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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감님, 왜 이런 영화를 만드셨어요?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8. 29. 17:07

     

     
    저자 소개 :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영화는 죽었다>,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등.

     

    필자는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꽤나 열렬한 팬이다. 이제까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 대한 영화평을 몇 가지 써 왔다. 미야자키의 작품을 보고 난 뒤에는, 언제나 말하고 싶은 게 용솟음치는지라,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것이다.

    이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점에 변함은 없지만, 그것은 여태처럼 자신이 보았던 영화에 대해 말함으로써 '한층 깊은 유열(愉悅)'을 끌어내기 위함이 아니다. '이 작품은 도대체 어떠한 작품인가'를 무언가 말로 해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미야자키 작품이라면, 이야기는 완결되고, 마지막에 복선은 회수되며, 영화의 '메시지' 역시 별다른 해석의 수고를 들이지 않고서도 말끔히 전달되었다.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영화를 담뿍 즐기고 난 연후에, '과연 이야기는 이걸로 완결되어 있는 것인가?' '복선은 정말로 회수되어 있는 것인가?' '이런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로 납득해도 되는 건가?' 하는 숙독의 의무가 관객에게 맡겨졌다.

    특별히 숙독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순박하게 보고 있자면,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로 즐거운 것이다. 하지만, 한층 깊은 유열이 있나 싶어, '좀 더 뭔가 뒷이야기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주방을 슬쩍 엿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면 영화를 두 번 즐기게 된다.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렇지 않다. 한 번 본 것만으로는, 무엇을 보았던가, 어떠한 이야기였던가를 잘 이해할 수 없다. 과연 이 작품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관객은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까지 그러한 '귀찮은 작업'을 관객에게 요구한 적이 없다. 까다로운 관객이 제멋대로 의미를 심화시킨다든지, 뒤를 캔다든지 하며 바글바글 제멋대로 했을 뿐이지, 일반적으로 순박한 관객은 '아이 재밌었다'고 대만족하며 마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도 않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소년이 어머니를 찾아 황천 나라에 가서, 이런저런 <어머니의 대리 표상>들과 만나고, 그녀들과 함께 황천 나라를 모험한 뒤, 어머니를 단념하고, 현실세계에 귀환한다' 쯤이 된다.

     

    소년이 어머니를 찾아서 '황천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전 세계의 신화 속에 있다. 세상 모든 집단에는 소년을 위한 '통과의례'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때까지 맘 편히 살고 있었던 '모친과 일체화된 낙원 상태'로부터 어느날 폭력적으로 잡아뜯겨져서, 터프하고 와일드한 '리얼 월드'로 내보내지게 된다. 그 경험은 아이들에게 깊은 아픔과 슬픔을 가져다준다. 그 상처는 치유될 필요가 있다. 그 치유를 위한 장치가 '어머니와의 결별/유아기와의 결별'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고통은 자네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 역시 자네와 똑같이 이 고통을 맛보았던 것이다. 자네만이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고통의 공통성'이라는 정념이 독성 강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완화해 준다.

     

    많은 이야기들을 보면, 결별해야 할 자신의 유아기가 '얼터 에고'로 표상된다. 순수하고, 취약하고, 섬세하며, 도덕심이 결여되어 있고, 이기적이며, 매력적인 '친구'가 그것이다. 그 '친구'와 '나'는 가슴 뛰는 한 여름의 모험을 함께 한다. 그러나, 여름이 끝나면,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나'로부터 떠나가고, '나'는 깊은 상실감을 떠안은 채로 혼자서 살아가기를 결의한다. 순진무구한 응석받이 얼터 에고와의 이별을 통해 소년은 터프하고 쿨한 '어른'이 된다.

     

    알랭 푸르니에의 <대장 몬느(Le Grand Meaulnes)>,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羊をめぐる冒険)> 모두 '그러한 이야기'이다. 소년 시절과의 결별은 보통은 그러한 설화적 정형을 취한다.

     

    보통은 그러한 정형을 취한다. 허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것과는 달랐다. 분명히, 이것 역시 소년이 어머니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유아적 얼터 에고와 헤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친과 헤어지는 이야기라는 직접적인 모습을 취한다.

     

    소년은 '죽은 모친을 찾으러 명계(冥界)로 내려간다'. 소년의 얼터 에고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것은 '모친의 대리 표상'들이다(계모 나츠코, 어머니의 소년 시절인 히미, 소년의 수호자인 키리코 씨). 그녀들은 저마다 소년이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단편(斷片)'이다. 단편이므로, 이들은 모두 소년이 찾고 있는 '어머니'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세 명의 '단편적인 어머니'를 보탠다면, '어머니'의 촉감은 조금은 분명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럼에도 소년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마히토의 비정서적인 모습은 '어머니와의 재회'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소년기와의 결별을 스트레이트한 '어머니와의 이별' 서사가 아닌, 한번 꼬아놓은 '유아적인 얼터 에고와의 이별' 서사로 치환해 온 이유는 '어머니와의 이별'은 너무 직접적이고, 너무 고통스러우며, 도저히 이야기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와의 이별'을 '어린 자기 자신과의 이별'로 치환함으로써, 똑같은 경험을 조금이나마 견디기 쉬운 것으로 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아기의 innocent하고 깨지기 쉬운 자신과의 이별'이라는 설화 정형을 채용하면, '어른'이 되고 만 후에도, 지나가버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잠깐이나마 '무구한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가능하다. 실제로 <붉은 돼지>의 포르코, <바람이 분다>의 지로 모두 회고적인 신에서는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러한 '짜맞춰진 설화 원형'을 버리고서, 스트레이트하고, 구원받을 길 없는 '어머니 찾기'와 '어머니 만남의 실패'의 이야기를 생애 최후의 작품 주제로 선택했다. 아마 그것이 자기밖에는 만들어낼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이야기는 아마 잘 안 될 것'이라는 점을 본인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고, 아마 주위에서도 그렇게 말하며 만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확실한 성공을 노리는 사람이 아닌지라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을 줄곧 해왔다. 그래서 천재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머니 찾기 서사'는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있어, 다카하타 이사오와 짝을 이뤘던 TV 애니메이션 <엄마 찾아 삼만 리>로부터 반세기에 걸쳐 이어져 왔던 생애의 주제였다.

    그리고, 다시금 기억을 반추해 보면, '소녀들의 모친'은 주제적인 존재가 된 적이 없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나우시카, <칼리오스트로 성>의 클라리스,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시타 모두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이웃집 토토로>의 사츠키와 메이의 어머니는 줄곧 입원중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키키와 치히로의 어머니 모두 이야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자취를 감춘다. <모노노케 히메>의 모친은 들개이다.

    소년의 경우는 좀 더 철저적이다. 인상적인 '소년의 모친'을 필자는 미야자키 애니에서는 보았던 기억이 없다. <모노노케 히메>의 아시타카, <천공의 성 라퓨타>의 파즈,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아스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하쿠 모두에게는 모친이 없다. 물론 애초에 어머니가 있었으니만큼 그들은 존재하게 되었겠으나, 그들에게 모친의 잔영은 없다.

     

    모친은 없지만, '어머니의 대리 표상'은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도라, <이웃집 토토로>의 칸타의 할머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제니바, <마녀 배달부 키키>의 빵집의 오소노 씨나 파이를 만드는 노부인이 미야자키 애니에서는 '모친 대신'으로서 그 중후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녀들은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모친 대신'이지 진짜 어머니는 아니다.

     

     

    위에서 쓴 바와 같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어머니는 세 가지 캐릭터로 분열되어 있다. 어째서 모친을 세 명으로 분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 이유를 필자는 잘 모르겠다.

    서사적으로 생각하면, 마히토의 여행 동반자는 히미 한 사람이면 말끔하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되기 이전의 어머니>와 손을 잡고서, <어머니가 되고 난 뒤의 어머니>를 찾는 사이에, 여행의 동반자인 소녀에게 마히토가 연심을 품는' 이야기가 된다(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한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 라면,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결정적 이별을 치유하기 위한 이야기로서는 제법 기능할런지도 모른다. 전례가 없으므로, 성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녀 히미의 출연은 너무 적어서, 마히토에게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없었다. 키리코 씨는 도라나 오소노 씨에 해당하는 인물이지만, 그녀도 또한 소년을 껴안고, 소년의 존재를 전(全)긍정하며, 소년의 미래를 축복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는다. 계모 나츠코는 '모친 흉내'는 내지만, 소년을 말 그대로 전부 받아들이기 마련인 모친의 본래적 책무만큼은 단호히 거절한다.

     

     

    이 작품은 사전 홍보를 하지 않았거니와, 이야기가 난해하므로, 공개되고 나서 인터넷 상에서 이런저런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니다' 하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단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작가 자신이 '나는 이런 의도로 만들었다' 하는 자기 주석은 반드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작가의 해석이 일반 관객의 해석보다 우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천재는 자신조차 생각지 못했던 것을 작품 내에서 실현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종 이야기의 줄거리와는 관련이 없는 세부적인 묘사이기도 하고, 등장인물 이름의 음운이기도 하고, 뒤를 지나가는 것의 조형이기도 하다. 의식의 가장 깊은 층에 있는 것은 종종 표층에 노출된다. 그것은 작가 본인의 통제를 벗어나 화면 위에 선명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렴풋이 보는 관객일수록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해석에 문학사적 지식을 늘어놓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서도, 장 폴랑은 <타르브의 꽃>에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종류의 빛을, 그것을 어렴풋이 보고 있는 사람은 감지할 수 있으나, 응시하는 사람은 볼 수 없다."

     

     

    이는 문학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애니메이션이라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렴풋이 보고 있는 사람' 이야말로 잘 볼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미야자키 애니가 전 세계를 석권했던 이유는 '어렴풋이 보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미야자키 애니의 최대 유열자(愉悅者)라는 역설이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처럼 이래저래 성가시게 해석을 하는 인간보다도, 아무 저의도 없는 아이들이 미야자키 애니를 깊이 향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렴풋이 보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던가를 잘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이 '어떤 빛을 내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응시'를 요청받는다. 그렇지만, 그건 과연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라던 바였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까지도 분명히 자신의 애니는 일본 아이들을 예상 관객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언해 왔다. 어른이 해석을 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작품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만들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이라도 즐기면서, 종지부호가 나왔을 때 초등학생이라도 '아이 재미있었다'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작품을 염두에 두어 왔을 것이다. 그 점에서 말하자면, <바람이 분다>와 이 작품은 이제 '어린이용' 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이 작품이 '어린이용' 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난해해서만이 아니다. 사실 이제까지의 미야자키 애니에 반드시 있었던 것이 두 가지 빠졌다. 그것은 '귀여운 트릭스터'와 '하늘을 나는 소녀'이다.

    미야자키 작품에는 반드시 '귀여운 트릭스터'가 등장한다.

    트릭스터라는 것은 인간 세상과 이 세상 아닌 세계를 가교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화학(神話學)적으로는 '꺼림칙한 존재'이다. 두 가지 세계의 속성을 한 몸 안에 가지는 하이브리드 생물이기에 꺼림칙한 조형인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트릭스터를 '귀엽게' 조형해 왔다. 그 덕에, 주인공들이 현실계와 이세계의 경계선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것에 관객은 위화감을 느끼지 않은 채 넘어갔다.

    현실 세계와 '이 세상 아닌 세계' 사이 경계선의 왕래가 판타스틱하고 부유감 있는 영상 체험으로 마련되었던 것에는, 무엇보다도 이 '귀여운 조형'이 기여해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토토로가 예의 둥글둥글하고 포근포근한 것이 아니고서, 좀 더 울퉁불퉁하고 쨍한 촉감의 것이었다면, 이 영화는 보다 '꺼림칙한 것'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검은 고양이 지지와 <모노노케 히메>의 코다마 모두 귀여웠다.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귀여움 성분'이 부족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 버릴 정도의 귀여운 생물은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코다마와 닮은 하얀 '와라와라'가 등장하지만서도, 코다마만큼 귀엽지 않다. 펠리컨이나 앵무새도 딱히 '귀여운' 유(類)에 속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서의 트릭스터는 왜가리인데, 이것의 본래 모습은 추악한 용모의 중년 남자이다. 올바름과 사악함, 선함과 악함의 분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트릭스터성(性)을 확실히 갖추고 있지만, 조형적으로 귀엽지 않음으로 하여, 왜가리가 화면에 등장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부터 기다렸던 관객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것은 '하늘을 나는 소녀'이다. 미야자키 애니는 클라이맥스 신에서 소녀가 하늘을 난다. 그게 이번에는 없었다. 하늘을 나는 것은 소녀만이 아니다. '하늘을 날 리가 없는 것'이라면 뭐든 좋다.

    미야자키 애니에서는 '절대 하늘을 날 리가 없을 터였을 것'이 비행한다. '하늘을 날 리가 없는 것'이 물리 법칙을 거슬러 둥실 떠올라, 가속하여, 결국 구름 사이를 기분 좋게 활공한다. '하늘을 날 리가 없는 것'이 마치 정말로 공중에 떠다니는 것마냥 '보여지는' 것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작화 기술을 유감 없이 퍼부어왔다.

    나우시카의 메베, 키키의 빗자루, 미네 후지코의 글라이더, 포르코의 비행선, 소년 지로의 수제 비행기 모두, '하늘을 날 리가 없는 상황'에서 날고자 한다. 그때에 관객들은 '날아라, 날아라' 하고 두 손을 꼭 쥐고서 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반드시 듣게 된다. 두둥실 '하늘을 날 리가 없는 것'이 뜰 때, 관객은 자신들의 기도가 실현되었다고 느낀다. 영화 속에서 일어난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도에 직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관객은 영화 속에, 그 구성원의 하나로서 말려든다. 눈치 채지 못하는 새 영화 안에 몰입해 있다. 그렇게 관객을 영화의 세계 속에 말려들게 하는 기술에 있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천재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commitment의 감각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에서 관객은 얻을 수가 없었다. 마히토는 끝내 하늘을 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계단이 무너져내리는 장면이 있었다. 여태까지의 미야자키 애니였다면, 주인공은 결코 추락하지 않았으리라. 루팡 3세나 파즈도 무너져내리는 계단을 척척 달려올라갔다. 아시타카는 돌을 박차고 시시 가미의 신체로부터 흘러나오는 독기[瘴気]를 가벼이 피했다. 하지만 마히토는 계단과 함께 추락해, 석재(石材)의 산에 묻히고 말았다.

    주인공이 '날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키키가 시계탑에 매달려 있는 톰보 군을 구하기 위해, 가까이에 있던 아저씨의 빗자루를 빌려서, '날아라!' 하고 속삭일 때,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의 대부분이 주인공과 함께 '날아라!' 하고 속삭였을 터이다.

    이제까지의 미야자키 애니에서는, 관객이 강하게 염원했던 것은 화면 내에서만큼은 반드시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은 작품의 질과는 관계가 없는 레벨에서의 일이다. 그렇다곤 해도, 관객이 영화 가운데 상상적인 방식으로 '참가하는' 유열을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머니 찾기와 그 좌절'이라는,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는 강한 필연성이 있는 테마에 곧바로 마주했다. <엄마 찾아 삼만 리> 이래로 반 세기에 걸쳐서 이 주제를 미야자키 하야오는 '서랍 속에 넣어두'어왔다. 그리고 이번에 그 봉인을 해제해서, 스트레이트한 '어머니 찾기' 서사를 만들었다. 그 필연성에 대해서 말할라치면 그건 '개인적인 일'이므로, 뭇사람들이 왈가왈부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하면 관객은 기뻐한다'는 것을 장인으로서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숙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그것을 스스로 봉인했다. 이 봉인이 의식적인 것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본다. 어찌하여, '이렇게 하면 관객은 기뻐한다'는 고안을 구태여 봉인하였는가, 그에 관해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말을 필자는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읽고서 '아무렴, 그랬던 거구나! 이런 피상적인 해석을 하다니, 내가 생각이 참 짧았었다...'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경험을 부디 하고 싶다. 진심으로.

     

    (2023-08-2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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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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