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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내 권력형 괴롭힘에 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5. 4. 14:40
와세다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지도 교수로부터 권력형 괴롭힘을 당해, 해당 교수와 대학 당국에 소송을 제기한 후카사와 레나 씨 측으로부터 법정 투쟁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한 문장 기고했다. 이는 상당히 예전 일로, 작년 7월에 쓴 것이다. 얼마 전 지방 법원에서 그 사건에 판결이 내려져, 전(前) 교수와 대학 당국에 벌금형이 부과되었다. 상대가 항소할 기미는 없어 보이므로, 이제 재판은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돈을 주고 머리를 숙이면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훨씬 심각한 이야기이다.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권력형 괴롭힘은 참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다. 왜냐하면 사제관계라는 것은 대등한 시민과 시민이 맺는 ‘사회 계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절대적인 비대칭성이 있다. 그것이 사제관계의 생명선인 것이다. 이 전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제관계에서 일어나는 권력형 괴롭힘의 본질을 알 수 없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사제관계는 사회계약이 아니다. 배우는 측이 ‘이러이러한 대가를 지불하겠으니, 이러이러한 지식이나 기능을 전수해주기를 바란다’ 하고 교사에게 고한다면 그 시점에서 그것은 더이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제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화폐와 상품의 교환과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제관계란, 제자가 이제부터 스승을 모시고서 자신이 무엇을 배우게 될 것인가에 대해 사전에는 알 수 없는 경우에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배우기 시작한다”는 것이 사제관계이다.
알아듣기 힘든 얘기라 면목없지만, 사제관계나 수업이란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비(非)계약적인 사제관계는, 그런 것이라고 ’자각되지 않는’ 채로, 지금도 학교 교육 가운데 살아있다. 그것이 ‘자각되지 않는다’는 점이, 일본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권력형 괴롭힘의 배양 기반이 되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일본의 전통 예능 노가쿠에는 장량과 황석공의 사제관계를 다룬 곡(曲)이 두 개 있다. <장량>과 <구라마텐구(鞍馬天狗)>다.
장량이란 인물은, 진 시황제의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유랑의 몸이 된 귀공자를 이른다. 장량은 어느 토지에서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을 전하는 황석공이라는 노인과 알고 지내게 된다. 황석공은 장량에게 ‘태공망의 병법을 전해 주마’ 하고 약속한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어느 것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느 날 장량은 말을 타고 있는 황석공과 마주친다. 그러자 황석공이 왼발에 신고 있던 신을 떨어뜨린다. ‘주워서 신겨라’라는 말을 듣고서, 장량은 그에 따른다. 다른 날, 또다시 말을 탄 황석공과 마주친다. 노인은 이번에는 양발의 신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또다시 ‘주워서 신겨라’ 하고 장량에게 명령한다. 장량은 ‘나 원 참’이라는 마음이 들고, 잠시 발끈했지만, 주워서 신겨준다. 그 순간 ‘마음 속 안개가 걷히고’, 즉시 태공망의 깊은 병법을 깨닫는다. 그러한 이야기이다.
이 서사를 일본인이 일종의 ‘기예에 관한 담론’으로 여기고 되풀이하여 읊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은, 여기에 사제관계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일본의 무예가나 예능가들이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황석공은 장량에게 유형적인 지식이나 기술, 정보를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신을 떨어뜨렸을 뿐이다. 그럼 어째서 이것이 비법의 전수로서 자리매김한 것일까.
처음에 황석공이 왼쪽 신을 떨어뜨렸던 것을 장량은 그저 우연으로 풀이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하지만, 두 번째로 겪었을 때 황석공이 양쪽 신을 떨어뜨린 것을 두고 장량은 ‘이는 우연이 아니다’라고 느꼈다. ‘이 동작은 무언가 의도적인 것이다’ 라고 여긴다. 애초에 장량과 황석공 사이에는 ‘태공망 병법 전수’라는 관계성밖에는 없다. 따라서, ‘태공망 병법 전수와 관련된 신호’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때 장량의 머릿속에는 황석공을 향한 ‘당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어쩌려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이 물음이 싹텄다는 것이 ‘비법 터득’의 실상이다. 필자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당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어쩌려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을 자크 라캉은 ‘아이의 물음’이라고 불렀다. 괜히 폄하적인 의미로 ‘아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간이 성숙으로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이 물음을 경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언행에 대해 자신을 수신인으로 하는 ‘암호’로써 감지하는 일이 가능함에도, 그 ‘의미’는 알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있을 수 있다기보다는, 많이 있다. 미리서부터 ‘암호 해독표’를 건네받지 않는 한, 그 암호의 의미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암호라는 점은 안다. 메시지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자신을 수신인으로 한다’는 점은 안다.
메시지의 컨텐츠와 어드레스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 거기에는 ‘엇갈림’이 있다. 그리고, 여러가지 지적인 자기 쇄신은 이 ‘엇갈림’에서 비롯한다.
그 소식(消息)은 세계 어디를 가도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설정한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약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뇌운(雷雲)이나 불기둥, 불타는 떨기나무 등 여러가지 비언어적 표상을 통해 예언자나 족장 앞에 임재(臨在)한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수신인으로 하는 메시지다’ 하는 점은 안다.
거기까지 알 수 있다면, 그 다음에 해야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긴 여정의 첫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암호 시스템 가운데 머물러 있는 한, 하느님의 메시지가 이해 불능이라면, ‘시스템의 외부로’ 발을 내딛는 수밖에 없다. ‘네가 태어난 고향,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가리키는 땅으로 가라’ 하는 하느님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구약성서는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일신교 신앙의 기동(起動)’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데, 설화(說話)의 구조는 모두 동일하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받는이라는 점은 알고 있는 메시지를 수신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장량의 경험이나 아브라함의 경험도 구조적으로는 똑같은 것이다. ‘배움’과 ‘신앙’ 모두 그렇게 시작한다.
사제관계를 통해 제자가 극적인 성장을 이루는 이유는, ‘메시지’와 ‘어드레스’ 사이에 ‘엇갈림’이 있기 때문이다.
스승이 자신에게 무엇을 고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자신을 수신인으로 한다는 것까지는 알 때 제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이 갖고 있던 기호(記號) 시스템을 떠난다. 자신이 가졌던 이제까지의 가치관이나 윤리규범을 일단 ‘괄호 안에 넣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필사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자가 스승을 믿고서 첫 한 걸음을 내딛을 때에,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된다. 갑각류가 일단 몸을 보호해주던 외피를 벗어버리고서, 취약하고도 상처 입기 쉬운 상태를 경유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탈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육의 장에서 권력형 괴롭힘이 반복해 일어나고, 그것이 누차 배우는 측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이유는, 배움을 기동(起動)시키기 위해 제자는 이 ‘무방비’ 상태를 경유(經由)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스승의 언동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旣知)’ 의미 시스템에 떨어뜨려 놓고 이해하려 드는 것을 억제하고, 그것을 ‘자신의 이해를 초월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를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해석 시스템 그 자체를 일단 해체하고, 쇄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자 된 자로서는 참으로 ‘올바른 행위’인 것이다. 그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배움의 길에 있어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이다. ‘비법의 터득’과 같을 정도로 커다란 한 걸음인 것이다.
문제는 이 제자의 결단을 이용해, 제자를 인격적인 지배-피지배 관계로 말려들게 하려는 인간이 ‘가르치는 측’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번 후카사와 씨의 사례는, 사제관계상 제자가 자신을 감히 무방비한 상태에 두고, 자신의 판단을 일시 보류하는 ‘올바른 행위’를 선택한 때에, 교사가 그것을 이용해,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려 든 것이다.
이 교사의 소행을 용납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단적으로 교사 개인의 속인적(屬人的)인 비열함을 드러낸 것에 그치지 않고서, 사제관계 그 자체를 욕보였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그녀의 내면에 떠오른 ‘배움을 향한 개방성’ 그 자체를 상처입혔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아마 앞으로 그녀는 더 이상 무구한 마음으로 ‘스승을 모시는’ 일이 어려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이제 일생동안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것이 불가능해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치관을 회의한다든지, 옳고 그름의 판단을 일단 보류한다든지 하는 일이 무서워져서 불가능해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수수께끼 같은 것’을 고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상처는 단순히 ‘한 사람의 지도 교원에게 권력형 괴롭힘을 당해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는 정도의 말로는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경우에 따라서는 회복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다.
이 교사는, 자신이 타인을 인격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쾌감을 향수(享受)하기 위해,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진 ‘배우는’ 능력 그 자체에 상처를 입혔다. 자신의 내면에 ‘배울’ 마음이 떠올랐을 때, 무언가를 ‘믿겠다’는 의지가 싹텄을 때, 즉시 강력한 공포감이 솟아올라, 그 감정을 억눌러버리고 마는 인간을 한 명 만들어낸 것이다. 그 죄의 무거움에 대해 이 대학 교사는 어느정도 자각적일까. 아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남자는 애초에 교단에 설 자격이 없었다.
교사의 활동은 개인이 꾸리는 일이 아니다. 집단적으로 영위되는 사업이다. 동의해주는 사람이 적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직능(職能) 집단의 규범과 윤리에, 모든 교사는 한 명 한 명이 충성을 맹세해야만 한다. 그것은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사 되는 자는,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자기쇄신을 감행하기 위해, 상처 받기 쉽고 취약한 단계를 경유하는 때에, 온 힘을 다해 그들을 외상적 경험으로부터 지켜내야만 한다.’
필자는 위와 같은 내용을 교육에 종사하는 모든 인간이 선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사라는 것은 의료인과 같은 정도로 태고적(太古的)인 직업이다. 그런 교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계율이 이것이다. 이 계율을 수많은 사람들이 우직하게 지켜나간 덕에 지금도 이 직업은 존속하고 있다. 교사의 본무(本務)는 이 한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023-04-11 09:0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옮긴이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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