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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학교 도서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2/5)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9. 26. 12:24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특수한 기능인’으로 일컫습니다. 어떤 기능을 갖고 있냐 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지하 1층까지밖에는 접근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지하 2층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하 2층에 내려가면 거기에는 태고적부터 연면히 흐르는, 지금도 온 세상에 펼쳐져 있는 ‘수맥’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도구로 무언가 여남은이나마 건져서는 갖고 올라옵니다. 지하 2층은 인간이 오래 있기에 위험한 곳이므로, 일을 보고 난 뒤에는 재빨리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데, 그렇게 지하 2층에서 경험했던 것을 서사의 형식으로 이야기해오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작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러한 분야의 기능을 습득한 소수의 인간이 있습니다. 하루키 자신이 종종 스스로 그런 인간이라고, 이런저런 문학론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봤을 때 이건 문학적 메타포가 아니고,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경계선 저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는 소설들은, 따지고 보면 죄다 그런 것들뿐이니까요. 누군가가 경계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 경계선 저편으로부터 위험한 무언가가 내습하는 탓에, 그것을 되돌려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테마가 반복됩니다. 둘 다 경계선, 그러니까 피안과 차안을 왕래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는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유령’이 등장합니다. 이게 ‘유령’이라고나 할까,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이 등장해서는, 주인공은 그걸 어떻게 맞이할지를 이래저래 궁리합니다. <양을 쫓는 모험>부터 쭉 그래왔기는 했습니다만,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이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에서 대담을 하고 나서 결정적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대담 가운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와이 하야오에게 “<겐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악령이라든가 생령 같은 초현실적인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현실 그 자체였기에 그리 묘사한 것이겠지요?”라고 질문을 했는데, 가와이 하야오는 ‘그런 것들은 전부, 현실이 맞습니다’ 하고 즉답하는 겁니다.
<겐지모노가타리>에는 생령이 나오지요.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의 생령이 ‘아오이노우에’나 ‘유가오’에게 저주를 걸어 목숨을 앗아갑니다. 생령이나 악령에 의해 사람이 죽는다는 개념은, 헤이안 시대(794~1185년 - 옮긴이) 때는 그냥 현실이었던 것이라고, 가와이 하야오 씨는 선뜻 단언했습니다. 이를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던 것이겠지요. 그렇구나, 내가 유령 이야기만 줄창 써댔던 것은, 그게 애초에 ‘몽땅 현실’ 에서 일어나는 얘기였기 때문이었구나. 그렇게 여겼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자기 자신의 문학적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에다 아키나리’에 이르게 된다고 그는 스스로 밝힙니다. 개화기 때부터 시작된 근대 문학을 전부 부정하고 보니, 생각지도 못하게 훨씬 이전의 우에다 아키나리가 나타났던 겁니다. 그리고 우에다 아키나리가 쓴 이야기들은 죄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이 인간을 죽인다거나, 인간이 그것으로부터 도망다닌다거나, 그것과 어떻게든 해보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우에다 아키나리 이래의 문학적 계보를 직계로 잇는 게 바로 하루키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마당이니, 그런가 보다 합니다.
우에다 아키나리 역시 당대에는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성리학자들은 합리주의자였으므로, 우에다 아키나리가 쓰는 ‘유령 이야기’를 코웃음쳤습니다. 그런 건 괴력난신이자 망상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에다 아키나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현실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어서, 그것이 현실 속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 비로소 우에다 아키나리의 문학적 가치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의해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키 이전에도 1960년대에 우에다 아키나리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일본 문학의 연원은 우에다 아키나리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건 바로 에토 슌이었습니다.
에토 슌은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가서, 그곳에서 일본 문학을 강의했습니다. 영어로 수업을 하고, 영어로 논문을 쓰고, 귀국할 무렵에는 영어로 잠꼬대를 할 정도로 영어 세계에 깊이 침잠해 있었습니다만, 영어로는 자신이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썼던 문장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자신은 영어를 능숙히 다룰 수 있어서, 이 외국어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대화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영어로는 새로운 문학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으로서는 일본어로만 문학적으로 뭔가 이노베이션을 일구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일본어의 연원이란 게 있습니다. 에토는 그것을 소위 ‘침묵의 언어’라고 불렀습니다만, 그런 게 세상에는 있습니다. 고대서부터 현대까지, 일본 열도에서 발화되고, 서술되었던 모든 말들의 총화가 거기에 집적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한량 없는 ‘연원’이 있습니다. 일본어가 모국어인 인간은 그 아카이브에 액세스할 수 있습니다.
에토 슌은 영어권 화자들과 커뮤니케이션까지는 가능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내부에는 영어에 해당하는 ‘침묵의 언어’의 몫이 없습니다. 따라서, 영어로는 창조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국어로서의 영어 화자만이 영어에 해당하는 ‘침묵의 언어’ 아카이브에 액세스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본에 돌아와서는, 별안간 우에다 아키나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하라 사이카쿠나 지카마쓰 몬자에몬 따위는 전부 집어치워야 된다, 우에다 아키나리가 훨씬 훌륭하는 겁니다. 만약 일본에서 진정한 세계 문학이 출현한다면, 그것은 우에다 아키나리에서 이어지는 계보에서밖에는 나올 수 없다고 예언하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약 60년 뒤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장합니다. 딴세상 얘기 같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만, 이렇게까지 달아오르고 보니 하루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에서 처음으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과의 조우하는 이야기가 쓰여졌던 건 <양을 쫓는 모험>에서부터였습니다. 이 작품을 다 쓰고 나서 비로소 전업 작가로 나서도 되겠다는 자신이 붙었다고 하루키는 밝혔습니다. 그때까지는 재즈바 오너라는 입장의 겸업 작가였습니다만, 전업 작가가 되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마음껏 소설을 집중적으로 쓸 수 있는 환경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어떤 ‘광맥’에 가까워졌다는 실감이 생겼습니다. 매일 바지런하게 끌을 쥐고서 바위를 긁어나가는 사이에, 점차로 지하 수맥, 지하 광맥에 접근했다는 실감이 들었다는 얘기를 인터뷰에서 술회했습니다.
결국에는 그의 <양을 쫓는 모험>이 세계 문학의 반열에 들었습니다만, 이 작품은 세계문학 계보의 직계에 해당되는 ‘광맥’을 잇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씨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양을 쫓는 모험>에 속하는 동일한 계보의 세계 문학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것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입니다. 챈들러에게도 선행 작품이 있는데,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입니다. 이 세 작품은 서로 거의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알아듣기 힘든 얘기라 죄송합니다.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 얘기를 드렸습니다만, ‘나’라는 주인공, 그리고 그의 친구 ‘쥐’가 나옵니다. ‘쥐’는 ‘나’의 얼터 에고(alter ego)입니다. 자아의 분신이란, 상처 받기 쉽고, 순수하며, 도덕심이 결여되어 있는 면이 있으면서도, 지극히 매력적인 남자입니다. 이것이 주인공의 ‘소년 시절’, 애들러슨스(adolescence)입니다. 그 어린 자기 자신과 결별해야만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얼터 에고는 ‘나’가 장차 터프하고도 하드한 이 세상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 잘라내 버린, 자신의 가장 부드럽고, 가장 연약한 부분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자신의 애들러슨스를 인격적으로 표상해낸 것이 ‘쥐’이고, 테리 레녹스이며, 제이 개츠비이입니다. 그들은 모두 어른이 되기 위해 주인공이 잘라내 버렸던 애들러슨스의 대리 표상(代理表象)입니다. 얼터 에고는 주인공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라고 고하는데, 주인공이 그것을 이루고 나면, 얼터 에고는 자취를 감춥니다. 세 작품은 모두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양을 쫓는 모험>이 1982년,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이 1953년,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가 1925년에 나온 작품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선행 작품이 마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알랭푸르니에의 <대장 몬느(Le Grand Meaulnes)>라는 소설입니다. 이게 1913년 작품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나이는 제법 낮아집니다. 주인공은 프랑소와라는 열다섯 살 소년인데, 그의 앞에 키가 크고, 매력적이면서, 자유분방한 오귀스탱 몬느라는 소년이 나타납니다. 프랑소와는 그에게 매료당해, 그와 함께 모험하는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귀스탱은 떠납니다. 영원히 모습을 감춥니다.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애들러슨스이기 때문이지요. 소년 시절의 막이 내려가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어른’ 대열에 나란히 서게 될 적에, 그 황금과도 같은 나날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들기 마련인지라, 마침내 ‘어느날 영원히 내 앞에서 사라져버린 매혹적이고, 도덕심이 결여되어 있으며, 유아적인 소년’을 조형해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20세기 들어서 ‘똑같은 이야기’가 4개 쓰여진 셈이 됩니다. 잘 찾아보면 아마 <대장 몬느> 이전에도 선행 작품이 있었을 겁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소년은 언젠가는 어른 세계에 끼여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통과의례란 것을 거치면서, 자신의 찬란한 소년기에 영원히 결별을 고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 상실이 가져다주는 비참함과 고통스러움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소년 시절’을 인격적으로 표상하는 매혹적인 얼터 에고와 결별하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로 치자면 할례라는 이니시에이션*이 있겠습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소년기와의 결별이란 극심한 신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경험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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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니시에이션: 입문 의식. 1995년 옴 진리교 테러사건 이후 교단 내부의 학대 행위가 폭로되며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진 어휘.– 옮긴이)
소년기와의 이별은 트라우마적인 경험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외상이 남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서사가 필요합니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조사해 보면 수천 개가 넘는 사례가 나올 것입니다. 인류가 통과의례라는 제도를 발명해낸 이래로 ‘그러한 이야기’에 대한 수요는 항상 존재하였을 터입니다. 따라서 그런 맥락에서의 ‘광맥’이 있습니다. 태고의 인류에서부터 이어지는 모든 남자의 ‘나를 감싸 줄 이야기를 써 주게’하는 바람에 응하는 것이니만큼,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게 결국 세계 문학이 되는 겁니다.
이야기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얼터 에고와 헤어질 결심을 다루는 이야기는 ‘자기 자신의 소년기를 추도하는’ 제법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온 세상의 남자들은 통과의례를 거쳐 ‘밋밋한 어른’이 되어버림에 따라, 자신들의 잃어버린 소년 시절을 추모하는 이야기를 희구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런 유형의 서사를 저술하는 것은 남성 작가의 몫일 겁니다. 여성 작가가 쓴 ‘얼터 에고와 헤어지는 이야기’를 저는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작품이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알고 계시는 분은 제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모국어로 쓰여진 서책이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언어적 아카이브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일본어를 예로 들면, 모국어의 아카이브란 과거에 일본 열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 적에, 비로소 말이라는 게 처음 터져 나온 순간부터, 열도라는 공간 안에서 발화된 모든 음성, 쓰여진 모든 문자가 집적되어 있는 무언가입니다. 그 아카이브의 가장 상층부에 떠오른 국물, 거기에 현대 일본어가 있습니다. 현대 일본어는 그 ‘침묵의 언어’에서 떠오르게 된 ‘포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일본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언어적 감각을 아주 약간 민감하게 집중만 하면, 일본의 고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20세기 문학은 물론이거니와, 19세기 말의 나쓰메 소세키나 모리 오가이도 금방 읽어낼 수 있고, 그러는 가운데 18세기의 우에다 아키나리도 읽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일본어로 쓰여져 있으므로, 이해해 내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저는 몇년 전쯤에 <쓰레즈레구사(徒然草; 도연초)>를 현대 일본어로 옮겼던 적이 있습니다. 이케자와 나쓰키 씨가 기획한 <개인편집 일본문학 전집> 가운데 제가 <쓰레즈레구사>의 번역을 부탁받았던 것입니다. <마쿠라노조시>를 사카이 준코 씨가, <호조키>를 다카하시 겐이치로 씨가 마찬가지로 현대어로 옮기는 모둠이었습니다.
이케자와 씨께 부탁받았으니만큼 거절하기 힘들어 받아들였습니다만, 고전문학은 오랫동안 읽은 적도 없고, <쓰레즈레구사>는 재수 학원* 시절 조각글을 읽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각오를 굳히고 현대어 번역을 시작해보니, 이게, 상당히 술술 옮겨져서 놀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00년 이상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어(古語) 사전 1책만 있다면 번역해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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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駿台予備校; 슨다이 예비 학교. 도쿄의 간다 스루가다이에 위치. 인근의 유서 깊은 대학가 오차노미즈를 비롯, 이곳 지요다 구는 도쿄 1급지임. - 옮긴이)
그때 생각했던 게, 도연초를 쓴 요시다 겐코를 타임머신으로 현대 일본에 데리고 와도, 아마 3주 정도면 현대 일본어로 술술 이야기할 수 있을 거란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뿌리가 같은 일본어니까요. 문법 구조가 같고, 음운도 같구요. 따라서 모르는 단어를 들어도, ‘아~ 이 단어가 이렇게 변화했구나’ 하고 바로 압니다. 요시다 겐코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아마 바로 현대 일본어의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겠구나 생각하는 거예요.
따라서, 저 역시 타임머신으로 가마쿠라 시대(고려의 무신정권 시기와 대강 일치 - 옮긴이)로 데리고 가도, 한 달 정도 살면 네이티브 스피커와 똑같은 정도로 말문이 터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밤낮 <쓰레즈레구사>를 읽는 행위 역시, 상상적으로는 타임머신을 타고 가마쿠라 시대로 돌아간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면, 무엇이 그 옛날 쓰레즈레구사에 쓰여져 있는지를 이해하는 겁니다. 모르는 단어라도 어찌어찌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옮기고 난 뒤에, ‘<쓰레즈레구사>의 현대어역을 마치며’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어, 위와 같은 얘기를 한 겁니다. 그러자니, 질문 답변 시간에 관중 가운데 손을 든 분이 계셨는데, 자신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라고 밝힌 그분은, ‘제가 사실은 <쓰레즈레구사>를 전공했는데, 최근에 이걸 연구해서 박사 논문을 막 제출한 참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와아, 이거 일 났구나 싶었는데, 그 선생님이 ‘우치다 님의 현대어 번역은 굉장히 잘 되어있었습니다’라고 하셔서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웃음). 특히 가카리무스비(係り結び)*의 활용형이 우수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까닭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가카리무스비 자체는 문법 지식으로써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 활용형이 뭔가 5종류 정도 있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저는 가카리무스비에 복수의 뉘앙스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허나 그 선생님에 의하면, 제 가카리무스비의 활용형은 실로 정확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걸 옮길 수 있었던 건, 저에게 사전에 문법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고, 평연한 일본어로써 읽었기에 그랬겠지요.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아, 모국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절절하게 깨달았습니다. 어떤 언어의 모국어 화자 입장이 되면, 어떤 시대의 문헌이더라도, 약간만 익숙해지면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원래는 똑같은 ‘침묵의 언어’로부터 유래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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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카리 조시係り助詞: 조사의 한 종류. 이런저런 말에 붙어, 그들에 어떤 의미를 더해 다음에 오는 용언이나 활용 연어連語에 걸리고, 그들의 용언이나 활용 연어의 술어로서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것.
** 가카리 무스비結び: 문어에 있어서 문장 가운데 가카리조시 ‘조’, ‘나무(난)’, ‘야’ ‘카’가 쓰여진 때, 문장 끝을 연체형(連體形)으로 묶으며, 가카리조시 ‘코소’가 쓰여진 때, 이연형(已然形)으로 묶는 현상. 이러한 현상은 헤이안 시대에 특히 발달하여 널리 쓰이게 이르렀다. 하지만 중세 이래, 종지형과 연체형이 같은 어형으로 화함에 따라 쇠퇴했다.)
한편, 모국어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니오로지즘(neologism) 입니다. 신조어를 만들려거든 모국어가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이걸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말이죠, 벌써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스키를 타러 가서 그곳의 노자와 온천 노천탕에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러던 와중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2명이 나중에 들어와서는 텀벙 하고 노천탕에 들어가는 순간, ‘으와~ 야베에~(うゎー、やべえー)’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야바이(ヤバい)’ 라는 말은 원래 범죄자들이 쓰던 은어인데 ‘위험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시민 사회에 도입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은어의 양성화는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만, ‘야바이’의 경우는 한술 더 떠서 ‘대단히 기분이 좋다’로까지 뜻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렇구나, 그런 식으로 의미가 바뀐 거구나 하고 그때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그와 동시에, 어째서 의미가 바뀌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는 걸까, 이제는 오히려 이게 궁금해진 것이었습니다. 딱 듣게 된 순간 ‘야바이’에 ‘매우 기분이 좋다’ 라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제가 곧장 찾아볼 수 있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야바이’ 항목에는 ‘속어(원문 若者言葉; 젊은이들 말 - 옮긴이)’로 ‘매우 기분이 좋음’ ‘최고임’ 이라고 등록되어 있습니다.
신조어라는 현상의 놀라운 점은 ‘듣는 순간에 난생 처음 접한 말임에도 의미를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듣고서 ‘이거 혹시 이런 뜻인가요’ 하고 되묻지 않으면 그 뜻을 알 수 없는 어휘는 ‘신조어’가 아닙니다.
‘마갸쿠[真逆]’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네요. 처음 들었던 게 어느 대담 자리였는데 시부야 요이치 씨가 하고 있는 잡지 ‘SIGHT’가 주관했었습니다. 이때 다카하시 겐이치로(소설가 - 옮긴이)씨가 참석했는데요. 겐이치 군이 ‘마갸쿠’라는 소리를 내었을 때, 난생 처음 들은 말이었는데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라는 문자열이 금방 머리에 떠올랐고, 그것이 ‘정 반대’보다 조금 강조된 의미라는 뉘앙스의 차이까지 전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처음 들은 말인데도 의미와 뉘앙스를 모두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우리는 일상적이고도 평범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처음 말하기 시작하고 나서, 아마 몇 주나 몇 개월 안 걸렸을 텐데요, 결국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국의 사람들이 ‘마갸쿠’란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신조어를 만든다는 건, 외국어로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유창하게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면, 영어에 속하는 신조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go-went-gone이라는 불규칙 변화를 외우는 게 성가시므로 앞으로는 go-goed-goed로 해버리자고 해도, 영어 화자는 쳐다도 안 봐줍니다. ‘그런 이상한 영어는 없다’는 말만 듣고 말 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자기 자신을 있게 만든, 그 언어적 자원의 근저에서 자연스레 솟아오른 어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국어 아카이브가 갖는 생성력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마음 속 깊이 통절하게 깨달았습니다. 에토 슌이 ‘침묵의 언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걸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서책이라는 것은, 그런 모국어 아카이브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서책을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 이 모든 게 바로 그 풍요로운, 깊이가 한량 없는 모국어의 아카이브에 들어가기 위한 회로입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현실과는 유리된 ‘경계선의 피안’에, ‘지하’에, ‘이 세상 것이 아닌 것’과 맞닿기 위한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미의식, 이데올로기가 통용되지 않는 경위일 터이지만, 기어코 이해가 가능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 모국어의 아카이브가 자기 자신의 어휘 감각이나 어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구사하고 있는 논리 형식, 자신의 사념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때에 사용하는 어휘, 이 모든 것이 그 아카이브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남의 집에 방문할 기회가 있는데, 이때 잠시만 있어도 까닭 없이 숨통이 조여오면서 어서 나오고 싶어지는 집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 경우 그건 ‘책이 없는 집’이 그랬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놓아도, 책이 없는 집은 오래 있으면 숨이 막히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산소결핍에 걸릴 것 같습니다. 책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책이란 건 ‘창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세계로 나 있는 창’, 다시말해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 겁니다. 따라서, 책이 있으면 안심됩니다. 바깥 세상으로부터 시원한 공기가 확 하고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죠.
제 친구들의 집에 가보면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만, 화장실에 책이 있습니다.* 저희 집도 그래요. 정말, ‘장난이 아닌’ 양의 책이 화장실에 쌓여있습니다. 화장실은 공간적으로 상당히 폐쇄감이 드는 곳인데, 거기에 책이 몇 권 세워져 있는 것만으로도 갇혀 있는 곳에서 뭔가 널찍한 곳으로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널따란 곳에서 배설 작업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화장실에 읽고 싶은 책이 없을 때에는, 읽을 책을 미리 찾아낸 뒤에 갑니다. 제 책장 앞에서 ‘아이고 큰일났다’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음... 이건 아니야. 이것도 아니고’ 하며 책을 고릅니다. ‘아, 이거다’ 하고 정해지면 화장실로 달려갑니다. 책이 없는 화장실은 좁아 터진 곳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책을 펼치면 해방감이 듭니다. 이렇듯, 책이라는 것은 이곳과는 다른 세계로 향하는 개방성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의 가정 화장실은 건식으로 용변장과 욕실이 대개 분리되어 있음. -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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