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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감소 사회의 병폐’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7. 8. 15:11
‘인구 감소 사회의 병폐’
어느 마이너한 매체로부터 위와 같은 표제로 기고를 의뢰받았다. 일반인 분들이 접하실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여기에 재수록해 둔다. 하지만, 쓰여 있는 것은 ‘늘상 하는 얘기’다.
‘인구 감소 사회의 병폐’라는 제목을 편집부로부터 의뢰받았다. 논하기를 바란다는 토픽으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회적 환경이 어째서 정비되어 있지 않은가’, ‘이대로 가다가는 어떤 장래가 상정되어 있는가’, ‘해결책은 있는가’ 등이 제시되었다.
그러한 기고 의뢰를 받아둔 처지에 참으로 면목이 없지만, 사실 ‘인구 감소’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에 필자는 반대이다. ‘반대’라고 하기에는 말이 좀 지나칠지도 모르니 ‘회의적이다’쯤으로 해 두겠다. ‘인구 감소’는 과연 ‘병’인 것인가?
젊은 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인구 문제’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구 폭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5년에 로마 클럽이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었다. 이대로 인구 증가가 계속된다면, 100년 이내에 인류가 미치는 환경 부하(負荷)에 따라 지구는 캐링 캐패시티의 한계에 달한다고 경종을 울린 것이다.
인구를 줄이는 것이 인류의 긴요한 과제였다는 이야기를 필자는 그때 알게 되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분명히 그 무렵에는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너무 많았다. 고속도로의 정체에 맞닥뜨렸을 때, ‘일본의 인구가 조금만 줄어들었으면 좋을 텐데’ 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대학 교원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교원 연수회가 열렸다. 거기서 ‘이제 18세 인구가 급감하니, 우리 대학도 그에 대비해야만 한다’고 전달받았다. 잠깐 기다려주기 바란다. ‘인구가 너무 많아서 난리’라는 말을 이때껏 듣고 지냈는데, 느닷없이 ‘인구가 너무 줄어들어 난리가 나게 생겼다’ 는 말을 들어도, 그렇게 갑자기 사고가 전환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이다. 어느 해의 일본 18세 인구가 어느 정도일지는 18년 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구 동태(動態)라는 것은 통계 숫자 가운데 가장 신뢰성 높은 축에 속한다. 그렇다면, ‘18세 인구가 앞으로 줄어드니까, 그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에 대해 어째서 18년 전에 의논을 시작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런 와중에, 조사해 보니, 어느 대학이든 18년 전에는 ‘임시 정원 증대’로 학생 정원을 늘리고, 교직원 수를 늘리며, 재정 규모를 확대해 놓은 것이다. 분명히 그 시점에서의 18세 인구는 늘어나 있었으므로, 그에 적절히 대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 탓에 ‘18세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난처해지는 제도’를 착실히 만들어 낸 것이다. 도대체, 당시 대학 경영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 ‘18세 인구가 줄어들어 곤란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내가 퇴직하고 난 뒤의 일일 거고, 어쨌든 지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두는”게 낫지 않겠어?’ 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필자였어도, 그 시대에 대학에 근무했다면 똑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홍수여 나의 앞에 닥치지 말지어다' 인 것이다.
그 당시에 필자가 배웠던 것은 ‘사람들은 인구 문제에 대해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였다. 아무튼 ‘인구 문제’의 정의 자체가 ‘인구 증가’에서 ‘인구 감소’로 변경되었지만, 그에 대해 누구로부터도, 아무런 설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필자는 인구 문제에 대해, ‘주지하는 바와 같이’라는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구 감소’를 느닷없이 ‘병폐’로써 논하는 것에도 저항감이 드는 것이다.
애초에 지금도 인류 규모로 따지면 인구 문제란 인구 감소가 아니라 인구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류의 인구는 현재 80억. 앞으로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계속 늘어, 21세기 말에 지구상의 인구는 109억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 예측이 옳다면, 지금으로부터 80년, ‘글로벌 사우스’는 잇따라 인구 폭발에 의한 환경 오염이나 기아, 의료 위기 문제에 계속 직면하게 된다. 결국, 인구 문제가 전일적으로 ‘인구 감소’를 의미하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는 일부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구는 항상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둘 중 하나라서, ‘이게 적정’이란 게 없다는 점이다. 인구에 대해서는 적정한 수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구 문제를 말할 때의 전제이다.
일본의 인구를 따져볼 때, 대체 몇 명이 적정한가, 필자가 아는 한, 그 숫자를 제시해 준 사람은 없으며, 어느 숫자가 적정하다는 국민적 합의를 얻은 적도 없다. 허나, 일본 열도의 ‘적정한 인구 수’를 모르는 채로, 인구에 대해 ‘너무 많다’든가 ‘너무 적다’를 논하기는 과연 가능한가?
인구론의 기본 문헌으로써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맬서스의 <인구론>이다. 맬서스의 주장은 이해하기 쉽다. ‘적정한 인구수란, 식량의 카텍시스[備給]가 따라갈 수 있는 인구 수’라는 것이다.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에 따라가는 한, 인구는 아무리 늘어도 상관 없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과격한 이론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와 ‘인간에게는 성욕이 있다’는 두 전제 위에 성립하고 있다. 성욕에 사로잡힌 탓에 인구는 등비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등차급수적으로밖에는 증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 인구 증가를 식량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게 되고, 기아가 인구 증가를 억제한다, 는 것이 맬서스의 생각이다.
이는 자연관찰에 기반하고 있다. 어느 환경 내에서 서식할 수 있는 동식물의 개체 수는 정해져 있다. 환경의 부양 능력을 넘는 수가 태어나는 경우, 공간과 양분의 부족에 따라 도태가 이루어지며, 개체 수는 조정된다. 말 그대로다.
다만, 인간의 경우는, 약간 리파인(refine)되어 있어서, 아사해서 도태되기 전에 인구 억제가 가해진다. 곤궁한 시기에 있어서는, “결혼하는 것에 대한 주저 즉, 가족을 부양할 어려움이 상당히 높아지기 때문에, 인구 증가는 중단된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이 성장해도 “자립도 못하게 되고, 타인의 베풂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데까지 영락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거리가 존재하면, 문명국의 이성적인 젊은이들은 “자연의 충동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함에 따라 결혼 안하게 된다. 맬서스는 그렇게 예측했다. 이는 현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구 감소의 실상을 완벽하게 설파하고 있다.
더욱이, 남성의 성욕을 생식에 결부짓지 않고서 처리하는 장치(“부도덕한 습관”)가 문명국에는 완비되어 있다는 점 또한 인구 억제에 효과적이라고도 맬서스는 지적했다. 형안(炯眼)의 소유자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현재의 인구 문제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타당하다(인구는 등비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예측은 틀렸으며, 인간의 환경 파괴가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미처 생각해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인류 전체의 인구는 21세기 말에 100억 명을 넘어 정점을 찍고서, 그때부터 감소한다. 좀 더 빨리 감소하기 시작할 거라는 예측도 있다. 이후에 어디까지 감소할지는 모른다. 19세기 말에 세계 인구가 14억이었으므로, 그 어드메에서 환경의 부양력과 균형이 맞춰져 인류는 정상(定常; regularity. 균정. - 옮긴이) 상태에 들어갈 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허나, 당분간 선진국은 (미국을 제외하고) 모두 급격한 인구 감소에 직면한다. 그 추세의 제 1주자(top runner)는 일본이다.
일본의 인구는 최근 통계에서는 2070년에 8700만 명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현재가 1억 2600만 명이므로, 앞으로 연 83만명 가량 줄어드는 계산 결과이다. 83만 명으로 말하자면 야마나시 현이나 사가 현의 인구다. 그것이 매년 하나씩 사라진다.
2100년의 인구에 관한 일본 내각부[内閣府]의 예측은, 중위 추계로 6,400만 명. 이는 상당히 낙관적인 수치다. 중위 추계가 4700만 명이라는 예측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21세기 말에 일본의 인구는 지금의 절반 정도가 된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러일전쟁 무렵이 ‘생령 오천만(生靈五千萬)’으로 일컬어지므로, 이백 년이 걸려 메이지 40년 경의 인구로 돌아가는 셈이다.
인구 감소에 대하여, 우리가 채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원리적으로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자원의 ‘도시 집중’, 다른 하나는 자원의 ‘지방 분산’이다. 일본인은 과거에 있어서 ‘지방 분산’의 성공 경험은 가지고 있지만, ‘도시 집중’에 대해서는 애초에 경험이 없다.
필자는 보수적인 인간이므로, ‘과거에 성공 체험이 있었던 경우는 그 사례를 참조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 - 옮긴이)가 말하는 것처럼, ‘잘될 보증이 없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구축하는’ 데에 필자는 경계적이다.
가까운 장래에 일본은 인구 5000만의 나라가 된다. 그 경우에 어떤 제도가 적절할지를 생각할 때에는, ‘잘된다는 보증이 없는’ 도시 집중 시나리오보다는, 실제로 일본의 인구가 5000만 명이었던 동시에 안정적으로 통치되었던 메이지 40년 대의 ‘지방 분산’ 시나리오를 참조하는 것이 앞뒤가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메이지 유신까지 일본 열도의 인구는 약 3000만 명. 그것이 276개의 번(蕃)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기 다른 번에는 행정관이 있고, 군인이 있고, 상인이 있고, 관헌 무예 지도역이나 노가쿠샤[能楽師], 다도 스승[宗匠]이 있으며, 고유한 방언이 있고, 식문화가 있고, 전통 예능과 종교 의례가 있었다. 사이즈는 다르지만, 번(蕃)은 단립(單立)의 정치 단위이고, 원칙적으로는 자급 자족의 경제 단위이며, 고유한 문화공동체였다. 이것이 ‘지방 분산’의 기본적인 아이디어이다.
메이지 유신 뒤 번(蕃)은 해체되고, 부현제[府県制]로 이행했지만, 메이지 정부는 도쿄에의 자원 집중을 꾀하는 동시에 자원의 지방 분산에도 힘을 쏟았다.
그 한 가지 지표로써 교육 자원의 지방 분산을 들 수 있다.
메이지 40년대에는 도쿄 제국대학, 교토 제국대학, 도호쿠 제국대학, 규슈 제국대학 이렇게 4개의 고등 교육 기관이 마련되었다(경성, 타이베이를 포함한 9개 제국 대학이 정비된 것은 1939년). 구제(舊制) 고교*의 설립은 한참 일러서, 도쿄의 제일 고등학교가 메이지 19년, 이후 메이지 41년까지 센다이, 교토, 가나자와, 구마모토, 오카야마, 가고시마, 나고야에 8개의 ‘넘버 스쿨’이 설립되었다. 그 이후의 구제고교(도시명을 따서 ‘네임 스쿨’이라고 불린다)는 마쓰에, 히로사키, 미토 등의 읍성[城下町]을 시작으로 뤼순(旅順)까지 문자 그대로 ‘전국 방방곡곡’에 19개교가 전개되었다.
(* 구제고교: 고등학교의 개념과는 별개. 구제고교생으로 선발된 뒤 제국대학에 자동 진학. - 옮긴이)
물론 교육 자원의 지방 분산만을 살피고서 메이지 정부의 국책 전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통, 통신, 상하수도, 전력을 위시한 여타의 사회적 인프라도 전국에 널리 정비되었는데, 여기에는 강력한 정치적 고려가 관여했다. 보신 전쟁[戊辰戦争]에서 패한 ‘반군[賊軍]’ 지방이 이 점에서는 노골적으로 푸대접받았다는 점은 아시는 바와 같다.
그럼에도, 전국 방방곡곡에 될 수 있는 대로 균등하게 자원을 분배한다는 것이 메이지 시대로부터 쇼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이었으며, 국민의 비원(悲願)이기도 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적어도 일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도시부만이 번영하고, 지방은 쇠퇴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목표’로 했던 정책이 국민적인 지지를 얻어 실시되었던 사례를 필자는 알지 못한다.
사정이 이러하니만큼, 인구 5000만 명 일본의 사회 모델을 구상하는 판국에는, ‘메이지 40년의 일본’을 기본으로 하여, 그것을 어떻게 modify해서, ‘2100년 사양’으로 할까를 의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어 놓지를 않는다.
인구 감소 국면에 있어서 선택해 마땅한 시나리오가 ‘자원의 도시 집중’이라는 점이 이미 정계, 관계, 재계 입장에서는 기정 방침으로 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에만 자원을 집중하고, 그 이외의 토지는 인구가 줄어들도록 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인구 소멸화[無住地化]시키는 시나리오를 이미 채택했으며, 실시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국민의 동의를 얻는 치다꺼리를 생략하고서, 잠자코 실시하는 것이다. ‘지방을 내버려둔다’는 게 기정(既定) 방침이건대, 공언하기를 삼가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런 정책을 공약으로 내건다면 자민당은 지방에서의 의석을 잃고, 정권 여당의 자리에서 굴러떨어질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엄하게 ‘도시집중’ ‘지방소멸’ 시나리오를 실현시키면서,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않는다. 애시당초 ‘두 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어떤 것을 채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정부는 은폐하고 있다. 그게 국민적인 의논거리가 되는 것 자체를 회피하려 든다. 그리고 어느 날, 지방의 축소화・소멸화를 돌이키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데까지 진행된 시점에, ‘도시 집중 시나리오 이외에 일본이 살아남을 길은 없습니다’ 하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그러한 수순이다. 뭘 믿고 이런 말을 하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공개 자료로도 이 정도쯤은 누구나 추리할 수 있다.
인구 감소 문제는 국민적인 의논을 통해 대책을 결정해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국민적인 의논은 행해지지 않고 있으며, 국민적인 합의 형성도 안중에 없다. 그러한 의논이 행해지고, 동의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정부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게, 필자는 딱히 일본 정부나 기업, 언론 사람들이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국민의 눈이 닿지 않는 데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그저 멍하니 ‘인구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원의 도시 집중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누구 하나 ‘지방 분산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고 정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정치가도 국민도 다를 바 없다.
그 이유를 들자면, ‘인구 감소에는 도시 집중으로 대처한다’ 는 것은 무슨 정치적 입장씩이나 되는 요청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한 요청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경제성장을 지향한다. 그럼으로써 지구 환경이 열화된다 해도, 인류가 서식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경제 성장을 지향한다. SDGs라든가 Woke Capitalism 등이 대두하여 ‘저기요… 인류가 망하면, 자본주의도 망해버리는데요’ 하고 머뭇머뭇 문제제기하고 있으나, 물론 자본주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자본주의는 단지 시스템일 뿐이지,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는 생존전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날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인류가 과도한 수탈에 의해 멸종하여, 자본주의도 끝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도 뭔가 학습 진화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해도 쓸데없는 일이다. 저쪽은 생물이 아니므로, 자기보존 본능도 없으며, 물론 ‘터득’ 비슷한 것도 없다. 자본주의는 ‘대홍수’가 닥칠 때까지 오로지 계속 폭주한다. 그 폭주의 음덕을 입어 제 잇속을 챙기려는 ‘잡된’ 인간들을 끌어들이며 폭주를 지속한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는 ‘울타리 치기(인클로저 - 옮긴이)’로부터 발동했다는 가설을 세웠다. 울타리 치기라는 것은 19세기 영국에서, 농지를 목양지로 전환하고, 자영농들을 토지로부터 내쫓아 도시로 몰아넣어서, 노동력 말고는 팔아치울 게 없는 무산자로 전락시켰던 프로세스를 이른다. 인위적으로 ‘인구 과밀지’와 ‘인구 과소(過疎)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과소화된 토지에는 생산성이 높은 사업(방적업이 기간 산업이었던 19세기 영국에서는 목양)을 전개하고, 토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어, 채용 대비 지원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고용 조건을 끌어내렸다(‘널 대체할 인력 따윈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 자본가가 고용 조건을 절하할 때 구사하는 마법의 문구라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후, 자본주의는 이 성공 체험을 잊은 적이 없다. ‘인구가 과밀해서, 지원자가 채용을 상회하고, 열악한 고용 조건임에도 노동하는 도시’와 ‘인구가 과소해서, 생산성 높은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지방’으로의 양극화는 자본주의에 있어 최고의 환경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작금의 인구 감소에 따른 시장의 축소, 노동자의 감소라는 부정적 환경 아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21세기의 울타리 치기’를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이외의 경제 시스템을 구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정책 결정을 하고 있는 이상, ‘도시 집중’ 시나리오가 선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망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일본보다도 빠른 페이스로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합계 특수 출생율은 2022년에 0.78. 저출산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본조차도 1.26이므로 한국의 저출산 진행 속도의 이상함(異常さ)을 알 수 있다.
그런 한국에서는 인구 감소와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이미 인구의 45.5%가 서울과 경기도에 집중되어 있고, 그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한국 제 2의 도시인 부산에서는 젊은이의 유출이 현저하여, 이미 시내 15개 대학 가운데 14교에서 미등록 사태가 일어났다.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는 대학의 폐교가 이미 시작되었다.
작년에 한국에 강연 여행을 갔을 때 ‘지방의 인구 감소’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하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지방의 인구소멸[過疎化・無住地化]은 매우 시리어스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내에 ‘수도권 집중 현상’에 대항할 만한 유효한 언설이 존재하지는 않아 보였다(있었다면 외국 사람을 오라 가라 하지 않는다).
한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구 감소 국면에서 자본주의는 반드시 도시 일극 집중을 선택한다. 필자는 그것을 ‘싱가포르화’라고 부른다. 도시 일극 집중 그 자체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요청이기는 하되, 국토의 태반을 무주지(無住地)로 만들고, ‘산하’를 파괴하며, 국민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전원(田園)이 없는 미래를 밀어붙이기에 이르려면, 정치 시스템의 개조 또한 연동되지 않고서는 될 턱이 없기 때문이다.
아시는 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싱가포르의 ‘유일 최고 국가 목표’는 ‘경제 발전’이다. 이것이 국시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정책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적부(適否)가 판정된다.
싱가포르는 일당 독재 국가이다. 국회는 있지만, 인민행동당이 1968년부터 81년까지는 전 의석을 점유했으며, 81년에는 처음으로 야당이 1석을 얻었다. 2011년의 총선에서 야당이 6석을 얻었을 때, ‘역사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리콴유는 정계를 은퇴했다. 노동조합은 사실상 활동이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정부가 공인한 조합만이 단체행동권을 가지며, 모든 노동자의 임금은 정부가 결정한다**). 대학 입학 희망자는 정부로부터 ‘위험 사상의 소유자가 아님’ 이라는 증명서의 교부를 받아야만 하므로, 물론 학생 운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내치안법’이 있어서 체포 영장 없이 체포하고, 거의 무기한으로 구류할 수 있으므로, 정부 비판 세력은 조직적으로 배제된다. 야당 후보자를 당선시켰던 선거구에는 세부담이나 공공투자로 ‘벌’이 가해진다. 신문 TV 라디오 등의 미디어는 거의 전부가 정부계 지주회사의 지배 아래 있다. 리(李)씨 일가가 정치 권력과 국부 모두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북한의 ‘김씨 왕조’와 흡사하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싱가포르에는 ‘지방’이 없다. 도시밖에 없다. 그러면서 경제 활동은 더없이 효율적이다.
(** 노사 간의 임금 단체교섭은 일본에서는 낯설지 않은 노무 관행임. - 옮긴이)
현재 일본의 자민당이 노리고 있는 정치개혁은 싱가포르의 정체(政體)를 모범으로 하고 있다. 반정부적인 야당 세력에는 국회 의석을 주지 않고, 노동운동을 포섭하고, 언론을 지배 하에 두고, ‘세습 귀족’들이 권좌를 점유하며, 정권과의 친소(親疏)가 그대로 커리어 형성에 직결되는 네포티즘(nepotism) 정치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자민당 정치는 그야말로 ‘싱가포르화’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싱가포르는 국민 감시 시스템을 패키지로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발명한 ‘사회적 신용 시스템’은 정권에 비판적인 시민의 신용 점수를 하락시키는데, 해외 여행을 금지한다든지, 열차나 호텔 예약을 잡지 못하게 하여 행동을 제한하는 정밀한 제도이다.
이 국민 감시 시스템을 자민당은 일본에도 도입하고 싶어 하지만, 차마 중국에서 직수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어쩔 수 없이 독자적으로 정비하려 했던 것이 그 문제 많은 ‘마이넘버 카드 시스템’이다. 목표하고자 하는 바는 중국이나 싱가포르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인구 감소 사회에 ‘병폐’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대로 재원이 부족해 연금제도나 사회보장이 유지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의 형태가 극적으로 바뀌려 함에도 불구하고, ‘인구 5000만명이 된 일본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 의논하는 것 자체가 제도적으로 억압되어 있다는 병적인 현실 가운데 있다.
인구 감소 사회의 병폐란, 인구 감소 사회에 대해, 국민 전체가(정치인 공무원 기업가 등 지도자도, 국민도) 일동 사고 정지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 말고는 없다.
(2023-06-26 09:1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번역 노트
다음은 일본 중의원 국회의원 오자와 이치로 의원실 트위터에서 표명한 일본 정부의 ‘마이넘버 카드 제도’에 대한 입장문 번역입니다.
https://twitter.com/ozawa_jimusho/status/1676856814619721728
결국, ‘마이넘버 카드’의 장점은 편의점에서 ‘주민표*’를 뗄 수 있다는 것 정도. 일상 생활에서 거의 쓸모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여러가지 정보를 통합(紐づく)했기 때문에 정보 유출의 위험이 현격히 높아진다. 또한, 소지하지 않으면 국민건강보험 진료를 받지 못한다고 말하며, 국가는 ‘마이넘버 카드’가 없을 때의 단점을 강조. 협박하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다른 이의 주민표를 발급받았다는 사례, ‘마이넘버’ 보험증에 다른 이의 의료정보가 잘못 등록되었다는 사례, ‘마이넘버’ 포인트가 다른 이에게 지급되었다는 사례 등의 연쇄 트러블. 허나 디지털청 대신(大臣)**은 업자 탓, 지자체 탓, 건보조합*** 등의 탓이라며, 오로지 책임 회피. 국민의 불신감・불안감은 확실히 높아지고 있다.
(* 한국의 주민등록표초본과의 차이는, 각종 사회보장 관련 자격득실 증명 또한 가능하다는 점이며, 발급 수수료는 최대 3000원 선. - 옮긴이)
(** 2021년 9월에 발족, 의전 서열상 총무성보다도 위인데, 현임 수장은 고노 다로河野太郎 상. - 옮긴이)
(*** 한국의 국민건강보험 공단 개념과 약간 다르면서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우에카라메센(上から目線)에 입각해 “근로자-단체”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생각할수록 민족지民族誌적 기습奇習으로 보입니다. - 옮긴이)
결국은 이권. 특히 ‘마이넘버 카드’의 발행 사업을 독점적으로 맡고 있는 J-LIS(지방 공공단체 정보 시스템 기구)는 이권의 소굴. 불과 몇 개 되지 않는 거대 IT “대형 건설사(ゼネコン)”에서 파견나온 직원이 자신의 원래 회사에 발주. 금액 기반으로는 9할이 수의계약이고, 이런 몇몇 큰손들에 집중되어 있다. 당연히, 가격은 부르는 대로 정해지는 데 가깝고, 상당히 비싸게 책정되어 있다.
거대한 시스템을 몇몇 회사가 독점적으로 수주하고, 사후 운용이나 유지보수에 서도 여타의 회사가 연관될 수 없게 만드는 구조. 경쟁이 일어나지 않고, 거액의 세금이 낭비된다. 고위 공무원은 J-LIS에 낙하산으로 가고, 자민당에는 업자들이 상납하는 헌금이나 정치자금 파티권**** 구입을 통해 되먹임. 정치-공무원-기업 이권의 트라이앵글화.
또한, 디지털청 본부에도 이들 IT 주요 기업의 직원이 대거 포진. 이제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정책이 이권화되어 가고 있는 참상. 사실, 도쿄 올림픽 때와 완전히 똑같다. ‘이제 올림픽으로 가자’ ‘이제 디지털로 가자’ 라는 식의 흐름이 도래하면, 어째선지 이 나라의 정부는 전부 면책받은 듯이 거액의 세금을 낭비한다. 이권 대국 일본.
(**** 한국의 정치인 출판기념회에 해당되겠지요. - 옮긴이)
건강보험증*****이나 운전면허증 모두 딱히 ‘마이넘버 카드’에 귀속시키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산모 수첩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단점밖에 없다. 또한 지자체에 발행을 재촉한 나머지, 카드의 사진을 잘 알아볼 수 없어 본인 확인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럼에도 국가는 폭주를 지속한다. 특히 보험증은 국민의 생명과 관련 있다. 이권을 위해 보험증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
의료 기관에서의 ‘마이넘버 카드’ 통합 보험증이 야기하는 문제점이 잇따르고 있는데, 앞으로도 늘어날 것은 명약관화하다. ‘마이넘버’ 보험증을 처리할 수 없는 의료기관은 폐업이 불가피할 것이다. 정치의 사명은 국민의 생명과 생활을 지키는 것. 그 정치란 것이 국민의 목숨보다 이권을 우선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자민당 정권은 무너지지 않으면 안 된다.
(***** 공단 발행의 종이 보험증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제 많은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매우 일찍 "강행"한 덕택, 이와 동시에 경제적 사회적 발전이 다소 처졌던 덕택은 생각보다 있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사정도 있고 해서, 일본의 보험증의 발행 주체는 다양하다고 합니다. - 옮긴이)
디지털청의 고노 다로 대신(大臣)은 돌연 ‘마이넘버 카드’의 명칭 변경을 검토하겠다는 얘기를 꺼냈지만, 관방장관은 검토한 적 없다고 말한다. 자민당 정권은 이름을 바꿔서 어벌쩡 속아넘기는 짓을 줄창 해 왔다. ‘버릇 못 고쳤다’는 얘기. 이름을 바꿔도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새 ‘마이넘버 카드’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의미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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