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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100년, 조선인 학살을 생각한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8. 24. 20:13<월간 일본>지로부터 제목과 같은 주제로 인터뷰에 응했으므로, 채록한다.
- 올해는 조선인 학살 100년에 접어드는 시점입니다. 우치다 님은 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조선인 학살은 '우리나라 역사의 어두운 면'입니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지진과 화재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았던 사람들도 패닉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고 있다' '불을 지르고 있다'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그리고, 자경단을 조직했던 사람들이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사회주의 세력을 이름 - 옮긴이)에게 몰려들어 도검과 죽창으로 살해했습니다. 혼란한 가운데 일어난 일이므로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천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어째서 이렇게 잔인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는가. 원인은 일본인 측의 죄의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10년에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 조선총독부는 1919년에 일어난 삼일운동 등의 독립 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해왔습니다. 일본으로 돈을 벌러 나왔던 조선인들에게도 내지인은 비인도적이고 차별적인 대우를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앙심을 품고 있으며, 기회가 되면 복수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불안감을 일본인은 품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조선인들에게 내보여왔던 미움에 가득 찬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고서는, 그것을 타인의 얼굴이라고 굳게 믿고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평온한 공생 가운데 살고 있었다면, '조선인이 덮쳐 올 것이다'와 같은 망상이 생겨날 리 없습니다.
배외주의에 따른 증오의 대상은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추상 개념으로서의 '집단'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배외주의나 민족차별이 격심한 곳은, 외국인이 살지 않는 지역입니다. 개인적인 교제가 있는 경우, 외국인을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 바라봅니다. 개인 차원에서 교제를 하다 보면, 어느 민족이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비율이라든지,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비율 같은 건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따라서, 고유한 이름을 가진 외국인과 사귈 수 있는 사람은 폭력적인 배외주의 이데올로기에 그리 간단히 물들지는 않습니다. 관동대지진의 경우에도, 고유한 이름을 가졌던 조선인들과의 인간적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은 여러 차례 그들을 보호하는 측으로 돌아섰습니다. 학살에 가담했던 건, '조선인' 자체를 집단 차원으로밖에는 대하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배외주의적 폭력이 발동하는 조건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폭력을 휘둘러도 상대로부터 반격당할 가능성이 없을 것. 다른 하나는 공격받는 대상이 유징적(有徵的)일 것입니다.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 인민(人民)이므로 제 1조건은 충족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조건인 유징성은 그 판단이 애매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우에는 외모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관동대지진 때는, 언어가 구별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자경단은 수하의 대상이 되는 타인에게 '<주고엔 고짓센[十五円五十銭]> 해 보라'고 을러대며, 어두(語頭)의 탁음[濁音]을 발음할 수 없는 사람들을 '조선인'으로 보고 살해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대만의 1947년 2·28 사건에서도 행해졌습니다. 이때 대만인은 중화민국인(국민당, 외성인 - 옮긴이)에게 '일본어 해 봐라' 으르면서, 말하지 못한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이 두 사건은 '일본어 운용 능력이 학살의 근거가 되었던 사건' 으로써 잊혀져서는 안 될 과거입니다.
- 작금의 일본에서는 혐한 감정이나 배외주의가 고조되고, 한국인을 위시한 외국인 차별이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조선인 학살에 대해, 현대 일본인이 직접 져야 할 형사상의 책임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전의 일본인이 범했던 죄과를 치를 윤리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은, 사자(死者)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떠한 역사적 문맥 속에서, 어떻게 사망하였는가, 그것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그 세부 사항에 걸쳐 서술하고 기억하는[語り継ぐ] 것입니다.
장례식에서 조문객이 한 명 한 명 고인에 대한 추억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제사[供養]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단지 절하고(원문 합장合掌 - 옮긴이) '명복을 빕니다[お悔み申し上げます]' 말하고서는 마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죽은 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가,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장사지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 <아즈마가가미吾妻鏡>, <다이헤이기太平記> 모두 오로지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를 상세히 읊습니다. 죽은 이들의 공적[事績]을, 레디메이드한 기준에 기반해 현창하거나, 혹은 단죄하기보다도 '어떻게 살다 갔는가'를 상세히 읊는 작업이 우선합니다. 죽은 이를 제사지낸다는 것은, 경을 읽는다든가 향을 피우고 공물을 바치는 것보다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갔는가'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작업이 우선합니다.
2차 대전만 놓고 보더라도 요시다 미츠루의 <전함 야마토의 최후>나 오오카 쇼헤이의 <레이테 전기>는 병사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 감상성과 영욕 그 모두를 폐하고서, 그런 것들만을 억제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죽은 이의 추모가 된다고 여겨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죽은 이들은 신령으로 모셔지[祭神として祀られる]기보다도, 여하한 아픔이나 고통 가운데, 혹은 여하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는가를 증언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요시다와 오오카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래 150년 간,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국가를 위' 한다는 이유로 비명횡사를 당하였음에도, 그들을 제사지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마땅하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태껏 국민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바 없습니다.
탈근대 시대에 접어들어 천황 측은 전몰자들을 '위령하는 여로'를 상징으로서의 천황이 따를 본무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이는 죽은 이들이 실제로 잠들어 있는 장소까지 가서, 국적에 상관 없이, 그들의 죽음을 진솔히 애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어엿한 행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원[祈り]으로부터 소외되고 만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재일 코리안(재일동포의 원적은 지금에 와서 애매해진 경우가 대다수임 - 옮긴이)의 죽음은 누가 돌볼 것인가에 관한 것. 근현대사 속에서 일본과 조선의 틈바구니에 떨어졌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죽은 사람들을 제사지낼 책임은 일본인에게 있느냐, 한국 북한 사람에게 있느냐 하는 겁니다.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을 제사지내는 작업을 그 직계 자손인 재일 코리안에게만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들을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역사적 책임은 일본인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또한 그들을 제사지낼 의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10년 쯤 사이에, 조선시대 말부터 일제통치 시절을 무대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속속 제작되고 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이나 <밀정> 등은 모두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묘사된 적이 드물었던 시대를 집중적으로 그림으로써, '애도받지 못한 죽은 자들'을 다시금 제사 지내려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집니다.
애플 TV+에서 작년에 스트리밍을 시작한 <파친코>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부산 영도에서 한일 병합[日韓併合] 약간 나중에 태어난 뒤 결혼하여 1930년대에 오사카로 이주했던 '선자'라는 여성과 그 일족의 역사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재일 코리안이 주인공이므로, 드라마는 중간부터 일본이 무대가 되며, 등장인물의 많은 수는 일본어로 말합니다. 작품 속에서는 관동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역시 살해당하는 측의 시점에서 그려집니다. 뛰어난 드라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도대체 왜, 이 원작을 일본인이 드라마화하려 하지 않았던 걸까' 하고 가만히 따져 보게 되었습니다.
원작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 이민진이 쓴 같은 이름의 소설인데, 뉴욕타임즈의 2017년 베스트 10책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일본을 무대로 한 작품이 미국에서 높이 평가받는 일은 꽤나 드뭅니다. 일본에서 화제가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2020년에 번역이 나왔음에도 언론에서는 이를 거론한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통해 이 드라마를 본 게 2022년 5월이었는데, 그 시점에 위키피디아에서 '파친코'를 검색했을 때 나왔던 건 다들 아는 종래의 게임기뿐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일본인을 연기했던 것도 일본인이 아니라, 미주의 일본계였습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어째서 일본 언론은 애써 외면했겠습니까.
근래 일본 사회에는 '역사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기는커녕, 자국 역사에는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 따위는 전혀 없다고 큰소리치는 역사수정주의가 설치고 있습니다. 매년 9월 1일에 도쿄에서 행해지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역대 도쿄도지사는 추도문을 보냈습니다만, 현임 고이케 유리코 지사는 2017년부터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고이케 지사는 그 이유를 '무엇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지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체험자가 증언하는 '이런 저런 내용'은 신뢰성이 떨어지므로 '명백한 사실'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거스를 수 없는 이상,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확정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개연성 높은 과거'까지는 말할 수 있지만, '명백한 역사적 사실'은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확정될 수 없'는 이상, 검증 노력도 안 하고, 사과도 안 하고, 추모도 안 하겠다는 것은, 역사적 허무주의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신의 관점에서 역사를 내려다볼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 자격에 따라 하겠다면 증언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을 집단으로서 집적하는 것이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 말씀하신 역사 서술 기제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먼 북소리>라는 에세이집에서, 이탈리아 벗의 안내를 받아 그의 고향인 메타 마을을 찾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메타 마을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2차 대전 때 일을 글쎄, 지난주에 일어난 일마냥 얘기하는 거라구. (중략) 전쟁 당시 나치 군대가 마을에 찾아들어서는 레지스탕스 혐의를 놓고 마을 청년 둘을 잡아간 일이 있었어. 그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 (중략) 지금도 그 얘기를 매앤날 모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거야."
메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2차 대전 때 일을 "지난주에 일어난 일"처럼, "매앤날 모두가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그들의 체험을 반복해 서사화[物語る]하는 게 원래 의미로써의 '역사를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내셔널 스토리 프로젝트>라는 라디오 기획이 있었습니다. 작가 폴 오스터가 라디오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가짜 같은 진짜 이야기'를 모집했던 방송입니다. 미국 전역에서 4000 통의 편지가 도착했고, 그 가운데 오스터가 골랐던 것을 방송하였습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인종, 성별, 직업, 지역성이 짙게 반영되었고, 이를 통해 오스터는 '미국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그 감동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야심찬 시도를 본떠서, 10년 전 쯤에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 씨와 제가 <일본판 내셔널 스토리 프로젝트>라는 것을 통해 사연들을 가려보자는 기획이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도 2000통 정도 편지가 왔습니다만, 이건 미국의 <내셔널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일본 사회의 자연스런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양성이 없는 겁니다. 에피소드는 제각기 재미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연은 보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젊은이인지 노인인지, 도시 사람인지 시골 사람인지, 화이트칼라인지 육체노동자인지, 주룩주룩 읽기를 마칠 때까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개인의 회상을 종합해 일본 사회를 표징시키려던 기획은 달성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아, 이게 일본이구나' 하는 점은 이해했습니다. 일본은, 구성원들을 그야말로 규격화시켜버리는 사회란 것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공개된 영화 <아베 국가장葬의 날>(오시마 아라타 감독)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 당일 일본 각지 사람들의 목소리를 채록했던 다큐멘터리 작품입니다. '찬성' '반대' '관심 없음' 등 여러가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건져내어, 일본 국민의 정치적 다양성을 그려내려 했던 것이 아마 애초의 아이디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희가 했던 <내셔널 스토리 프로젝트>와도 같이, 어느 입장이든지 간에 대부분의 사람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정형구를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술회할 어휘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빈약합니다. 진실로 리얼한 생각이 있고 그걸 말로 표현하려 들면, 짜맞춘 듯한 정형구로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하든지 과한 말이 될까 부족한 말이 될까 하며, 전전긍긍할 터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전긍긍'을 경유해야 '참된 마음'이 고개를 내밉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본인이 정치를 논할 때는 '어휘를 찾느라고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자신의 개인적 감회를 어떻게든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짜고 치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맙니다.
하지만 '정론'이나 '일반론' 따위, 극언하자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겁니다. 어차피, 누군가가 같은 얘길 해주는 거니까요. 말로 할 값어치가 있다는 것은, 자신이 신체를 담보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자기를 대신해 전하지 않을 말'입니다. 일반론이나 대의명분은 말로 해놓으면 '가볍습니다'. 그야, 발화하는 자기 신체 자체의 제능력을 힘껏 다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말해줄 테니까요. 자신이 희생하고 애써서까지 입 아플 필요가 없습니다. 간단히 소비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어휘가 가벼워집니다.
- 일본인은 왜 일반론이나 정론밖에는 논하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요.
'개인적으로 리얼한 것'보다 '일반적으로 올바른 것'을 우선하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개인적으로 리얼한 것'은 말로 하기 어렵습니다. 그걸 어떻게든 말로 표현되도록 노력을 하면, 말은 딱 그만큼 성숙하고 넉넉해집니다. 하지만 일본인은 이제 그 노력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귀찮은지라, 고만고만한 말들을 빌려서 끝내버리도록 하게 되고 말았어요. 적당한 말이란 '다수파의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형구를 앵무새처럼 입에 담는 한, 스리슬쩍 '다수파에 속해 있는' 기분이 듭니다.
원래부터 일본은 동조 압력이 지나친 사회였습니다만, 지금은 SNS에 의한 상호 감시가 확산된 탓에, '누구라도 말할 것 같은 것을 말하라'는 동조 압력이 이상하게 높아져 있습니다. 그 결과, '일반론'과 '역베팅[逆張り]' 두 종류밖에는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둘 다 '누구나 할 법한 말'입니다. '역베팅 논객'들에게 그렇게 팔로워가 많은 이유는, 따라하기 쉽고 지적 부하가 덜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는 말'을 하고, 그것을 공공의 지적 자원으로써, 누구든지 액세스 할 수 있도록 퍼블릭 도메인에 공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이 증언할 수 있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론이나 정론 따위는 100만 명이 논해도, 역사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무의미합니다.
- 애시당초 역사를 기억하고 이야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개인의 작업입니다. 가만 보면 '역사의 풍설을 견딘 것만이 살아남으며, 역사의 도태압에 견디지 못했던 것은 사라져간다'는 말을 곧잘 듣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역사의 심판력을 믿어도 좋다고는 저는 생각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착한 사람이 수난받고, 악인이 부귀영화를 다하며, 현자가 불우함을 감내하고, 어리석은 자가 각광받는 일이 일상다반사입니다. 역사의 심판력은 사뿐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인은 '현실화했던 것은 현실화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라졌던 것은 현실화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는 허무적인 역사주의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자고로 사마천은 <사기>의 첫머리에서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는 격한 문장으로 역사의 심판력에 대해 물었습니다. 사마천은 '열전'에서 제일 첫번째로 '백이(伯夷) 열전'을 놓았습니다. 백이와 숙제 형제는 주나라의 녹을 먹기를 거부하고 아사했던 인자(仁者)입니다. 인자가 곯고, 도척같은 극(極)악인이 천수를 다 했던 사실을 역사의 심판이랍시고 비판 없이 받아들이면 쓰겠느냐고 사마천은 묻습니다. 백이와 숙제의 이름을 후세에 남겼던 것은 '하늘의 도'가 아니라, 공자라는 개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사적에 관한 옳고 그름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늘의 작업'이 아닌, '인간의 작업'입니다. 사마천은 그리 단언합니다. 이는 역사가로서의 올바른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사를 관통하는 철의 법칙성'이 우리를 대신해 진리를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가 개인의 자격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역사의 전모를 '신의 관점'에서 한 눈에 부감하여 서술할 수 있는 인간 같은 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가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혹은,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후세가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마땅하다고 믿었던 또다른 사람의 말을 스스로 전합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 옮긴이), 술이부작(述而不作; 만들어낸 게 아니라 받아쓴 것 - 옮긴이), 자왈(子曰) 모두 윤리적 형식은 동일합니다.
- 우치다 님께는 몸소 계승하고자 할 서사로서의 역사가 있으십니까.
개인적으로는,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부터 한일 병합에 이르는 시기 한일 양국의 역사에 관해 그리 하고자 합니다. 이 시기에, 다루이 도키치, 곤도 세이쿄, 우치다 료헤이, 스즈키 덴간, 김옥균, 전봉준 등 한일 양국의 우국지사들이 매우 짧은 기간이었기는 했지만, 일본 열도와 조선 반도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함께 품었습니다. 그것은 메이지 초기의 '정한론'과 한일 병합 사이에 존재한 찰나의 '아다 바나[仇花]*'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품었던 뜻[素志]은 가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또한 훗날의 재일 코리안처럼, 양국의 틈바구니에 살았던 사람들이며, 현재로서는 양국의 역사 어디에도 점할 만한 장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이름이 잊혀지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아다꽃: 꽃잎은 피웠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져버린 꽃. 계절을 착각하고 피어난 꽃. 벚꽃처럼, 피기가 무섭게 곧바로 지는 꽃. - 옮긴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참에, <월간일본> 출판부 분으로부터 곤도 세이쿄의 저작을 복간함에 따라 해설을 써 주었으면 한다는 의뢰를 받았으므로, 지금 꼬박꼬박 쓰고 있는 참입니다. 한일 인사의 개인적이고도 리얼한 교류에 중심축을 두고서 쓸 작정입니다. 이를테면, 천우협[天祐俠]의 젊은이들은 불과 14명이서 동학 접주 전봉준을 만나러 가서, 동맹 관계를 맺습니다. 스즈키 덴간은 그때의 전봉준의 인상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곧은 허리를 똑바로 세운 자세로 하여, 아니 그보다도 수척하고 신경질적인 안면에 형형한 안광을 번득이며 급거 도단, 감루를 삼키는 예서, 아등으로 하야 간담을 진동케 했나니. 당시 그 용태 일생 잊지 못할진대. 아등은 실인즉 생사고락의 벗됨을 맹서하여 바야흐로 훗날을 도모하였도다"
한일 양국의 혁명가들이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의 증언이 "생사고락의 벗됨을 맹서하여 바야흐로 훗날을 도모하였도다"라는 점은 뜻깊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장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추도함과 동시에 한일 양국의 미래를 위하여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7월 31일 인터뷰어 및 구성 杉原悠人)
(2023-08-21 07:0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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