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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내전으로 향해가는가> 바바라 F. 월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4. 27. 12:47
원제는 How Civil Wars Start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이다. 미국 사례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내전론’이다.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이제까지의 내전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내전이 시작되는지를 해설한다.
이제까지 일어난 세계 각지의 내전을 분석한 부분에서의 필치는 학술적이며 억제적이다. 하지만 일단 화제가 미국에 이르면, 문체가 적잖이 감정적으로 되어간다. 학술적인 저술의 경우, 필자가 개인적인 공포나 불안을 드러내는 일은 보통 없다. 논문은 개인적 감정을 억제하며 쓰여져야만 한다고 대학원에서는 가르친다. 물론 필자 월터도 대학 교수이므로, 그러한 규칙은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전의 절박(切迫)이 그녀의 자제심을 어지럽히고 있다. “미국에서의 두 번째 남북전쟁 발발의 위험성에 위기감이 고조되었기” (21쪽)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점을 이 책의 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학술적 억제가 듣지 않게 될 정도의 공포’를 리얼하게 전달해주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만 있으면 잘 느낄 수 없지만,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해 자행된 연방의회 난입 사건은 미국 시민들이 간직하고 있던 ‘법에 의한 지배’에의 신뢰를 깊이 깨뜨렸다. 현직 대통령이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시민들을 향해, 백악관을 지키고자 ‘지금 목숨을 걸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한다구’ 하고 사자후를 토하며, 연방 의회 공격을 사주한 것이다.
폴리티 인덱스라는 지표가 있다(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떤 나라가 어느정도 민주적인가, 전제적인가를 점수평가한다. 완전한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10, 완전한 전제정치 체제는 -10이고, 21단계로 평가한다. 이를테면 노르웨이, 뉴질랜드, 덴마크, 캐나다 등은 +10이다. 이 나라들에서는 국정 선거가 공정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특정 소수자에 대한 차별, 배제가 행해지지 않고, 정당은 국민의 의사를 적절히 대표하고 있다. -10은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등인데, 국민에게는 위정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위정자는 법률에 상관 없이 제멋대로 할 수 있다.
폴리티 인덱스가 +6에서 +10인 나라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간주되고, 점수가 -10~-6인 나라는 ‘전제 국가’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중간에 위치하는 +5~-5점인 나라는 ‘아노크러시(anocracy)’라고 불린다.
“아노크러시 아래에서, 국민은 대체적으로 선거를 통해 민주적 통치에 관여하지만,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정치 권력의 다수를 수중에 넣은 대통령 등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38쪽)
아노크러시는 ‘반(半) 민주주의(semi-democracy)’, ‘부분적 민주주의’, ‘하이브리드 민주주의’라고도 불린다.
어떤 나라가 아노크러시가 되어가는 과정은 두 가지가 있다. 민주정이 무너져 전제정치로 이행하는 과정과, 전제정치가 무너져 민주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이 개념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정치적 불안정을 불러일으키는, 내전의 계기가 되는 것은, 빈곤, 민족적 다양성, 불평등, 부패 등보다도, 그 정치체제가 아노크러시 존에 있는가의 여부라는 점이 통계적으로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나라가 가난해도, 민족적 그룹으로 분단되어 있어도, 빈부의 격차가 커도, 정치적 부패가 진행되어도, 그 나라가 완전한 독재제라면, 내전은 일어나기 힘들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치체제가 유동화했을 때 내전은 일어난다.
“내전 리스크가 가장 높은 나라는, 최빈국도 불평등국가도 아니었다(...). 민족적・종교적으로 다양한 나라도, 억압도가 높은 나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부분적 민주주의 정치 사회에서, 시민은 총을 손에 들고, 전투에 손을 대는 위험성이 컸다.” (40쪽)
독재자가 쓰러지고, 전제정치가 끝나고,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간다... 하는 상태를 우리는 단적으로 ‘바람직한 일’처럼 생각해왔지만, 그것은 어쨌든 틀렸다. 현실에서는 나라가 민주화되어가는 과도기, -5~+5의 ‘아노크러시 존’에 들어갔을 때에, 가장 내전 리스크가 높아진다.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예멘, 미얀마가 그렇다.
그 반대 케이스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가 전제국가로 ‘퇴행’하는 때에도 내전 리스크는 높아진다. 헝가리가 그러하며, 브라질, 인도, 그리고 미국도 지금 폴리티 인덱스 점수가 하락하고 있다.
미국은 2021년 1월 6일에 일어난 트럼프 지지자들의 연방 의회 난입 시점에서, 폴리티 인덱스가 +7에서 +5로 하락했다. ‘아노크러시 존’에 진입한 것이다.
“이리하여 미국은 2세기만에 아노크러시 국가로 변모했다. (...) 우리는 이미 가장 전통 있는 일관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183쪽)
이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이다. 미국은 ‘언제 내전이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된 것이다.
그 변화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미국 시민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것은 과대망상이라며 웃어넘기는 미국 시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아노크러시 존에 들어간 것은 학술적 사실이다.
아무튼, 이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미국 시민이 고려할, 가장 긴급한 정치적 과제는 ‘어떻게 내전을 회피할 것인가’가 된다.
“앞으로의 미국의 과제는, 유권자가 자신의 민주주의가 적절하게 기능할지, 또 그것이 신변의 안전에 보탬이 될지를 확신할 만한가 아닌가, 그리고 정치 지도자의 손에 의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호책을 재구축할 만한지 아닌가에 달려있다.” (185쪽)
앞으로 미국이 내전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유형의 질문을 앞에 둘 때, 미국 시민에게는 우선 참조할 수 있는 서책이 있다. <연방주의자 논집>이다.
<연방주의자 논집>은 미국이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뒤, 미합중국 헌법의 비준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쓰여진 85편의 연작 논문이다. 필자는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 등 세 명이다.
미합중국은 13개의 식민지가 모여서 만들어졌다. 13주는 독립전쟁 전부터 각기 고유한 헌법, 행정 조직, 군대를 가진 독립된 정치단체였다. 독립 후, 이제까지 주가 갖고 있던 권한을 어디까지 연방에 위양(委讓)하고, 어디까지 주의 몫으로 남길 것인가, 그것을 둘러싸고 11년간에 걸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연방주의자들은 주의 권한을 박탈하고, 강대한 연방 정부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내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독립 직후의 미합중국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열강에 더해, 네이티브 인디언과의 군사적 대립 리스크를 떠안고 있었다. 가령 이들 가운데 어딘가와 전투 상태에 들어갔을 때, 전쟁의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만약, 주 정부가 군사적인 독립을 바란다면, 주 정부는 일단 단독으로 외적에 대처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주가 공격받을 경우, 다른 주는 그 지원을 위해 급히 달려와, 그 방위를 위해 몸소 피를 흘리고, 자신의 돈을 투입할 것인가?’ 하고 연방주의자는 물었다.
혹은 ‘미국이 3개 내지 4개의 독립된 연합체로 분열해, 하나는 영국, 하나는 프랑스, 하나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대리 전쟁이 시작되었을 경우에, 미국 국민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연방주의자는 물었다.
독립 직후의 미합중국에 있어서는, 모두 개연성 높은 미래였다.
“제임스 매디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면, 그것은 파벌의 손에 의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화국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외적이 아니다. 지배에 집착하는 내부의 적이다. 그렇게 <연방주의자 논집>에는 쓰여져 있다.” (185쪽)
라고 필자 월터는 쓰고 있다. 실제로 연방주의자들은 공화국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은 ‘외적’ 및 ‘외적과 결탁한 주 정부’라고 생각했지만, 현재 미국 입장에서 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침공을 받거나 대국(大國)이 벌이는 대리 전쟁의 전장이 될 가능성은 없으므로, 내전의 가장 큰 위험 요소가 ‘지배에 집착하는 내부의 적’이라는 월터의 진단은 옳다.
그리고 월터에 의하면, 미국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내전의 형태는 연방주의자들의 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18세기 미국의 지도자는,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파벌이란 계급이 아닌, 민족적 정체성이 되리라는 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1789년 당시에 있어서, 적어도 연방 레벨에서의 유권자는 모두 백인 남성이었다. 오늘날, 투표 행동을 예견할 수 있는 주요 요인은 인종이다. 흑인, 라틴계 미국인, 아시아인의 3분의 2 이상이 민주당을 지지하고, 백인의 6할은 공화당에 표를 던진다.” (186쪽)
정체성 정치란, 어느 정치가를 지지할 때의 이유가, 그 정치가가 내건 정책의 적합성 여부가 아닌, 자신과 같은 ‘부족’에 귀속해 있는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을 이른다. 도널드 트럼프는 정체성 정치의 전형이다.
“그는 정체성에 의한 정치를 당당히 자신의 강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흑인이 모두 가난하고 폭력적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고, 멕시코인은 모두 범죄자라고 한다. 교계의 성추문에도 상관 없이, 기독교의 가치를 말한다.” (190쪽)
트럼프는 국민을 그 정치적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속 집단에 따라 분단하고, 자신들의 ‘부족’ 이외의 모든 부족은 사라져버려도 상관없다는 과격한 주장을 펼치며, 압도적인 포퓰러리티를 획득했다.
월터에 의하면 이러한 과격한 주장이 나오는 것은, 그 집단이 ‘격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전에 대한 통계적 사실로서 월터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고 있다.
내전을 시작하는 집단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은 정치적 결정 프로세스로부터 배제되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결정 요인은, 그 집단이 거쳐 온 정치적 지위의 내력상의 특질이다. 다시말해, 이제까지 권력의 상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추락해갈 때, 실체적 폭력에 기우는 경향이 일거에 높아진다는 점이다. 정치학자는, 이 현상을 <격하>라고 부른다.” (97쪽)
사람을 정치적 폭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상실’했다는 사실의 고통이다. 인간을 행동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무언가를 새로이 획득하자’는 동기보다도, 오히려 ‘잃어버린 것을 되찾자’는 동기이다.
“사람은 몇년이라도 견딜 수 있다. 이를테면 빈곤, 실업, 차별 등을 용인할 수 있다. 형편 없는 교육기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병원, 황폐해진 인프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자신의 것으로 여겨왔던 지위를 어느날 상실하는 것,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21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파벌이 여기에서 기인한다. 전날 권력을 보유했던 집단이 힘을 잃어 가는 국면이다.” (100쪽)
2012년 인구조사에서 미국은 당해년도 신생아 가운데 비(非)백인이 50%를 넘었다.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미국인은 증가 추세로, 2045년에 이르면 비 백인 인구가 백인 인구를 능가한다.
“백인 시민, 특히 농촌부의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뒤처지고 말았다는 소외감이 높아지고 있다. 1989년 이래, 고졸 이하인 백인 노동자의 생활의 질은 거의 모든 지표에서 하락하고 있다. 소득, 주택 소유, 결혼 비율 등은 급락, 평균 수명도 저하했다.” (195쪽)
“거주지도 편중되기 시작했다. 백인계는 동북부, 중서부, 산악 지대에 거주하고, 비 백인계는 도시부, 남부, 동서 연안부에 거주한다. 이 소외된 백인들은 정부가 비 백인을 우대하고, 비 백인들은 특별한 이득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느끼며 ‘격분’하고 있다. 2016년의 조사에서는, 백인의 50%가 ‘인종적 격분층’으로 분류되었다.” (200쪽)
“내전의 당사자가 극빈층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전날 특권을 보유하며, 그 아무렇지도 않은 행복을 상실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200쪽)
그들은 딱히 지금 이곳에서 무언가 구체적인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을 ‘빼앗겼다’고 느끼고 있다. 부모 세대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복’이었던 것에 더는 자신들의 손이 닿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다. 이 상실감, 피(被) 박탈감은 환상의 수준에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회복지 정책이나 지원책에 의해서는 그 상실감을 메울 수 없다.
<소프트/콰이어트>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의 벽촌에서 백인지상주의 여자들이, 자신들보다도 조금 더 좋은 집에 살고, 자신들보다도 몇 달러 비싼 와인을 마시고 있는 중국인 자매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사이에, 사소한 계기로 살해해버리고 마는 이야기다. 그녀들이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여기서도 역시 ‘비 백인이 이 사회에서 우대받고 있으며, 예로부터 자신들의 것이었던 특권을 가로채고 있다’는 병적인 피해자 의식이었다.
레스토랑이나 점포에서 비 백인을 ‘괴롭히는’ 것과, 정말로 죽여버리고 마는 것 사이에는, 원래대로라면 쉽게 넘을 수 없는 심리적인 장벽이 있을 것이다(높은 확률로 장기간에 걸친 투옥을 각오해야만 한다). 허나, 지금 미국에서는 그 심리적인 벽이 몹시 낮아져 있다. 보통 사람일지라도, 사소한 계기로 말미암아 이 벽을 넘는 일이 일어난다. 그에 대한 공포를 이 영화의 감독 베스 데 아라우호(모친이 중국인, 부친이 브라질인)는 아마 리얼하게 느끼고 있다고 본다.
바바라 F 월터, 베스 데 아라우호 모두 폭력의 절박(切迫)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 폭력의 연원은 ‘환상’ 가운데 있으며, 적절한 정책적 대응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은 어렵다.
월터는 최종장에서, 미국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적 제언을 몇개 들고 있다. ‘법의 지배’ ‘언론의 자유와 설명 책임’ ‘정부의 능력’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SNS를 통한 가짜뉴스의 확산이 억제된다면, 내전 리스크는 체감(遞減)한다. 민주주의가 강인해진다면, 내전을 회피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가 취약해져 있으므로, 강인하게 하면 된다’는 말에는, ‘병이 들었으니 치료하면 된다’와 같이, 올바르지만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다 읽은 뒤의 개인적인 감상을 말해보자면,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월터가 제안하고 있는 것과 같은 ‘올바른 정책’으로는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는 느낌이 든다. 내전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동하고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강력한 ‘분단 내러티브’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정도로 강력한 ‘화해 내러티브’를 창출해낼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필자로서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인은 아마 ‘화해 내러티브’를 기어코 창출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탁월한 능력 속에 미국의 ‘복원력(레질리언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독립 시점에서의 연방주의자와 주권파(州權派)의 대립, 남북전쟁에서의 국민적 분단 모두, 미국은 어떻게든 극복해냈다. 이번에도, 내전의 위기를 미국은 회피한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21세기 전반 어드메에서 미국은 이제까지 100년 이상에 걸쳐 점해왔던 그 탁월한 지위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날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은 일본에서 일어날 내전 리스크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일본의 폴리티 인덱스는 이래봬도 +10인 것이다), 미국의 몰락이 가져다줄 충격에는 대비할 필요가 있다. 아마 일본의 지도층으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겠지만, ‘생각하기도 싫은 일’은 종종 일어난다. 그것은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
(2023-04-01 08:1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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