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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에 관한 인터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9. 1. 20:44
어느 교육 잡지와 입시(수험)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하였으므로, 채록한다.
-- 현재의 교육이나 입시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입시는, 같은 학령인구 내부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잘 할 수 있는' 경쟁입니다. 그런데, '경쟁'과 '배움'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상 말씀드리는 것은, 상대적인 우열을 아무리 치열하게 다툰다 해도, 그에 따라 집단 전체의 지적인 퍼포먼스가 향상되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경쟁을 강화하면 개인적으로는 힘을 키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집단은 전체적으로 약해집니다.
저와 관련이 있었던 프랑스 문학 연구의 세계에서도, 취업하기가 어려워지고 나서부터는, 입시와 마찬가지로, 연구자들 사이에서 우열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정된 전임교원 자리를 둘러싼 경쟁이므로, 당연히 엄밀한 심사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밀도 높은 심사를 하기 위해서는, '연구자가 될 수 있는 한 많은 분야'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업적'을 올릴 것이 요구됩니다. 당연하지요. 될 수 있는 한 모수(母數; Population Parameter)가 많은 집단에 속해있으면, 경쟁은 격심해도, 심사의 객관성은 높아집니다. 저처럼 '달리 누구도 연구하는 사람이 없는 분야'를 연구하는 인간은, 넋 놓고 있다간 불문학계 내부에서 '모수 전무(zero)'가 됩니다. 비교할 대상이 없으므로 '심사 불가'로 간주됩니다. '심사 불가'라는 것은 '0점'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는 난처하므로, 정밀한 심사를 바라는 젊은 연구자들은 19세기 소설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야에는 일본인 연구자이면서 세계 수준에 달한 학자가 모여있었으므로, 심사가 엄밀할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심사가 엄밀하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젊고 야심 있는 연구자들은 심사가 엄밀한 분야에 집중하여,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당최 의미를 알 수 없는 트리비얼(trivial)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야에서의 연구 수준은 분명히 향상되었습니다. 수준은 향상되었습니다만, 프랑스 문학과에 진학하러 오는 학생은 오히려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야, 학회 내부에서 '이너서클 파티'를 하고 있으니만큼, 일본의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앞에 나서서 '프랑스 문학 연구는 재미나단다. 친구들도 불문과에 와서 같이 재밌게 공부하자꾸나' 하고 말을 거는 학자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아이들에게 다가가 프랑스 문학이나 철학을 경험하는 게 얼마나 유쾌한 지적 활동인가를 고지하고 선포하는 일을 불문학자가 하지 않으면, 그런 성가신 일은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쟁이나 심사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학의 불문학과에 진학하러 오는 학생들이 사라져 버리고 만 겁니다... 진학하러 오는 학생이 사라지면, 불문학과를 설치해 둘 이유가 없습니다. 불문학자를 위한 대학교원 티오 그 자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불문학과에서 수준 높은 경쟁을 하며, 한정된 티오를 다투는 사이에, 불문학과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 소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차마 웃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학문은 집단 전체의 지적 퍼포먼스를 향상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가령 탁월한 학자가 있다손 쳐도, 그들이 이룬 업적의 가치가 집단적으로 인지되고, 지적 자원으로써 '공공적으로' 이용 가능한 방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 업적은 발휘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집단적인 방식으로 지성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입시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잘 하는' 경쟁이므로, 특정 분야에서의 지식이나 기능은 향상되겠지요. 하지만 집단 전체의 지적 수준은 내려갑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에 흥미를 가질라치면 이에 강한 규제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걸 해봤자 대학 가는 데 아무 쓸모 없다' 는 말 한 마디에, 아이들이 가진 다양한 지적 관심이 억제되고 맙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바는, '당장은 대학 가는 데 쓸모 없는' 지적 활동이 종종 집단적인 규모에서의 지적 브레이크스루(breakthrough)를 가져다주어 왔다는 점입니다. 입시 공부를 시키는 것에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경우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지적 리스크를 집단적인 규모로 떠안는다는 점에 대해서 조금은 경계심을 가지는 게 좋겠습니다.
-- 현재 중요시되고 있는 영어 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행해지고 있는 영어 교육은, 외국어를 배우는 방식으로써는 목표하고 있는 방향이 다소 어긋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인간적 성장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 하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학교에서 하고 있는 영어 교육은 '인간적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외국어 학습에는 '목표 언어'와 '목표 문화'가 있습니다. '목표언어'가 영어인 경우, 목표 문화는 '영어권의 문화'입니다. 그 언어를 배우면, 그것을 토대로 그 언어권 문화의 심부에 액세스할 수 있습니다. 모국어의 바깥으로 나와 이문화권(異文化圈)에 틈입하여, 모국어와는 다른 논리, 다른 감정을 추체험(追體験)하는 것, 그것이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외국어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모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과 만나고, 모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식과 공간의식 속에 틈입하며, 모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음운을 모국어만 말하는 한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신체기관으로 발음하는 것... 이는 모두 지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더없이 생산적인 경험입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어에는 복합과거와 반과거라는 두 가지 과거 시제가 있습니다만, 이 뉘앙스의 차이를 일본어 화자가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과거시제가 두 가지 있다는 것은, 프랑스어 화자가 시간의 흐름을 '완료'와 '미완료'의 두 가지 상(相)*으로 이해하는 특이한 시간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식이 다르면, 세상을 보는 방식도 다르고, 인간 행동의 해석도 다르며, 극론하자면 우주관까지 바뀝니다.
(* aspect. 전통 문법에서 동사가 지닌 동작의 양태나 특질 등을 나타내는 문법 범주의 하나.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완료상, 동작의 진행을 나타내는 진행상 등이 있다. 출처: 국문학박사 김경원. - 옮긴이)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개인의 인간적 성장뿐만이 아니고, 인류가 공동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외국어 학습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러한 인간적 사업으로써 꾸려가야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현재 행해지고 있는 영어 학습은 '링궈 프랭커(lingua franca)'로써의 영어, 커뮤니케이션 툴로써의 영어 습득으로 목적화되어 있어서, 이제 더는 '목표 문화'라는 것이 없습니다. '목표언어'는 있지만, '목표 문화'가 없습니다.
실제로, 어느 시점부터 대학의 영문학과에 진학하는 학생의 대부분이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를 습득한 뒤, 영어 실력을 살려 취업하고 싶어서'가 되었습니다. 영문학을 연구하고 싶다는 이유로 학과 선택을 하는 학생이 전체의 몇 퍼센트에 불과하다면, 영문학과에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영문학과에 진학하기보다도 원어민이 가르치는 영어 학교에 다니는 게 낫습니다. 학비도 싸고, 쓸데없는 학점을 취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지금 전국의 대학에서 영문학과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커뮤니케이션 툴로써 영어를 배우는 것은 단적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목표 문화'를 갖지 않는 외국어 학습을 아무리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학습자의 아이덴티티를 보다 강고히 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모국어적인 것의 관점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면서, 자기 쇄신으로 나아가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현재 영어 학습자들의 학습을 동기부여하는 것은, 우선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따는 것, 표준점수 높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100% '모국어 세계 내부적'인 현실에 자신을 귀착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모국어 세계 내부적인 것의 관점을 강화하기 위해 외국어를 학습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소행인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어 학습에 관한 제도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그 비논리성에 저는 끔찍함을 느낍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진정한 의미에서의 '배움'이란 어떤 것을 이르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배움'이라는 것을 소유하는 지식이나 정보, 기술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들 합니다만, 아닙니다. '배움'이란 자기 자신을 쇄신하여 가는 것입니다. 배움으로 하여 배우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움으로써 어휘가 바뀌고, 감정의 깊이가 바뀌며, 표정 발성 행동거지 등 온갖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컨텐츠(내용물)'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컨테이너(저장공간)' 그 자체의 형상이나 성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하아몽(吳下阿蒙)'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에 있던 여몽 장군은 용맹한 무인이었지만 학문이 없었습니다. 오나라 왕이 그것을 안타까워한 일에 분발하여, 여몽은 학문에 힘썼습니다. 오래간만에 동료인 노숙이 여몽을 만났더니 여몽의 학식과 교양이 깊어진 것을 보고 '이전의 자네와는 다른 사람이구려'하고 놀랍니다. 그러자 여몽은 '선비는 사흘 헤어지고 나면, 무릇 다시금 눈을 비벼가며 마주하는(괄목상대 - 옮긴이) 법이라오' 라고 응수합니다. 배우는 인간은 사흘 만나지 않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므로,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알레고리를 학교 선생님이 즐겨 언급하였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1960년대 무렵까지는 아직 잔존하여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교사는 일단 없습니다. 이제 '배움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일본 사회에서 공유되는 바가 아닙니다. 인간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채로 지식이나 정보가 늘고, 기능이나 자격을 몸에 익히는 그런 게 '배움'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억압의 힘은 그들 친구들끼리의 사이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고, 새로운 반이나 동아리에서, 새로운 친구 그룹이 만들어지면, 한 명 한 명에게 '캐릭터 설정'이 이루어집니다. 주어져 있는 캐릭터를 충실하게 연기하는 한, 그룹 안에서의 거처를 보증받습니다. 한데, 주어진 캐릭터로부터 일탈하는 것에는 강력한 억제가 작동됩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부쩍부쩍 변화합니다. 신체 매무새도 변하고, 목소리도 변하고, 감정의 분절(分節)도 변합니다. 읽는 책도 듣는 음악도 보는 영화도 변합니다. 하지만, 캐릭터 변경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룹의 '와(和; 대립이나 소외 없이 집단이 결속됨 - 옮긴이)'를 해치니까요. 따라서, 친구가 다른 사람이 되려는 조짐이 보이면 주위에서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같은 식으로 변화를 저지하려 듭니다. 친구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또한 불행한 일입니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축복해주어도 모자랄 판입니다.
-- 사회가 점점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만 되는 걸까요.
고등학생들한테 '꿈을 가져라' '네 꿈이 뭐니'라는 말을 하면 거의 울상을 짓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꿈'이라는 말로 지시되어 있는 것이, 단순한 '인생 설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어떤 전공을 배워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그것을 빨리 정하라고 채근하는 겁니다. 인생을 빨리 정해서, 정해진 노선 위를 달려라, 한 눈 팔지 마라 같은 말을 듣고서 좋아할 학생은 없습니다.
게다가, '꿈을 가져라'는 말을 해 봤자, 자녀들은 이 세상에 어떠한 학술 분야가 있는지, 어떠한 '일'이 있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하는 단계에서, '세상에서 어떠한 위치에 설지 고를거야 말 거야, 빨리 결정해라' 하고 강제하는 것은 학대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중고등학생에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니?' 하는 식의 질문을 무분별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서 무심코 입에 담은 말이 일종의 주술이 되어 자기 자신을 속박해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10대 사람들은 앞날 같은 건 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천직(소명; calling; vocation. - 옮긴이)이라는 것은 자기가 정하는 게 아니라, 저쪽의 '일'이 사람을 불러주는 법이므로, 서두를 것 없이 기다리면 됩니다.
-- 진로라든가 희망하는 직업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나가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세상에 어떤 직업이 살아남고 어떤 업계가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분야를 공부하면 평생동안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다'하는 전문 분야는 유감스럽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다지 하고 싶지 않지만, 이 직업을 가지면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와 같은 이유로 분야를 택할 일이 아닙니다. 참고 참아 겨우 '하고 싶지 않은 일'의 전문가는 되었으되, 그럼에도 '먹고 살 수 없게 됐다'는 상황이 되면, 답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정하기가 상당히 까다롭습니다만, '하고 싶지 않은 일', '이건 좀 무리' 인 일은 고등학생이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적으로는, 그것을 선택지에서 제외할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직업을 고를 때의 기준은 사실 '업종'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사무실의 분위기라든가, 착용하는 복장이라든가, 동료와의 대화 주제라든가, 그러한 구체적인 일상 속 분위기의 느낌으로 '할 수 있는 일 / 할 수 없는 일'을 선별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노(能) 연기를 하는 노가쿠샤[能楽師]인데요, 노가쿠샤가 된 이유를 예전에 물어보니, '기모노를 입는 직업이라면 뭐든 상관없었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나카이[仲居]' 님이든 '부기[舞妓]' 님이든 상관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 겁니다.
저는 이십 대 때 친구와 번역 회사를 창업했습니다만, 솔직하게 말하면 업종은 뭐든 상관 없었던 겁니다. 정시가 되면 일을 마치고서 여럿이 콘서트에 간다든지, 마작을 친다든지, 일요일에 다마가와 강 모래밭에서 야구를 한다든지, 오토바이로 투어링 간다든지 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것이 번역이었던 것은 '그냥 우연'입니다. 그러니만큼 훗날 회사의 사업 영역은 갈수록 변화하여, 출판이나 광고까지 하게 됐습니다.
제가 대학 교사가 된 것도, 거의 우연입니다. 대학원에 진학했던 건 '모라토리엄(소위 갭 이어를 수십 년 전부터 일본에서 이르던 말 - 옮긴이)'을 위해서였습니다. 졸업했어도 취업할 생각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판 백수여서는 살짝 모양새가 빠지기에, 대학원이라도 갈까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학원 시험에는 떨어지는데, 학부 졸업하고 대학원에 받아들여지기까지 두 해 동안 무직이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감과 동시에 창업한지라, 처음 얼마 간은 회사 경영하는 게 재미있어서, 대학원 수업에는 전혀 나가지 않고서, 학점도 안 땄으니, 성적도 처참했습니다. 하지만, 석사 논문을 쓸 시기를 맞이하여, 이것만큼은 제대로 된 걸 써보자는 마음을 먹고, 회사를 쉬고서 반 년 정도 집에 칩거하며 오로지 참고문헌을 읽고, 논문을 쓰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자니, 그 시간이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책을 읽고서, 원고지 칸을 메워가는 걸 직업으로 삼는다면 신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윽고 박사과정에 진학하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석사 논문은 선생님들로부터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으며, 무사히 박사 과정으로 나아가, 그 뒤에는 연구가 중심인 생활 방식을 취하려고 보니까, 다행히도 3년 차에 조수로 채용되어서, '대학 교원'이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서른한 살 때의 일입니다. 보통 학생이 구직활동을 해서 번듯한 일자리를 갖는 시기보다 10년 뒤처진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에두름'을 전혀 헛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원 재수하던 때에 번역을 해서 생계를 이어갔던 것도, 그 '고엔[ご縁]'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히라카와 가쓰미 군과 창업하게 된 것도, 정말로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에 결혼하여, 아이도 태어났구요. 다다 히로시 선생님이라는 걸출한 무도가를 접하게 되어, 아이키도라는 무도를 시작하여 수련에 밤낮 전념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어느 것 하나 제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았었다가는, 그로부터의 제 앞날, 인생은 정말로 다른 것이 되어있었겠지요. 모두 '고엔[ご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상대분께서 말씀을 걸어주셨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엔[ご縁]'이란, 그런 것입니다. 저쪽[あちら]에서 '좀 도와주지 않을래?' 해 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제 경우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이 어째서인지 전부 그랬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소리[声]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23-08-29 12:1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번역 노트】
부득이하게도, '고엔[ご縁]'이라는 어휘에는 긴 설명이 제게는 필요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에 붙어 있는 ご자가 무엇이냐면요, 음, 그냥 도시락과 정성이 듬뿍 담긴 도시락, 이 두 가지 이미지를 차례로 떠올려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일본어에는 다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이치고 이치에(一期一会)' 라는 예쁜 말이 있는데요. 그만큼 일본에서는 '緣'이라는 개념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연(緣)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연분'의 줄임말이라고 나오는데요.
'연분'은 ①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관계. ② 하늘이 베푼 인연. 이라고 또한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엔/えん/縁 에는, 일본어 사전에 따르면, 자그마치 뜻이 8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람의 힘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힘.
('무스비結び'라는, 어떤 일본 영화를 통해 한때 인터넷이나 젊은층에 널리 알려진 개념과 통하는 면도 있습니다)
② 부모, 부부, 친척 등의 관계.
③ 알고 지내는 사이. 교제.
④ 관련. 엮임.
⑤ 관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계기.
⑥ (불교)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간접적 원인이나 조건.
⑦ 툇마루.
⑧ '앞으로도 오랫동안 교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음, 제 겸손한 의견으로는, 일본어를 진지하게 하고자 한다면, 우선 불교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하더라구요. (아마 제가, 보고 들은 게 적어서 그렇겠지요.)
아무쪼록, 이렇게 읽어 주신 것만으로도 무언가의 '고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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