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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바비 Barbie 랜드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8. 28. 11:24
화제의 영화 <바비>(2023)를 보고 왔다. '화제' 라곤 해도, 인터넷 상에서만 그렇다는 것이지, 아직 일반 매체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바비 인형' 할 때의 그 바비 이야기다. 판타스틱한 꿈속 나라 이야기라고 여길 사람이 간혹 있을 게다(필자도 예고편을 봤을 땐 그랬다). 한데 엔터테인먼트 영화라는 겉모습과는 정 반대로, 실제로는 이게 미국의 젠더 구조를 예리하게 고찰해 낸 작품이었단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바비 랜드'에서 주민들은 만고불변한 자신들의 성역할에 안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바비 한 명에게 위기의 조짐이 나타난다. 바비 랜드의 평온을 되찾기 위해, 바비는 '현실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허나, 여행에 따라왔던 보이프렌드 인형 '켄'은 현실사회에서 접한 남성지배상에 흠뻑 매료되어, 바비 랜드에도 남성지배를 도입하겠다는 발상을 떠올린다. 한편 바비는 현실에서 만났던 여학생들로부터 '당신이 성역할을 고정시켜버려서 페미니즘은 50년이나 뒤처졌어. 이 파시스트야!' 매도당하며 완전히 풀이 죽고 만다.
이제 바비는 어떻게 그녀의 아이덴티티 위기를 극복해나가면서, 동시에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성지배 체제로 변모한 '켄덤랜드(옛 바비 랜드)'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정말 어려운 문제다.
여성들이 최대한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환상의 바비 랜드는, 사실 현실 세계에서의 남성지배에 길항하는 균형추로써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아이들이 핑크빛 환상을 갖고 노는 동안, 남자들은 터프한 현실의 지배가 가능하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우리는, 이른바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을 존재케 하며, '현실'이라고 굳게 믿는 것도 실은 한낱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심원한 식견에 이르게 된다. 얼씨구, 매우 철학적인 영화였던 것이다. 꼭 보시기를.
(2023-08-22 06:2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영화는 죽었다>,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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