된다’ 같은 건 없다. 그래서, 기획적으로는 헛발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성숙(成熟)과 미숙(未熟)’을 둘러싼 대담 그 자체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줄은 미처 몰랐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그때 와시다 씨가 말씀하신 이야기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아있는 것은 ‘인터디펜던트(interdependent)’라는 단어였다.
“집단 생활이란 인터디펜던트(상호 의존적)로밖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자립해 있다는 것은 결코 인디펜던트(독립적)한 것이 아닙니다. 인터디펜던트한 기제를 어떻게 운용할 수 있는가, 그 ‘작법(作法)’을 몸에 익히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립이 아닐까 해요.” (<어른 없는 나라>, 프레지던트사, 2008년, 17쪽)
이 짧은 일절 안에 와시다 씨 철학의 ‘핵심’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상호의존의 기제를 운용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립’이다 하는 명제에 얽히게끔, 여기서 와시다 씨는 ‘작법(作法)’과 ‘몸에 익히다’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와시다 철학의 가장 개성적인 부분이며, 또한 필자가 가장 깊이 공감하는 지점이다.
‘작법(作法)’이란 것은 몇 세대나 걸친 경험지가 집적되어 형성된 것이다. 철학 용어가 아니다. 하지만, ‘작법(作法)’에는 철학적인 반의어가 있다. 그 단어 자체는 철학 용어가 아니지만, 그 반의어는 철학 용어라고 하면 수상쩍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세상에는 때때로 그런 것이 있다.
와시다 철학의 백미는 그가 사용하는 키워드에 인습적인 철학 용어가 아닌 게 많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 비(非) 철학적 키워드를 실마리로 하여, 와시다 키요카즈는 전통적인 철학 체계와 씨름하고, 해독하고, 바꿔 읽으며, 탈구(脫臼)시킨다. 그 수완은 눈부시다 할 수밖에 없다.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작법(作法)’의 반의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다. ‘작법(作法)’의 반의어는 ‘원리(原理)’이다. 놀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것이다.
원리를 내거는 사람은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수미일관해 있다. 어떠한 문제라도 원리의 이름 아래 일도양단한다.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논리적이든 비논리적이든, 정밀하든 조잡하든, 원리 파 사람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검으로 양단(兩斷)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도 같이 문제를 깔끔하게 베어버린다. 상쾌하기도 하거니와, 원리 파 사람의 주장을 듣고 있자면, 어떤 종류의 전능감을 느낄 때도 있다.
와시다 씨의 ‘작법(作法)’은 그 대극(對極)에 있다. 그것은 ‘때에 따라 대응하는 임기응변’과 ‘솜씨의 정묘(精妙)함’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원리주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철학 용어 그리고 ‘작법(作法)’을 중시하는 철학 유파 모두, 서양 철학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법(作法)’은 집합적인 경험지에 의해 형성된다. ‘몸에 익힌다’라는, 그 뒤에 붙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작법(作法)’은 신체에 깊이 내면화한다. 내면화하고, 혈육화함으로써 비로소 구사할 수 있다.
‘몸에 익힌다’는 것은 ‘예지(叡智)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몸에 익힌 지혜나 기술’은 어지간해서는 말로 할 수 없다. ‘말로 할 수는 없지만,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아 때부터, 그러한 프로세스를 반복하면서 신체의 운용 방식을 깨달아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아이키도(合氣道)라는 무도(武道)를 수업해 오고 있는데, 무도에 숙달한다는 것은 동작이 먼저고 말은 나중이다. 수련을 쌓아가는 가운데, 어느 날, 자신의 신체에 그러한 부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부위를 감지하고서는, 그것을 조작하고 있는 자신을 의식한다. 그것은 계획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터득해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그때까지 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업이란 그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와시다 씨가 말하는 ‘작법(作法)’도 구조는 동일하다. 우선 신체지(身體知)로서 몸에 익히고,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인터디펜던트한 기제’라는 것은, 인간 사회 전반에 해당한다. 넓게는 전 세계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자신이 속한 조직도 그러하며, 가정도 그렇다. 거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때 우선 필요한 것은, ‘원리’나 ‘당위’나 ‘진리’나 ‘역사를 관통하는 철의 법칙성’등이 아니다. ‘작법(作法)’이다. 어느 순간 몸에 익힌 지혜와 기술이다.
‘원리’ 비슷한 것은, 민첩한 사람이라면, 한 권의 서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가 있다. 하지만, ‘작법(作法)’은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긴 세월을 거쳐, 여러가지 아수라장을 밟으며, 상처주고, 상처입으며, 굴욕감을 맛보고, 맛보여주며, 구원하고, 구원받는 등의 수많은 경험의 성과로써, 단계적으로밖에는 몸에 익힐 수가 없다.
‘작법(作法)’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감도 좋은 신체다. ‘인터디펜던트한 기제’ 아래 적절하게 서 있을 위치를 고르고, 적절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직감적으로 알아채는 감도 좋은 신체를 갖는 것이 필수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때,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에 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면 ‘위험을 알려주는 알람’이 격하게 명동(鳴動)한다.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 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면 귀에 거슬리는 그 ‘노이즈’가 사라진다. 인간의 신체는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 단세포생물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포식하는 것의 접근을 감지할 수 있다. 인간이 못할 리가 없다. 아무리 희미한 것일지라도 노이즈를 감지하고, 그것이 가라앉게 되는 동선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감도 좋은 신체이다.
무도(武道)에서는 이를 ‘기(機)를 보는 마음’이라고 일컫는다.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 전서(兵法家傳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한 자리의 사람과 관계하는 것과, 기(機)를 보는 마음, 이 모든 것이 병법이다. 기(機)를 보지 않은 채 거기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오래 머물면서, 까닭 없는 허물을 짓고, 타인의 기(機)를 보지 않고 행동을 하며, 말다툼을 일으키며, 명을 재촉하는 일 모두, 기(機)를 보느냐 안 보느냐에 달려있다.”
사람들과 관계하는 장(場)에 필요한 것은 ‘기(機)를 보는 마음’이다.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있으면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입에 담아,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실제로는, 그런 것을 하고 있으면, ‘지금은 아니다’ ‘거기서는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하는 위험 신호가 격하게 명동(鳴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던 사람, 들었음에도 귀를 막았던 사람이 절체절명의 트러블에 휘말린다. 무예가는 그러한 헛된 재액(災厄)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場)이 자신을 부르고 있는 때에, 부름 받은 장에 나아가, 와시다 씨가 선호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한 판 춘다(一差し舞う)’. 그것에만 충실한다.
‘작법(作法)’의 터득에 필요한 또 한 가지는 정밀도가 높은 문체이다. 감도 좋은 신체가 감지하는 것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아까 들었던 예를 거듭하자면, 알람의 음량이 커지고 줄어드는 것이다. 그 경험은 디지털적인 기호 체계에서는 잘 얻을 수 없다. 인지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며, 소유하는 등의 타동사적 행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신체의 경험은 아날로그적인 연속성을 가진 채로, 그 반드르르함, 생생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만히 말로 치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정밀한 작업을 위해서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며, 다공적(多孔的)이고, 따스한 문체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필자는 그것을 ‘정밀도 높은 문체’라고 부른다.
와시다 씨는 감도 좋은 신체를 타고났다. 그것은 <비명을 지르는 신체>, <‘듣는다’는 것의 힘>, <피부에 상처 입기 쉽다는 것에 대해>, <‘약함’의 힘>, <교토의 정상 체온>, <맨손의 행위>, <니마이고시(二枚腰)의 권장> 등의 저작 표제에 피부 차원의 경험이 반복해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와시다 씨는 ‘피부로 철학하는’ 사람인 것이다.
피부 감각의 민감함, 이는 아마 와시다 씨에게 있어서는 천성인 것이다. 하지만, 그 피부 차원에서의 경험을 정밀하게 서술하기 위해서는, 정밀도 높은 문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사자는 그것을 손수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곤란하고도, 독창적인 작업을 와시다 씨는 훌륭하게 이뤄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감도 좋은 신체와, 정밀도 높은 문체 두 가지를 무기로 하여, 와시다 씨는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다. 이는 참으로 독창적인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는 와시다 씨만의 것이어서, 다른 이가 모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 ‘와시다 파’나 ‘와시다 주의자’가 철학사 상에 등장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와시다 씨의 철학은 와시다 키요카즈라는 단 일 개의 존재에 의해 기적적으로 일회적으로 나타난 것이며, 후세의 독자들은 그 광망(光芒)을 더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23-05-03 09:0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번역 노트】
1.
- 일본어 사전 -
작법 さほう사호우 강세 1【作法】
1
〔역사적 가나 표기「사하후さはふ」〕
① 예(禮)에 들어맞는 행동거지를 행하는 방식.「예의―」「―바르게, 손을 받쳤지만」〈婦系図•이즈미 교카〉
② 일을 행하는 방법. 방식.「문장―」
③ 관례. 관습.「이제까지의―,예에 관해서는」〈잠자리 일기•中〉
2
〔역사적 가나 표기「사호후さほふ」〕〘불교〙 불사(佛事)를 행하는 所作(쇼사しょさ〘불교 용어〙 몸 말 뜻 세 가지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의 방식. 「행렬의 ― 참으로 귀하도다」〈곤자쿠 이야기집•12〉
- 일영 사전 -
작법 さほう사호우【作法】
manners;etiquette. (⇨예의범절, ⇨예의)
▸ 일본은 作法(さほう)를 중시하는 나라다
Japan is a country where manners are important [prized, highly valued].
2.
- 일본어 사전 -
니마이고시 にまいごし 강세 2【二枚腰】
相撲や柔道で,一度崩れたようでも立ち直る粘り強い腰。また,そうした腰の持ち主。
스모나 유도에서, 한번 무너지려고 해도 다시 일어서는 끈기 있는 허리. 또는, 그러한 허리를 가진 사람.
- 일영 사전 -
니마이고시 にまいごし 【二枚腰】
〘스모〙〘비유적〙 one's last-minute strength to turn the tables on one's opponent.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래는 읽으셔도, 안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3.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목수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당상을 쳐다보며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그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은 신의 일(목수일)로 미루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 則甘而不固
疾則 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莊子 外篇 天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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